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글 쓴 이  
   크크리 (2016-07-04 21:47:10, Hit : 296, Vote : 11)
제     목  
   여인국 및 이성, 승하, 고
현재 그 근거로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만을 봐서는 알수가 없는게 현실이다.

다만 삼국사기 문무왕조 안승책봉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서기 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대조(大祖)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비산(比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 고구려를 의미)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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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초중기에는 태조라 하지 않고 대조, 태왕이라 하지 않고 대왕, 태보라 하지 않고 대보라 했다.  책문에 쓰인 대조라는 용어는 그 당시에 옛 기록에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entry/婆娑尼師今紀파사이사금AD126-AD158재위33년-1-7년-기사

이 곳에 있는 정성일씨의 견해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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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돈장의 계보를 살피면 다파라군이 신라녀를 처로 삼아 토해를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다파라군 역시 신라에서 살았다는 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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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파라군이 아버지이고, 그 어머니가 여국왕녀(삼국사기) 또는 적녀국왕녀(삼국유사)라는 것은 신라가 이전에 여국=적녀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박혁거세 때 신라의 국명을 서라벌(황금벌판이란 뜻)이라했음에도, 그 이전 여국의 명칭인 사라국으로 계속 불릴수밖에 없없던 이유라고 할수 있다.  

** 503년(癸未年:지증왕 4) 9월 25일에 건립된 「영일냉수리신라비」의 첫줄을 보면 당시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斯羅``라고 했다. 양직공도에도 사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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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526-536시기 양나라를 방문한 사신을 그린 것)의 제기에 신라의 국호는 사라국(斯羅國)으로 표기되며 더구나 신라가 "한(韓)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고 씌여 있다.

지금 경주에 있는 비산은  안승책문에 나오는 바로 그 비산이고, 자동서기로 쓰여진  여인왕국에 보면 그 당시의 6부족은 지금의 경상북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야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 여인왕국터의 아랫마을이름이 가야마을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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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국의 역사기록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 동옥저(東沃沮)의 기록에 ‘동해바다에 여국(女國)이 있는데 남자가 없다. 혹 전해오기를 이 나라에 신정(神井)이 있는데 이를 엿보면 임신을 한다’고 기록하였다(권85, 동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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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여국, 삼국유사의 적녀국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지 않은가!


이로써 볼 때 신라이전에 여인국이 있었고, 그 여인국을 멸망할 때, 최후거점이 경주였으며, 이 때 비산의 최후결전에서 승리를 이끈 주몽이 여인국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고, 그것으로 인해 도절, 협보, 작태자, 고구려에 비속되어 있던 7개국이 그곳으로 내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인국은 없어졌으나 그곳에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국의 후손인 탈해가 왕이 될 목적으로 가야에 들리기도 하고, 신라에 온 것이기도 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94&aid=0000005160
고대사회의 도시 형성은 반드시 산과 강(=물)을 끼고 있어야 한다. 외침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산과 거주하는 데 필수품인 물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여기에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다면 완벽한 지형조건이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 더욱이 3개의 하천과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형성된 평야는 그야말로 옥토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 살 만한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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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추모경과 고구려사략을 보니,

추모왕을 성인(聖人), 추모와 소서노를 이성(二聖), 대무신왕의 고구려를 聖人의 나라라고 한 기록이 있다. 중천대제기에도 옥모와 중천제를 二聖이라 하였다.

성모, 성부라는 말도 고구려에서 먼저 썼고,
대보도 고구려에서 먼저 사용한 말이다.
남당유고를 보니 신라의 성풍속은 고구려에서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상장돈장에 보이는 성모, 성부, 대보 이런 것은 고구려에서 전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신라초기에는 박혁거세가 추모왕처럼 승하라고 할만큼, 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후 소국으로 전락하여 남해왕은 스스로  소국의 군주가 쓰는 孤를 사용하고 있다. 박혁거세의 시신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게 방해를 받았는데, 그게 외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실성왕과 눌지왕의 남당유고 기록을 살펴보면 때로는 삼국사기가 더 정확하다. 눌지왕에게 짐독으로 살해당한 것을 감추기 위해, 터무니 없는 스토리를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박제상이 편찬한 부도지마저 실성왕이 눌지왕에게 양위했다고 기록할 정도니...

승하와 고(孤)라는 용어는 박혁거세와 남해왕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혁거세만이 천자라고 하며, 승하라고 했으나, 그 뒤엔 누구도 사용하지 못했다.


차길진 법사 글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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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6부촌장중 4인의 사주로 독살을 당하고 육시에 처해졌다고 한다. 알영도 죽었다고 하니, 신라가 왕권이 추락하고 소국이 될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를 세우는데 동의했지만, 국가의 통제로 그들이 누리는것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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