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글 쓴 이  
   一道安士 (2016-04-13 15:01:00, Hit : 379, Vote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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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본서기 보는 법 8. 응신이전시대 처리
일본서기의 주축은 396년 9월에 응신 때 웅진에서 구주로 천도하였다가 기내에 자리를 잡고 7왕 81년을 지낸 후, 477년 4월 웅략 때 다시 백제의 응진으로 천도해간 백제 왕력이다. 이후 7세기 중후반 백제왕족들이 다시 왜국으로 이주한 것이 고대 일본사의 근본이다.

이 백제는 고구려의 왕권다툼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바다를 건너와 BC 1세기에 비류에 의해 건국되어 미추홀(목지국)에 자리를 잡고 약 400년을 지냈다. 중국 사료에 진왕으로 나오는 이 백제왕들은 부여에서 온 제도인 共立절차를 거쳐야 본즉위를 했다. 공립이란 마한지역 가장 강한 세력가와 혼인하는 것인데, 그래야 왕을 칭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해야 한다. 칠지도의 왕세자나, 백제왕세자 여휘나, 왜왕세자 흥이 다 그런 연유다. 공립은 즉위와 동시, 혹은 즉위 한 다음 해까지 해야 함이 원칙이다. 왕세자 기간이 길어지면 왕권이 흔들리게 된다.

백제왕(진왕)은 4세기 이후 영산강유역 옹관묘집단인 부여씨로 왕권이 넘어가 여구왕과 여휘왕 등을 배출하였다. 3세기에 백제왕실은 영산강유역과 혼인하였으나, 4세기에는 왕비족이었던 영산강유역이 왕권을 장악함에 백제 진왕은 한강유역 최대세력과 혼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비류왕대 진씨다. 따라서 비류왕부터 삼국사기의 백제는 마한왕의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5세기 백제왕실의 왜국 천도기간에도 계속되었다.

반면에 삼국사기를 남긴 한강유역의 한성백제 왕실은 신라와 혼인하고 백제왕을 칭하였다. 근초고왕이 백제왕을 칭할 시기에는 백제에 왕이 여구왕와 근초고왕의 2명이 있었다. 두 백제의 국경은 지금의 수원-화성 선이었다.(중요하므로 나중에 다시 설명)

일본서기를 쓰면서 응신 앞과 웅략 뒤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우선 응신 앞을 처리하는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백제 왕력 중 어디를 가져올 것인가?

이 문제는 왜국에서 통치를 한 사람만 가져오기로 결정하여 해결하였다. 따라서 응신 때 왔기 때문에 그 앞의 비류왕에서 여휘왕에 이르는 14명 진왕의 이름은 탈락하였다. 일본서기에서만 선택받지 못한 것이 아니고 삼국사기에서도 초대인 비류를 제외하고는 선택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19대 4백년의 말갈왕력이 남음으로써 한국사에 귀중한 기록을 주었다고 본다. 현존 사서들 중 말갈왕력을 기록한 것은 삼국사기뿐이다.

<< 삼국사기의 말갈왕력 >>
1.온조, 2.다루, 3.기루, 4.개루, 5.초고, 6.구수, 7.사반, 8.고이, 9.책계, 10.분서, 11.비류, 12.계, 13.근초고, 14.근구수, 15.침류, 16.진사, 17.아신, 18.전지, 19.구이신(이후 백제에 흡수됨),

[2] 한성백제는 어디부터 쓸 것인가?

고구려 남방지역의 남방말갈족이 온조가 건국한 한강유역의 마한소국을 점령하고 말갈국을 세웠는데, 이 나라가 힘을 키워 4세기 초 비류왕 때부터 진왕의 백제와 혼인관계를 맺고 마한왕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근초고왕 때는 백제란 이름으로 동진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백제왕의 책봉은 못 받았다). 이 나라는 영락 17년(407년)에 백제의 부여씨에게 점령되어 백제에 흡수된다. 일본서기는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공립절차를 거쳐 백제왕을 칭한 근초고왕부터 이 나라를 백제로 기록하기로 하였다. 근초고왕은 2세기 초 3루왕 시대 이후 약 250년만에 다시 백제왕을 칭했다.

[3] 응신왕 앞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390년에 즉위하여, 391년 봄 3월에 한성백제 해씨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공립절차를 밟아 백제왕이 되고, 396년 9월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왜국의 구주로 피신하였다가, 397년 1월에 기내로 동정하여 다시 국가를 건국한 응신부터 쓰기로 하였다. 단 390년 경인년에 즉위한 15대 백제왕 응신의 대수와 간지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4] 응신의 공립(자립위왕, 본즉위)

여기서 잠시 응신의 공립을 보고 간다.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의 백제를 공격한 이유는 그 전 해인 368년에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공립되었기 때문이다. 즉위 직후 기록이 끊긴 근초고왕조가 새로 시작하는 것은 신라와의 접촉기록인데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제본기 近肖古王 21年(366); 春三月, 遣使聘<新羅>.
*백제본기 近肖古王 23年(368); 春三月 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일본학계가 말하기를 기천명 수준의 군대를 동원하던 백제가 근초고왕대 갑자기 3만대군을 동원하고 고구려를 격파하는 것을 들 그 20년 동안에 요서에 있었다가 군대를 이끌로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더 심한 것은 3-4세기에 한강유역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건립되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사라지는데, 석촌동의 대형 무덤을 근초고왕능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고구려식 고분이 사라지며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는데 그 고분을 근초고왕능에 비정한다는 것은 상식에 위배된다. 역사서를 써서 시대를 정리하는 것은 새로운 정복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 3-4세기에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고구려식 돌무덤은 말갈고분군으로서 삼국사기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대형무덤이 고이왕의 능은 될 수 있어도 근초고왕의 능은 될 수 없다.

근초고왕의 왕후가 진씨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삼국사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진씨 왕후의 출현은 영산강유역의 옹관묘가 4세기 중반부터 대형화 된 결과다. 마치 신라의 급리가 변진한 지역의 왕인 왜왕과 혼인하고 그 권세를 발판으로 신라를 통치하듯, 한성백제의 진씨는 진왕과 혼인하고 그 권세를 발판으로 한성백제를 통치하는 것이다. 삼국지는 이들을 신지라 했다.

368년에 근초고왕이 공립되자 백제왕을 칭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본래 부여와 고구려에서 온 이주민들로서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지역들이 일제히 정치적으로 백제에 굴복하고 신민이 되었다. 이것은 본래 부여의 제도로 직계인 고구려에서는 없어졌으나 방계인 백제에서는 아직도 시행되고 있었다. 고구려에게는 자신들의 속민이 백제의 신민이 되는 것은 국가분열에 해당하는 것으로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부여가 재 건국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해인 396년에 고국원왕은 군사를 몰아 내려왔는데 당시 고구려 입장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더 심한 일이 발생하였다. 390년에 응신이 백제왕으로 즉위한 것까지는 백제 내부의 일이나 고구려에게 별 관계가 없는데 그 다음 해인 391년에 왕후를 세우고 공립되니 남방말갈(한성백제), 신라, 임나가 일제히 백제의 신민이 된 것이다. 이 중에 남방말갈과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니 고구려는 참을 수 없다. 그 결과 다음 해인 392년부터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를 몰아, 과거 고국원왕이 그랬던 것처럼, 남으로 진격한다. 삼국사기는 응신의 공립 다음해인 392년부터 시작된 치열한 공방전을 기록하고 있다.

아래가 응신이 391년에 삼한의 지배자가 된 일본서기 기록이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二年, 春三月 庚戌朔壬子, 立仲姬爲皇后. (봄 3월 경술삭 임자(3일)에 중희(仲姬;나카츠히메)10를 황후로 삼았다.)
后生荒田皇女·大鷦鷯天皇·根鳥皇子. 先是, 天皇以皇后姉高城入姬爲妃, 生額田大中彥皇子·大山守皇子·去來眞稚皇子·大原皇女·澇來田皇女. 又妃皇后弟弟姬, 生阿倍皇女·淡路御原皇女·紀之菟野皇女. 次妃和珥臣祖日觸使主之女宮主宅媛, 生菟道稚郎子皇子...

[각주]
10:『古事記』에는 中日賣命으로 나온다. 品陀眞若王의 딸로 어머니는 金田屋野姫命이다. 응신천황과의 사이에서 인덕천황을 낳았다.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서기는 천황은 반드시 황후(후, 비, 부인의 3단계가 있음)를 세우고, 황후의 아버지인 장인의 신분을 기록하지만 여기만 장인의 기록이 없다. 황후의 아버지는 침류왕 아니면 진사왕이다. 그리고 다음 인덕의 왕후인 팔전황녀는 침류왕이나 진사왕의 손녀뻘로서 촌수가 한 단계 아래다. 그러면 인덕은 응신의 아들로 기록된다. 왕자들의 순서는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 왕력에 입적된 순서다.

즉위하면서 마한 최대 세력가의 집안 여인으로 왕후를 세우면 최선이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즉위한 다음 해까지 왕후를 세워야 공립이 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왕권이 흔들리게 된다. 즉 재위 2년째가 공립되지 못한 백제왕에게는 피가 마르는 시기다. 백제 중.후반기를 보면 단명한 왕들이 여럿 나온다.

*계왕 3년, 9월 왕이 죽었다.
*침류왕 2년, 겨울 10월 왕이 죽었다. 아신왕은 <枕流王>之元子
*혜왕 2년, 왕이 죽었다. 시호를 혜라 하였다. <明王>의 第二子
*법왕 2년, 여름 5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법이라 하였다. <惠王>之長子

단명한 경우 재위 원년에 퇴위할 수도 있고, 2년째에 ..., 3년째에 ..., 4년째에 퇴위할 수도 있다. 하지만 2년째나 3년째에 퇴위했다면 공립에 실패하여 퇴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단 침류왕은 그의 아들인 아신왕이 원자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공립에 성공하여 백제왕을 칭했다. 따라서 침류왕이 죽은 원인은 다른 것이다. 혜왕은 명왕의 제2자라는 것을 볼 때 명왕의 아들이 아니고 다른 계열에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법왕이 원자가 아니고 장자인 것을 볼 때 공립에 실패하여  죽은 것이다. 즉 혜왕-법왕 계열은 이전 부여씨와 다른 부여씨 계열인데, 왕이 되는데 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왕후를 세우지 못하여 단명한 계열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후를 세우지 못하여 단명한 것을 본 무왕은 목숨을 걸고 신라 공주를 데려왔을 것이다. 결국 계왕, 혜왕, 법왕이 하필 2년째나 3년째에 죽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들은 진왕제와 일치하여 신뢰성이 높다.

391년 봄 3월, 재위 2년째인 신묘년에 응신이 왕후를 세우고 삼한의 지배자가 된 역사적 사건을 당시를 목격하였던 고구려가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비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왜이<신묘년(391)>내도해파·백잔·(임)(나)·신라·이위신민

신묘년 웅진에는 삼한 각지에서 온 축하사절단이 모인 가운데 응신의 화려한 결혼식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는 사자들이 삼한 각지로 달려가 응신이 삼한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공립을, 알렸을 것이다. 저 빈칸에 임나가 아니라 가야가 들어간다고 하는 사람은 가야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가야제국은 임나 밖에 없었다. 가야제국이 제건국되는 것은 407년(영락 17년)부터다. 광ㄱ토왕비무느이 영락 17년 전쟁상태는 왜(잔국)인데 이를 후연이라고 하는 사람은 비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문은 물론이고 다른 사료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신묘년조의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있다. 응신의 백제왕이 되는데 대해여 가장 기분 나뿐 사람이 진사왕이다. 390년(진사왕 6년)까지는 고구려에 대하여 강력하게 막아 싸우다 이 해(391년)가 되자 막을 생각을 않고, 대신 궁궐에 인공 못과 산을 만들어 진기한 짐승과 새나 기르고, 여기저기 한가하게 사냥이나 다니며, 고구려왕이 전술에 능하다는 핑계로 싸우려 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392년 10월 백제와의 국경인 남쪽의 구원에 협상하러 나간다. 진사왕의 협상카드는 그의 군사력이다. '내가 고구려를 막아주지 않느냐? 나를 백제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을테니 너희가 어디 한 번 번 막아 보아라.' 대충 이런 이야기다. 진사왕조 서문의 총명하고 어질고 지략이 많았다는 구절이 이해가 된다. 다음이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다.

*백제본기 辰斯王 七年(391, 신묘년),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夏四月, <靺鞨>攻陷北鄙<赤峴城>.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협상은 깨지고 진사왕은 죽었다. 하지만 진사왕 말대로 응신도 고구려군을 막지 못하여 396년에 패하고 왜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응신은 403년 2월에 웅습을 정벌하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중요하므로 나중에 상세히 설명) 진사왕이나 응신이나 그 끝은 비극이었다.

신묘년조 사건에 대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와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하였을 뿐,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저 유명한 신묘년조 사건이 꽃피고 새가 울던 그해 음력 봄 3월에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일본서기 이해의 첫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고대사 전공한다는 모 대학 교수가 쓴 삼국사기 번역본을 보니 진사왕이 죽은 진사왕 8년(392년)은 광개토왕비문의 백제가 왜국에게 패했다는 신묘년(391년)조에 맞추어야 한다고 하여 진사왕조 연도를 1년씩 변경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삼국사기를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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