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글 쓴 이  
   크크리 (2016-07-04 07:53:26, Hit : 239, Vote : 12)
제     목  
   삼국사기에서 승하한 두명의 왕

승하
[ 升遐•昇遐 ]


임금이 세상을 떠남. 훙(薨)함을 이르는 말로 먼 곳에 오른다는 뜻임. 유학의 명분론에 따르면 천자만이 승하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는 관찬 사서에서는 ≪삼국사기≫ 고구려 동명성왕조에서만 승하(升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대한제국 시대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독자적으로 쓰면서 이 용어를 다시 사용하였음. [유사어]훙(薨).


용례
•㉠가을 9월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그때 나이는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삼국사기 권제13, 5장 앞쪽, 고구려 1 동명성왕]
㉡예식원 장례경 이근교가 제의하기를, “…정축년 상왕이 승하하자 동학사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성의를 다해 제사를 지내면서 3년상을 마쳤습니다.” 하였다. ; 禮式院掌禮卿李根敎奏…丁丑 上王昇遐 設壇于東鶴寺 奠饋殫誠 服喪三年 [고종실록 권제46, 15장 앞쪽, 42.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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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승하 [升遐•昇遐]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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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도 승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부식이 유학자이어서 그런지, 구분을 명백히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도저히 삼국사기 동명왕편을 봐서는 왜 천자라고 했는지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혁거세도 마찬가지고.....

남당유고의 추모경과 고구려사략 등등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읽어보면서, 이젠 왜 주몽이 천자이고, 혁거세도 왜 천자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삼국사기 자체가 의도적으로 주몽의 사적을 거의 전재하지 않았고, 유리왕편을 보면 그 심함을 황룡국왕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유리왕이 告黃龍曰 이렇게 했다는 것인데, 고할 告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주몽의 신하인 오이가 황용국왕이라는 남당유고의 기록이 없었다면 누구나 속았을 겁니다.
심당전서에는 알영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戊辰 七年 正月 新羅始祖居西干聞黃龍國王女閼英有德容賢行 納之爲妃 能爲內輔 故時人謂之二聖 (심당전서)
알영이 황룡국 딸이란 말인데, 남당유고의 광명대제기 AD18년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리왕 37년무인{CE18}, 4월, <해술觧術>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매, <제수祭須>가 그 시신을 찾아냈고,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했다.  7월, <오이{黃龍王}>가 죽고, <보득宝得{羊吉子}>의 아들 <모린毛獜>이 보위에 올랐으니, <오이>의 사위였다.

그런데 이해에 삼국유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남해왕조-
천봉 5년 무인(서기 18)에 고구려 비속(고구려를 돕는, 고구려에 속한 나라)인 일곱 나라가 내투했다.
내투했다는 것은 자신들을 신라에 내맡겼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황룡국은 AD18년이후 더이상 남당유고에 등장하지 않는다. 황룡국은 해모수제 시절부터 해모수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그리고 주몽도 그 왕녀를 취해서 비로 삼았고, 나중에는 주몽의 신하인 오이가 황룔국을 BC19-AD18년까지 왕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황룡국은 고구려의 속국중 왕실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다. 그런데, 그 왕녀가 알영있었고, 박혁거세도 도절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며, 환단고기에는 부여제실의 딸 파소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남당유고에 보면 탈해왕이 AD107년에 즉위했고, 삼국사기에 탈해왕이62세때 왕이 되었다고 하니 AD 45년 생이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혁거세 39년에 신라에 왔다고도 하니... 적어도 AD 6년은 박헉거세 원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혁거세를 도절의 아들로 볼 경우 BC5년생을 가정하면 AD8년이 원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AD12년 구려후추가 한나라에 속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AD18년까지는 아마도 고구려 유리왕 계통이 아닌 다른 왕이 다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왕자 여진, 남당유고에는 해술(BC10년 생)이 AD18년에 물에 빠져 죽고, 대무신왕이 즉위하게 된다. 바로 이해에 비속인 7개국이 신라에 내투했고, 왕실과 가장 까까웠던 황룔국도 포함되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에서 신라까지  만주에서 한반도 끝자락 구석이기도 한 경주도 7개국 사람들이 왜 내투해야 했을까! 고구려왕실과 제1의 관계였을 황룡국이 왜 떠나야 했을까!  왜 경주일까!!!!  

AD1년 도절이 경주로 간듯하고, 남당유고에서는 AD3년 협보도 신라로 갔고, AD4년 주몽의 작태자도 신라로 가서 AD8년 왕녀와 결혼하고, AD10년에 태보가 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AD8년에는 신라에 왕이 섰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남당유고의 고구려사략은 신라로 국호가 확정된 AD503년이후에 만든 기록이라 생각되며, 신라사초도 백제가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538년 이후인, 545년의 국사편찬 때 만든 문서로 생각된다.

고구려사략의 경우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벼슬인 대보, 그리고 대조왕이 태보, 태조왕으로 바뀌었고, 신라의 대보조차도 태보로 바뀌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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