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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글 쓴 이  
   크크리 (2016-07-08 17:10:36, Hit : 330, Vote : 15)
제     목  
   辰韓遺民이란 망국인 진한의 유민이란 뜻
38년(기원전 20)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람은 바르게 되고 하늘은 온화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ㆍ낙랑ㆍ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게 저를 보내어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과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노하여 힘으로 핍박하시니, 이는 어떤 의도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가까운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자 겨우 호공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들이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잡으려 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부른 것이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 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寢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39년(기원전 19), 마한왕이 죽었다. 누군가가 임금을 설득하였다.
“서한(西韓)왕이 이전에 우리의 사신을 욕되게 했습니다. 지금 국상을 치르는 중이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다른 이의 재난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임금은 신하의 말에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진한의 유민이라 함은 이전에 진한이 망했었다는 말이다. 고구려, 백제 유민이라고 할 때 망국의 백성을 뜻하지 않는가?
신라가 곧 진한이니 신라가 이전에 망국이었다는 결과가 된다. 그것을 유일하게 기록에 남긴 것이  안승책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서기 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대조 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비산(比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 고구려를 의미)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무왕 상 [⽂武王 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성경통지에 의하면 현도는 요동을 의미한다.

그 땅이 천리라 했으니 초기 고구려강역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왕 [琉璃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남당유고 고구려사략에는 협보가 신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남한은 신라였던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삼국초기부터 신라는  남한이라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는 당연히 변한도 포함되는 것이다.



19년(기원전 39) 봄 정월,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박혁거세를 평화를 추구했지, 군대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기원전 39년에 변한이 항복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신라 이전 진한을 지배한 여인국으로 추정된다.



이 때의 경주 비산에서 승리한 사람이 주몽이고, 승리했으나 그들에게 덕을 베풀어 살아갈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머지 잔당이 있는 변한을 공격한 것이고, 이것을 남해에서 공을 세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옛부터 속민이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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