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글 쓴 이  
   돌마루 (2017-01-13 08:35:48, Hit : 185,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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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목지국은 정말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나?
마한 54국이 각각 어디에 있었나를 나름대로 추정하다, 목지국에 이르러 필자는 기존의 위치비정들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月支國, 『후한서』에서는 目支國이란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 소국의 위치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강원도 동해 바닷가 “강릉(江陵)시”로 확인하였다.  

종래 학자들이 목지국은 마한54국 연맹체의 맹주국이라는 통념에서 출발하여 그 위치가 대략 한반도의 중남부, 즉 충청도와 전라북도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여 그곳 어딘가의 지점을 목지국의 소재지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필자의 이러한 결론은 필자에게도 매우 뜻밖의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다른 고대지명들과 맞추어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이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 결론이 정확한 것이라면 목지국이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라는 기존 통념은 재고되어야 한다.

여태껏 한국고대사학계는 왜 목지국이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던가? 물론 중국의 사서에 그러한 듯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찾아보니 그 근거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단지 하나 뿐인 그 근거도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것이다. 아래에 그 근거로 보이는 『후한서』 東夷列傳 의 한 구절을 인용해둔다. "都目支國" 부분의 ‘都’자를 눈여겨 봐주기 바란다. (아래 한문 인용문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적출한 것이다)

····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그리고 『후한서』보다 더 오리지널한 것으로 인정되는 『위서』 東夷傳에는 어떻게 되어 있나를 확인해 보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史書 자체의 성립 시기는 『(삼국지) 위서』(280년)가 『후한서』(432년)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당 구절 "辰王治月(目)支國"에는 ‘都’자가 아니라 ‘治’자가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馬韓在西. 其民土著, ······ 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

얼핏 보면 이 “都目支國”과 “治目支國”의 차이는 대수롭지 않은 차이라고 느껴지고, 심지어 ‘都(~을 도읍으로 삼다)’자와 ‘治(~을 다스리다)’자가 하나의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서로 보완적인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그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사실 “都目支國”과 “治目支國”의 함의는 서로 천양지차라 할만 하다. “목지국을 도읍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 辰王 집단(“辰國”?)이 병합이든 통합이든 어쨌든 이 목지국과 결과적으로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이고, “목지국을 다스렸다”는 것은 辰王 집단이 목지국을 대상으로 두고, 중간에 渠帥이든 臣智이든 그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보이는 수장층들을 통하지 않고 그들을 직접 통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治目支國”이 옳다는 입장은, 辰王 집단과 목지국이 내부적으로 통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辰王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의도에 충실하게 따르는 수하 인원들을 보내어 목지국을 전반적으로 통치하는 지배자이며 목지국은 그 辰王 집단의 통치를 받는 피지배자의 처지에 있었음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러한 문제에서 많이 언급되는 『翰苑』 에는 어떻게 되어 있나를 보았다. 우선 간단한 소개를 하면, 이 문서는 당나라 張楚金의 간단한 표제문(660년경)에 宋人 翁公叡(옹공예)가 이러한 표제문의 典故를 주로 인용한 주석문을 더하여(830년경) 만든 일종의 문장전범 편람서다. 필사본 형태로 잔본 한 권만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 권 안에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魏略’과 ‘後漢書’의 해당 인용문들이 들어 있다.

○ 職標臣智, 都號目支    
魏略曰 三韓各有長師[帥]. 其置官, 大者名巨[臣]智, 次曰邑借, 凡有小國五十六, 惣十餘萬戶. 辰王治目支國, 目支國置官, 赤[亦]多曰臣智. 後漢書云,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間,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治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 皆是馬韓種人焉.

보시다시피 이 『한원』에는 ‘都’자도 들어 있고 ‘治’자도 들어 있다. 장초금이 지은 표제문 “○ 職標臣智, 都號目支( ○ 관직 이름은 신지라 하고, 도읍 이름은 목지라 한다)”에는 ‘都’자가 들어있음에 비하여 아래의 翁公叡가 붙여놓은 인용문에는 ‘治’자만 들어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즉 장초금은 『위서』가 아니라 『후한서』에 근거를 두고 그의 표제문을 지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翁公叡은 그것에 대한 주석문을 붙인다는 입장에서 바로 그 『後漢書』의 해당 구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도(“後漢書云” 아래 부분에서) “都目支國”을 도리어 또 다시 “治目支國”로 바꾸어놓았다. 왜 그런 걸까? 물론 필자도 분명하게 알 도리가 없다. 혹시 필자처럼 翁公叡도 『위서』 나 魏略 혹은 기타 문서기록들에 나타나 있는 “治目支國”에 비춰보아 이 ‘都’자가 의심스러웠던 걸까?

아무튼 장금초의 표제문(660년경)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治’자 대신 ‘都’자를 넣어 “都目支國”으로 변조한 최초의 작자(원흉?)는 바로 『후한서』(432년)의 원 편찬자 范曄(범엽)이 분명하다. 아마도, 범엽이 문서기록을 통해서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재편찬하는 입장에서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리고, 삼한의 모든 지역을 다 다스린다(治目支國, 盡王三韓之地)”는 의미상 거듭된 중언문이 이상하고 껄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한 50여개국의 1개국에 불과한 목지국을 따로 떼어서 특필할 이유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즈음 그는 이 ‘治’자를 ‘都’자로 바꾸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것 같다. 즉 “(진왕이) 목지국에 도읍을 정해두고 삼한의 모든 지역을 다 다스린다(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로 바꾸어 놓은 후에, 문장의 의미도 순차적인 흐름이 되면서 문장의 읽힘이 훨씬 더 매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불어 의문스러웠던 목지국의 특필 이유도 해결되고. 물론 이것은 필자의 막연한 추측이지만 이러한 이해 말고는 이 ‘都’자를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오늘날 한국의 고대사학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에 이 漢字 한 자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고대사 인식상의 오류는 만만찮은 것이었다. 필자에게는 이 오류는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인다.

이번 필자의 목지국 위치비정, 즉 강원도 강릉시에 비춰보면 마한 50여개국의 1개국에 불과한 목지국을 따로 떼어서 특필한 이유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이 목지국이 지리적으로 아주 독특한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여타 마한 50여개국이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대체로 서로 인접하여 위치하는 것으로 예견됨에(필자는 이 50여개국의 위치비정을 아직도 다 끝내지 못했다)  비하여 이 목지국만이 태백산맥 준령을 넘어 동해 바닷가 강원도 강릉시에 홀로 현격히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진왕이 목지국을 직접 다스린다(辰王治目支國)". 그렇다면 辰王 집단은 당시에 왜 많은 노고를 치루면서까지 그토록 먼 목지국에 진출하였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여러 방면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노고를 갚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이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그곳에서는 서해 바다의 것과 다른 진귀한 해산물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략적으로는 현재의 강원도 원주(삼한시대의 怒藍國)에서 그곳까지 가로놓여 있는 험준한 산악의 통로를 항상 열어두면서, 언제든지 여러 동해안 주요 거점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강릉이라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릉은 이른바 漢四郡 초창기의 臨屯郡의 치소였으며( 위치비정에서 여러 설이 있지만 필자는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른다), 그 후 여러번 거듭해서 漢郡縣들이 재편된 뒤에도 이른바 낙랑군 동부도위 7현의 하나인 蠶台縣(잠대현)이 강릉의 바로 코 앞, 즉 주문진까지 내려와 있었다. 짐작컨대 辰王 집단은 이 곳을 직접 힘써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순식간에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辰王은 누구인가? 당연히 필자는 위 『후한서』의 인용문이나 『위서』 동이전에 나타나는 “옛 진국(古之辰國)”의 수장, 辰國의 君王이라고 생각한다. 이 辰國이 앞 시대의 사서인 『史記』에도 보이고 『漢書』에도 보이기 때문에 『위략(魏略)』 이후의 사가들은 ‘옛[古之]’이란 관형사를 붙인 형태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辰國이 옛 것과 그 당시의 것이 각각 아무런 전승 관계도 없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옛 진국(古之辰國)’이나 그 당시의 ‘辰王의 辰國’은 동일한 소국을 가리킨다고 이해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 이 辰國은 어떠한 나라인가? 물론 이러한 국명과 조금 후대에 나오는 삼한의 지역단위 명칭(특히 “辰韓”)에 따르는 한국고대사의 조금 복잡하게 얽힌 난제를 필자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짧은 글의 주된 목적은 그러한 것을 깊게 논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필자 나름의 ‘辰國’관을 피력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필자는 이 辰國을 다름아닌 삼국시대의 한 주축국으로 성장한 바로 그 百濟(한성백제)의 전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百濟라는 이름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마한 54국명 중 하나의 명칭으로 나타나는 “伯濟國”에서 한자 한 자만 바꾼 명칭 형태이다(‘伯’ →’百’). 따라서 이 국명의 연혁은 다음과 같이 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 辰國 > 伯濟國 > 百濟 ".

이 辰國은 이른 시기부터 주로 서울을 포함한 오늘날의 수도권 전체의 패자로 등장하고 있다. 지명연혁을 통하여 필자가 수도권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타 소국들은 확실히 이 진국에 비할 바가 못된다(아래의 위치비정을 참고하기 바람). 그리고 위에서 필자가 힘써 밝혔듯이 이 진국은 심지어 이 수도권의 동쪽 연장선의 끝 지점인 강원도 강릉시까지 그 세력을 뻗히고 있었다. 따라서 한 때 漢郡縣 관리들이 이 辰國을 삼한 전체의 패자라고 기록을 남긴 점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결론을 내린다면, 목지국이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다는 이미 상당히 일반화 되어있는 이 고대사학계의 통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굳이 이러한 명제 형태의 통념을 앞으로도 반복해서 말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伯濟國’이 마한 연맹체의 종주국이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 54국, 앞 부분의 몇 소국에 대한 필자의 위치비정

爰襄國 -  서울시 마포구 일대
牟水국 -  경기도 수원과 의왕 일대
桑外국 -  경기도 전곡과 연천 일대
小石索국 – 경기도 교동도
大石索국 – 경기도 강화도
優休牟涿국 – 경기도 부천과 김포 일대
臣濆活국 – 인천시 중구 일대
伯濟국 – 다산설에 따른 결과, 대체로 서울시 강북구 내지 성북구 일대
速盧不斯국 – 경기도 광명과 시흥 일대
日華국 – 경기도 안양
古誕者국 – 경기도 이천
古離국 – 경기도 안산
怒藍국 – 강원도 원주
月(目)支국 – 강원도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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