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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렁'은 서로 상생하며 모두를 위한다라는 제주도 말입니다



글 쓴 이  
   크크리 (2017-04-26 01:14:02, Hit : 94, Vote : 20)
제     목  
   낙랑은 3곳, 신라의 건국 연도
대륙의 낙랑군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은  경상북도 위쪽과 와 강원도 남부를 차지했던 조문국이 있었고, 대동강에 위치한 낙랑국이 있었다.  이들을 낙랑, 또는 국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니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AD37년 기록을 보면 분명히 이때의 낙랑은 낙랑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 대륙의 낙랑과 조문국을 낙랑이라고 표현해 놓고, 남해왕 원년에는 낙랑병을 기록해 놓아 또 헷갈리게 했으니, 박혁거세 당시에 신라를 침범했던 낙랑은 조문국이며, 바로 진한의 맹주였다.  남해왕 원년에는  차마 6부의 병사들이
[실제는 6국의 병사] 금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했다고 쓰지 못하고 낙랑병으로 대체하여 표기해 놓은 것이다.   AD18년에 신라에 온  고구려의 비속7국이 박혁거세를 천자로 추대했으며, 국호는 계림이라 하였으나 AD42년에는 6국이 반란을 일으켜 박혁거세와 알영을 처형하고, 금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남해왕은 고(孤)라고 하였으니 소국의 왕을 의미한다.
6국의 반란으로 인해 신라는 천자국에서 소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탈해가 7국의 왕들에게 추대받아 태보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며, 남해왕은 귀신에게 제사만 지내는 무당과 같은 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남해왕이 아닌 남해차차웅이 된 것이다.
무당의 풍습은 여인국에서 즐겨하던 것으로,  고구려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여인국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경주 자체가 여인국의 도읍지었기 때문이다.  여인국은  초대 여왕 이름인 사라 즉 사라국으로  6세기까지  불리기도 했다.  여인국의 여왕과 이씨, 박씨, 석씨, 김씨는 혈연이 맺어져, 후대에 신라의 건국이 아닌 여인국의 건국인 BC57년을  신라사람들  자신의 건국 연도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마치 고구려가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건국한 BC232년을 자신들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을 따라했다고도 생각된다.

          고구려 [BC232-AD668, 900년],  신라 [BC57-AD935, 992년]
실제    고구려 [BC37 -AD668, 705년],  신라 [AD14-AD935, 922년]



AD36년에 타산성을 점령한 것은 대륙의 낙랑군이고,  그 당시 요동에 머물던 김씨 세력을 공격한 것이다.
AD37년에 고구려에 망한 것은 최리의 낙랑국이다.  그 나라 백성 5천명이 와서 투항하였고,  6분에 나누어 살게  하였는데,
실상은  같은 낙랑 출신인 조문국으로 내투한 것이다.  신라의 6부에 산 것이 아니라 조문국에 나뉘어 산 것이다.
AD40년에 침범한 불내, 화려현은 대륙의 낙랑군으로 요동의 김씨 세력을 공격한 것이다.




아래는 이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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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원년(AD42 추정)의 낙랑병사는 바로 신라의 6부병사이다.
몽골의  쿠릴타이처럼 6부촌장의 회의를 통해  혁거세와 알영을 죽이고,
이서국을 멸망시켰으며, 왕성인 금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한 것이다.


-유리이사금 때에는 대륙에 있는 낙랑이 등장한다.
[후대에 신라왕이 낙랑군왕이라 칭해진 근거가 아닐까]
AD36년 타산성을 점령한 것은 대륙의 낙랑군이다
AD37년에 고구려에 망한 것은 최리의 낙랑국
AD40년에 침범한  불내, 화려현은 대륙의 낙랑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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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기원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곧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측근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네이버 지식백과] 남해 차차웅 [南解次次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11년(서기 14),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노략질하기에, 6부의 날랜 병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여기고, 금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하며 퇴각하다가 알천(閼川)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의 병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吐含山)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의 무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해 차차웅 [南解次次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31년(서기 54) 봄 2월, 자미(紫微)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三十一年 春二月 星孛于紫宮

33년(서기 56)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4년(서기 57) 가을 9월, 임금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리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사릉원(蛇陵園)에 장사 지냈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 이사금 [儒理尼師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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