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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글 쓴 이  
   돌마루 (2016-03-29 23:59:53, Hit : 696, Vote : 25)
홈페이지  
   http://stoneplt@daum.net
제     목  
   왜 이러한 지명의 끝에는 ‘村’자를 붙이지 않는가? ― 포항 중성리비의 ‘珍伐壹昔’과 울진 봉평비의 ‘居伐牟羅’
이 두 명칭은 한국고대지명에서 아주 특이한 구성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地理지 등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명 표기방법이 아닐까 한다. 이 두 신라비가 출현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지명 구성형태나 표기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두 지명에 계속 마음이 쏠리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구성형태를 지닌 지명이 생겼고, 왜 옛 사람들은 이러한 표기방법을 사용한 걸까?

우리가 울진 봉평비 전문에서 무려 4번이나 ‘居伐牟羅’라는 단일 명칭형태를 보았고, 그럼으로 인해서 이 명칭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단일 지명으로 이해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포항 중성리비의 ‘珍伐壹昔’을 만났다면 적어도 필자는 이 珍伐壹昔이란 명칭을 오해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居伐牟羅에 대해서도 아무런 견해를 형성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성리비의 珍伐壹昔이란 명칭이 출현함으로써 그 모든 망설임이 그친 것 같다.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것이다. 적어도 5~6세기에(아마도 그 이전부터) 실제로 이러한 지명형태가 居伐牟羅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珍伐壹昔이란 명칭을 계속 오해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필자는 목도한다. 2009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출판한 도록 『포항 중성리신라비』에서 처음 이 珍伐壹昔의 이 ‘昔’자를 바로 그 뒤에 나오는 ‘云(운)’자와 연결하여(‘昔云’) ‘옛날에 ~라고 이르다’라고 이 도록의 해설자들이 해석하였다(29쪽). 그런데 이번에도, 2012년 출판사 ‘주류성’에서 나온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서 어느 논문의 저자가 바로 이 珍伐壹昔을 “‘지명(珍伐)-인명(壹昔)’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고 주창하니까(220~221쪽), 이 논문과 더불어 기타 논문의 발표가 있었던 후에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도 사회자와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어버린다.

“…… 또한 논의가 많이 됐던 게 ‘진벌일석(珍伐壹昔)’인데 오늘은 대개 ‘진벌’을 지명, ‘일석’을 인명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럼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서는 쟁의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340쪽)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珍伐壹昔이 나오는 포항 중성리비의 문단은 아래와 같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刊  『포항 중성리신라비』에서)

제6행 ……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沙」
  7행 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 蘇豆古利村仇鄒列支」
  8행 干支沸竹休壹金知那音支村卜岳干支走斤壹金知」
  9행  珍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奪尒今更還」
10행  牟旦伐喙作民……

처음 2009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도록은 ‘昔’자를 시간부사 ‘옛날에’로 해석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명백히 지명의 형태를 갖춘 명칭 ‘진벌-(珍伐-)’를 떼어놓고 보니, 이 ‘-일석(-壹昔)’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뒤에 “今更還~”이란 구절의 ‘今[지금]’자가 나오니까 그것과 호응관계로 보아서 이 ‘昔’자를 ‘옛날에’라는 시간부사로 처리한 듯하다(~昔云~今更還~). 그러나 이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 珍伐壹昔에서 외톨로 남게 되는 이 ‘壹’자가 무슨 용도에 쓰인 한자인지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2012년에는 다른 처리 방법이 모색된 듯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명백히 지명의 형태를 갖춘 명칭 ‘진벌-(珍伐-)’를 떼어놓고 보니까, 결국 이 ‘-일석(-壹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것을 ‘진벌’에 거주하는 어떤 일개인의 명칭으로 돌려서 ‘인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견 이러한 설명은, 이 ‘일석(壹昔)’ 바로 뒤에 안성맞춤으로 ‘云(운)’자가 뒤따르고 있으니 얼마나 앞뒤로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는 해석인가! ‘진벌에 사는 일석이란 사람이 ~라고 이르다(珍伐壹昔云~).’ 그러나 이 판결(혹은 결정)공고문에서 이 부분(“珍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奪尒”)은 아주 중요한 증언으로 들어가 있는데, 중요하게 채택된 이러한 증언의 증인이 아무런 사회적 지위(干支, 村主, 使人 등의) 표시도 없이 단지 珍伐의 여러 사람 중 단순한 일개인의 인명 표시라는 점이 우리를 당황케 하고 있다.  

고대지명에 쓰인 漢字 한 자 한 자에 관심을 집중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필자와 같은 지명연구자들에게는 이 ‘-壹昔’도 ‘珍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국사기>> ‘地理志’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建治沿革’ 등에서 만나던 고대지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壹昔’의 ‘壹(一)’자와 ‘昔’자는 각각 고대지명에서 一善郡(경북 구미시)과 昔達縣(강원 춘천) 및 昔里火縣(경북 상주) 등에 쓰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서울과 그 부근, 즉 오늘날 수도권에서도 지명으로서 이  ‘壹(一)’자가 여전히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一山區)'의 “一山”이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어느 정도 피력했다시피 필자에게는 珍伐壹昔에서 ‘-일석(-壹昔)’을 인명으로 보지 않는 더 큰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珍伐壹昔이란 명칭 형태가 울진 봉평비의 居伐牟羅와 너무나 똑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울진 봉평비의 거벌모라를 단일 지명형태로 본다면 너무나 똑같은 형태를 지닌 이 중성리비의 진벌일석도 단일 지명형태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珍伐壹昔에서 ‘-일석(-壹昔)’만을 떼어서 ‘인명’으로 해석하는 愚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봉평비 居伐牟羅의 ‘-牟羅’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이 『梁書』 新羅傳(636년 완성)의 비교적 짧은 구절을 상기하는 것 같다. 즉 “신라 습속에서는 城을 가리켜 健牟羅라고 이른다(其俗呼城曰健牟羅).” 이 健牟羅에서 ‘建(건)-’을 형용사 ‘크다’의 관형격인 ‘큰’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큰 牟羅’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牟羅’를 다름 아닌 “城이나 防衛의 要塞로 쓰이는 聚落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한다.(남풍현, 「居伐牟羅와 耽牟羅」, 『탐라문화』 23호(2003년)에 수록되어 있음)

비록 6~7세기의 “신라 습속[其俗]”에서는 牟羅가 그러한 뜻으로 일컬어졌을지라도, 몇 세기나 앞선 시기, 즉 『三國志』위서동이전(280년)이나 『광개토대왕비』(414년)에는 이 牟羅의 ‘牟’자와 ‘羅’자는 각각 다른 소국명이나 지명에서 다른 한자들과 조합한 형태에 끼어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사례들을 우선 모아보았다.

‘牟’자 사례      
『위서동이전』에서: 牟盧卑國, 牟水國, 憂休牟涿國, 咨離牟盧國, 蓋牟城.
『광개토대왕비』에서: 古牟婁城, 句牟客頭, 勾牟城, 牟婁城.

‘羅’자 사례
『위서동이전』에서: 없음
『광개토대왕비』에서: 古模耶羅城, 莫□羅城, 耶羅城, 任那加羅, 新羅(城).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牟’자는 이미 3세기의 마한 54국명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고,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여러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羅’자는 위서동이전의 이른바 삼한 小國名 시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광개토대왕비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양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소국명과 지명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牟’자와 ‘羅’자는 이 두 한자의 다양한 조합에 구성성분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동일시기에 계발되거나 도입된 한자가 아니며, 더군다나 ‘牟羅(‘牟’ +‘羅’)’라는 조합에만 사용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함께 계발되거나 도입된 한자가 더욱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이 두 한자는 각각 개별적으로 다른 漢字와 조합해서 삼한의 소국명이 되거나 그 이후 어느 지역의 지명으로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 두 한자만의 조합, 즉 ‘牟羅(‘牟’ +‘羅’)’도 그 가운데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조합, 즉 ‘牟羅(‘牟’ +‘羅’)’라는 명칭이 가야 혹은 “신라”의 영역에서 유독 많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지역의 지명 형성(생성)조건이 이 두 한자의 조합으로 표현될 경우에 많이 해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이러한 지명 형성(생성)조건 아래에서, 고구려의 ○○‘忽’(○‘忽’도 포함함. 이하도 똑같음), 마한의 ○○‘夫里’, 가야의 ○○‘加羅’ 혹은 ○○‘伽耶’ 그리고 신라의 ○○‘伐’ 등의 지명형태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이렇게 지명을 짓는 빈도가 점차 많아짐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 지명을 새롭게 짓는 경향도 그러한 조음(調音) 쪽으로, 즉 ○○‘牟羅’라는 식의 조음 쪽으로 계속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대지명 후치(後置) 조음의 일치가 처음에는 이러한 지역적 내지 문화적 동류의식을 표현하는데에서 비롯되어서 결국은 그 시대의 정치적 동향에 대한 비슷한 대응을 이끈 듯하다.  

이에 더하여 우리가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고대세계에서는 어느 집단의 “聚落”에서도 거의 필수적으로 크든 작든 간에 혹은 일상적인 주거지역에서 멀든 가깝든 간에 일정한 “防衛”시설을 갖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대부분의 지명들이 ○○‘城’ 형태로 표기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어느 특정지역의 언어적인 “습속”에서 방위시설인 ‘-城’과 그곳의 지명인 ‘-牟羅’를 혼동하여 부른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 두 가지 명칭의 본래적인(“어원적인”) 의미마저도 같았다고 볼 이유는 되지 않는다.

요컨대 牟羅의 ‘牟’자와 ‘羅’자는 고대지명에서 각각 개별적인 의미나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것의 조합 즉 ‘牟羅(‘牟’ +‘羅’)’도 한국고대지명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二元的인 지명 즉 <a+b>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그 근본적인 의미도 <‘牟’자의 의미 + ‘羅’자의 의미>일 뿐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러한 일이 지금으로부터 워낙 먼 시대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 두 지명 한자어가 각각 무슨 의미로 쓰이었는지를 한국고대지명 연구가들이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우리의 문제 珍伐壹昔과 居伐牟羅로 돌아가자. 사실 표면적으로 보아도 이 두 지명의 구성형태는 똑 같다. 즉 ‘○伐’(혹은 ‘○○伐’)이라는 비교적 큰 지역단위를 일컫는 신라 영역의 지명 밑에, 고대지명에서 빈번히 혹은 드물게 쓰이는 두 개의 漢字가 나란히 병렬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를 기호화하면 대략 ‘[○伐]-<a +b>’ 형태라 할 수 있다. 물론 굳이 여기에서 ‘거벌’이나 ‘진벌’까지도 구성성분대로 한 자씩 나누자면 ‘[居 +伐]’과 ‘[珍 +伐]’이 될 것이나, 이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신라 영역에서 많이 보이는 ‘○伐’ 형태의 지명이라고 동의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하여 여기서는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표기한다.  
                  [居伐] - <牟 +羅>
                  [珍伐] - <壹 +昔>

이렇게 분석해보면 이 두 지명은 각각 똑같은 형태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교적 큰 지역단위를 일컫는 ‘○伐’ 형태를 앞에 세우고, 그 다음에는 두 개의 고대지명표기 漢字을 나란히 붙인 <a +b> 형태를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를 그대로 따른다면 이 두 지명은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풀이될 것이다. 즉 거벌모라는 ‘거벌의 모라’, 즉 ‘거벌에 살고 있는 모라’ 집단이 될 것이며 진벌일석은 ‘진벌의 일석’, 즉 ‘진벌에 살고 있는 일석’ 집단이 될 것이다.

바로 위에서 방금 필자는 부득이하게 ‘집단’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재 그 지역에 엄연히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비석이 설 당시에도 그곳에는 몇몇 혹은 여러 가구가 모여 있는 마을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것을 가리켜 ‘마을[村]’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될 것이로되 왜 필자는 하필 이 ‘집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 두 비문에서 공히 이 두 비문의 작성자가 이 두 명칭, 즉 居伐牟羅와 珍伐壹昔의 끝에 각각 이 ‘村’자를 덧붙이기를 극구 회피(혹은 거부)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울진 봉평비에서 居伐牟羅를 여타 다른 촌락 ‘집단’의 표기와 대조해보면 너무나 잘 드러난다.

               4행    居伐牟羅 男弥只 本是奴人
            6~7행    居伐牟羅 道使 夲洗 小舍帝智
               7행    居伐牟羅 尼牟利 一伐
              10행    居伐牟羅 異知巴 下干支          

위와 같이 봉평비에서 이 居伐牟羅가 무려 4번이나 나타나지만 한 번도 그 끝에 이 ‘村’자를 붙이지 않았다. 이 봉평비의 제4행에서 처음 居伐牟羅와 나란히 나타난 ‘男弥只’란 명칭은 제8행에서 다시 한 번 더 나타나는데, 이때에는 이 명칭의 끝에 ‘村’자를 엄연히 붙여서 ‘男弥只村’이란 형태로 나타남(“…男弥只村 使人…”)으로써 끝내 한 번도 이 ‘村’자를 붙이지 못한 居伐牟羅라는 명칭의 표기방법과는 아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 봉평비나 냉수리비에 나오는 여타 촌락 명칭들, 즉 ‘阿大兮村’ 및 ‘葛尸条村’과 ‘珍而麻村’이란 명칭과도 대조를 이루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것은 최근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목간에서 보이는 지명 표기방법과도 대조를 이룬다. 아래에 열거한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이 목간에서도 ‘○伐’ 혹은 ‘○○伐’ 밑에 조금 띄어서 작은 글자로 혹은 같은 크기의 글자로 ‘○○○村’을 붙일 때에도 분명하게 ‘村’자를 붙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신라분실 특별전시에서)

     仇利伐 上彡者村 乞利 (구리벌 상삼자촌에 거주하는 걸리)
     仇伐 干好△村 卑尸 稗石 (구벌 간호△촌에 거주하는 비시의 피 한 석)
     (* ‘△’표시는 미해독자를 나타낸다)

이 사례는 비교적 넓은 지역단위인 ‘○伐’ 혹은 ‘○○伐’에 있는 여러 마을 중의 특정 ‘○○○村’을 나타내는 표기라고 보이며, 따라서 상위 명칭,‘○伐’ 혹은 ‘○○伐’은 단순히 이러한 마을이 속해 있는 보다 큰 지역단위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명 표기의 내용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풀이하면 되겠다. 즉 비교적 넓은 仇利伐의 어딘가에 있는 上彡者村, 그리고 비교적 넓은 仇伐의 어딘가에 있는 干好△村이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에 상위 명칭으로 세워진 ‘○伐’ 혹은 ‘○○伐’은 단순히 특정 마을(위의 사례에서는 ‘上彡者村’과 ‘干好△村’)의 지리적 歸屬所在地 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그 시대에 누군가가 어떤 일로(가령, 이 목간이 붙어 있던 물건 꾸러미의 물건에서 어떤 하자가 발견되어 그 책임을 따지려고 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렇게 쓰이어진 목간을 들고 ‘○○○村’을 찾아간다면, 무엇보다 먼저 앞에 상위 명칭으로 세워진 ‘○伐’ 혹은 ‘○○伐’을 찾아가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 그 명칭이 차지하는 범위 안에서 ‘○○○村’이라고 이름을 대어야 그 마을[村]을 찾을 수 있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울진 봉평비의 居伐牟羅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 당시(524년)까지 어떤 사정 때문에 울진 봉평비의 居伐牟羅라는 명칭 끝에는 ‘村’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불문율이 이번 포항 중성리비 珍伐壹昔의 표기에서도 다시 한 번 더 확인되고 있다. 즉 이 비문에서도 珍伐壹昔은 이 비가 발견된 곳(흥해읍 중리)의 부근에 거주하던 어느 ‘집단’의 명칭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문에 함께 출현하는 ‘蘇豆古利村’ 및 ‘那音支村’의 표기방법과 다르게 이 珍伐壹昔이란 명칭의 끝에는 ‘村’자를 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불문율은 도대체 무슨 사정 때문일까?


소벌가리 (2016-03-30 00:44:15)   
1198번의 제 그림이 쓸모 없을까요?
돌마루 (2016-03-30 04:10:08)   
저는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저도 막연하게나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제가 지명에 관하여 엉뚱한 이야기를 조금 많이 하는 편이니까 결국은 지명에 관한 소벌가리님의 견해와 부딪히는 부분이 필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 있는 저의 글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의해주시면 저도 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
서석 (2016-03-30 08:08:42)   
참고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서기 계체기 기사(6세기 초중반)에 신라지명으로 여러 牟羅가 등장합니다. 구타모라,포나모라,등리지모라,모자지모라,등. 그런데 한결같이 城이름으로만 사용됩니다.( --牟羅城 등)서부경남지역으로 추정되는 지명입니다.村은 후대 행정구역명으로 승격되지만 초기에는 자연부락도 村으로 불렀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城과 村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을까요? 거벌모라는 城이 분명하지요.

珍伐壹昔은 학자들도 골치아픈가 봅니다. 구구각색의 해석이 나오는데도 대충 얼버무리는 모양새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남겨두는게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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