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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21>논문집



글 쓴 이  
   김하준 (2004-06-12 10:47:05, Hit : 11133, Vote : 1810)
홈페이지  
   http://www.haewae.co.kr
제     목  
   남해안에 산재하는 '고려장터'에 관한 소고(소논문)
                                <소논문>

            남해안에 산재하는 '고려장터'에 관한 소고

                                                                 김 하준*

우리나라 지역 곳곳에 '고려장터' 또는 '고례장터'라는 지명이 산재해 있고, 대부분 고려장
설화와 관계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려장터에서는 석관묘(石棺墓)나
석실분(石室墳), 돌무지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장에 관한 「야후 백과사전」의 설명내
용은 아래와 같다.

고려장(高麗葬): 고구려 때의 장사 지내는 법.  노쇠한 사람을 광(壙; 墓室)속에 옮겨 두었다
가 죽으면 거기 안치하고, 금은 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였다고 한다.  불필요해
진 노인을 버리던 좋지 못한 습속이므로, 고려장을 없애는 줄거리의 구전설화가 전국에 분
포되어 있다.  이 설화는 <기로전설(棄老傳說)>,<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유래>라고 불린
다. 1)

그러면, 백과사전의 설명대로 고구려 때의 장사법이며, 이 장사법이 전국으로 계승되어 그
흔적이 고려장터라는 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꽤 소개
되고 있다.2),3)  특히, 이우석은 고려장 설화가 불교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
국연(棄老國緣) 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중국『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와 유사
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4)  전반적으로 고려장터라고 불리는 곳의 무덤은 고구려계의
활동영역과 일치하고, 고구려계 또는 그 영향을 받은 집단의 고분들로 보인다는 것이 일반
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남해안에 분포하고 있는 고려장터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고려장터라는 고분군이 고구려계 또는 그 영향을 받은 집단의 고분들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그 연결고리가 확실하게 이어져야 할 것이다.

남해안 지역에서 주목되는 지역은 첫째로 사천군 사남면 방지리(芳芝里)의 고려장터로 동쪽
지산마을 건너편에 있는 고분으로 고려장터라 하였으나, 발굴치 않고 삼성항공에 편입되었
다고 한다.5)  또, 고현면 도마리 성산석성 주변에도 고려장터가 있다.  둘째로 남해군 서면
우물마을의 고려장터로 이 마을 사람들은 음력10월 보름 동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 이
10월 동제는 고구려의 동맹과 관계가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6)  또, 장목면 농소리
농소마을에도 고려장터가 있다.  셋째로 거제도의 연초면 송정리 장자골의 고려장터가 주목
을 끈다.7)  넷째로 밀양의 가곡동 망우골에도 고려장터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
도 더 많은 지역에 고려장터의 설화가 전해지리라 추측된다.  이곳들은 앞에서도 언급되었
듯이 석관묘, 석실분 또는 돌무지무덤이 존재한다.

이렇게 고구려계의 영향을 받은 고분군이 존재하고, 고려장 설화가 전해지고, 10월 동제의
관습이 유지되어 온 것은 고구려계 주민의 이주, 또는 지배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고리를 연결해 주는 사실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400년대의
남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당시 고구려의 기병을 포함한 육상군은 동해안
루트로 이동, 해상군은 서해안-남해안 루트로 이동, 가라(가야) 지역을 평정하였고, 한 동안
이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아래의 비문에 보이는 광개토대왕비 명문 중 追至任那加羅從拔城이 나오는데, 이에 대하여
임라가라와 종발성을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충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고, 이 중, 임라가라나 종발성의 위치, 또는 從자의 해석이 확실히 풀릴 수 있다면, 많은 것
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

종발성(從拔城)을 살펴보면, 終자는 '좇을 從'자이며, 고형은 '좃  죵'이었다.  따라서, 從을
訓讀하면 '좃'이 된다.  또, 拔을 보면, 拔자는 '뺄 拔' 이며, 고형은 '  발'자였다.   ' '의
전 단계는 '발'로 보이고, ㅅ과 ㅣ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從拔은 '좃발'이
되고, 『三國史記』지리지의 草八兮와 거의 같은 音價를 보인다.  그 당시에는 ㅈ과 ㅊ의 구
분이 뚜렷하지 않았음이 여러 인명과 지명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從자와 草자의 대응이 성
립된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拔자가 다른 곳에서 쓰였듯이 '성을 점령하다'로 볼 수 있겠으
나, 그렇게 해석하면 뒤의 城卽歸服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로 볼 때, 고구려의 南征軍의
일부가 종발성(從拔城)을 점령한 후 한 동안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점령군은 종
발성 이외의 지역에도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위의 사천, 거제, 남해도 포함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高麗史』 地理志의 내용 중에 고구려가 남해군의 창선도에 그들의 部曲, 有疾部曲
을 설치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에 관하여 고구려는 고려의 잘못이라거나, 기록의
오류라는 주장에 대해 백승옥은 그의 최근 저서『伽倻 各國史 硏究』(도서출판 혜안/2003)
에서 조목조목 반박하며, 고구려가 이 지역을 포함한 고자국을 점령하면서 有疾部曲을 설치
하였으리라 주장하였고, 필자도 이에 동조하는 바이다.  이 有疾部曲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려시대의 부곡의 개념이 아니라, 중국 漢代의 군대편성상의 部·曲↔의 개념과
동일선상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9)에도 동조하며, 이종옥의 저서『花郞』(휴머니스트
/2003)에 언급된 『화랑세기』상의 문노공이 설치한 郎徒部曲도 이와 유사한 성격이 아니였
을까 생각된다.  이 郎徒部曲이 고려 때의 부곡의 개념과 다를 것이라는 언급은 김태식
(taeshik@yna.co.kr)에 의해서도 이루어진 바가 있다.

이로 볼 때, 광개토대왕의 南征時에는 중국 漢代의 군대편성상의 部·曲↔의 개념과 유사
한 형태의 군 편성 단위가 존재하였고, 그 중의 하나가 有疾部曲이란 기록으로 남았고, 한반
도 남해안 지방의 고구려의 주둔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간보다 오랫동안 이루어졌었으며, 고
구려의 풍속과 장사제도도 상당히 깊숙하게 침투하였었고, 그 흔적이 고려장터라는 석관묘,
석실분 또는 돌무지무덤으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야 제10대 임금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인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금서면(今西面) 화계리(花溪里)의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도 그 무덤의 형태로 보아, 위와 관계된 고구려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남해군 서면 우물마을의 10월 보름 동제의 경우로 볼 때, 고구려의 주둔군 내지는 部曲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민간인, 특히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되며,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그 지역에서 눌러앉아 살아왔으리라 생각
된다.  이웃의 상남마을, 유포마을에서도 음력 10월15일 동제를 지낸다.  또한 서호마을에
홀포(忽浦)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忽자는 고구려계의 城을 표기하는 지명이다.

이와는 별도로 군북면 사도리 장사골 및 수곡리 산 142번지 일대에 수곡고분군이 있고, 고
려장터라고도 불리며 청송 沈씨 묘역과 관계가 있는데, 혹, 고려조에 등장하는 청송 沈씨가
고구려인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10)

최근 2000년 전 탐라국 시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발견된 애월읍(涯月邑) 광령
리(光令里)에도 고려장 설화 연결된 '비신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암혈신앙과 관계가 있는 듯하여 주목을 끈다,  '비신굴'의 '비신'은 '빛
(光)+신(令)'으로 광령리(光令里)의 光令과 같은 의미이다.

경기도 여주군과 양평군에 걸쳐있는 고래산은 '고달산(高達山)'으로 불리기도 하며, 예로부터
고려장을 하던 '고려산'으로 불리었다.  금동마을 뒤쪽으로 고려장 굴이 있어 옛 고려장 관
습에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산이라고 전해지는데, 이것도 고구려의 암혈신앙과 관련이 있으리
라 추정된다.

그러면, 고구려계의 고분과 고려장이라는 설화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는 일제시대 때에
도굴을 하기 위하여,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11)  도굴시 인부들이
옛 무덤에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꾸며냈다는 것이다.  이는
뚜렷한 근거자료가 없으므로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이며, 고려장이란 용어가 고려장터와 연
결을 맺게 된 것은 앞에서 언급된 <기로전설(棄老傳說)>,<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유래>
등의 설화가 도입되었던 시기라 추정된다.  고려장 설화의 허구성에 관해서는 김수자(1987),
김민한(1999)에 의하여 연구된 바가 있다.12)13)

정리하면, 고려장터로 전해오는 고분군은 고구려 또는 고구려계의 고분이며, 고려장 설화와
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며, 남해안가에 분포하는 고려장터는 400년대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의 南征과 관련된 고구려의 주둔군 또는 그 후손들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有疾部曲도 郎徒
部曲과 유사한 고구려의 부곡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전국 곳곳에서 보이는 10월 동제(음력
10월 보름의 동제)도 그 분포가 고려장터의 분포지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
려의 동맹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의 연구가 좀더 심도 깊게 진행되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참고자료 및 문헌>

1)http://kr.encycl.yahoo.com/enc/info.html?key=1071940
2)http://www.cmac.co.kr/club/chunhwa/contents/%C7%CF%B4%C3%B0%A1%B4%C2%B1
%E6/thema4.asp
3)http://medicine.chungbuk.ac.kr/%7Estuka/4278/grab.htm
4)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08/08-05.html
5)http://www.4000news.com/sachon/sajiname/sanam/bangjiri.html
6)http://www.namhae.go.kr/namhae_gun/self_admin/namhae_about/our_contry/suthmion/sut
hmion_21.htm
7)http://www.koje21.co.kr/kojeinfo/history-area/yen-song.htm - 12k
8)백승옥, 2003, 『伽倻 各國史 硏究』도서출판 혜안(pp223-232)
9)이종옥, 2003, 『花郞』 휴머니스트
10)http://www.gunbuk.es.kr/kb-search/%B0%ED%BA%D0%B1%BA/%BC%F6%B0%EE%
B0%ED%BA%D0%B1%BA1%28%B0%B3%BF%E4%29.htm
11)http://www.nspider.co.kr/treasure/child-history23.html
12)高麗葬설화의 형성과 의미 / 李秀子 (국어국문학, Vol.- No.98, [1987])
13)高麗葬說話의 虛構性에 關한 硏究 (Study on the Fictiticous Character of    
GORYEJANG) / 金珉漢 (韓國思想과 文化, Vol.5 No.-,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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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촌장   후원금 내역(2006.9.5현재) [11] 2003-06-10 9186 2098
100  촌장   제2호 원고_교정본(2006.3.23) [1] 2005-10-01 7974 2023
 김하준   남해안에 산재하는 '고려장터'에 관한 소고(소논문) 2004-06-12 11133 1810
98  서석   김하준님 원고 3 2004-04-24 8076 1927
97  서석   김하준님 원고 2 2004-04-06 7194 1698
96  서석   신동훈님 원고 2 2004-03-07 8060 2021
95  서석   신동훈님 원고 1 2004-03-07 8246 2247
94  서석   김하준님 원고 [4] 2004-03-01 8482 2094
93  서석   역사탐정님 원고 [1] 2004-03-02 7531 1851
92  서석   여름님 원고 [3] 2004-03-01 7994 2051
91  신동훈   가만 그때 제호를 어떻게 하기로 했었죠? [1] 2004-08-28 6029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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