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렁'은 서로 상생하며 모두를 위한다라는 제주도 말입니다



글 쓴 이  
   크크리 (2017-03-26 18:15:50, Hit : 40, Vote : 7)
제     목  
   연개소문의 아버지 건황태자는 김용수이다
태자는 임금의 아들인데, 진평왕에게는 딸만 있었다.
김용수,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다.

<진지왕은 삼국유사에 고본에 579년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니
576년에 즉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즉위한 해에 퇴위된 것이다.
576년부터 태자로 나라를 다스렸다가 679년에 즉위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7일동안 도화녀 집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왕이 7일동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천자이므로 7일을 7왕과 함께로 해석해야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579년에 김용수가 건황태자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김춘추가 603년 생이고 김용춘의 아들이며,  
연개소문도 603년생인데,  곧 김용수의 아들인 것이다.
김용수는 진평왕과 가까웠던 삼국유사의 비형랑이라 생각된다.

화랑세기에는 김용수와 김용춘이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찰주본기에는 용수로
삼국유사에는 용춘[또는 용수]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다.

용춘공은 금륜왕(진지왕)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지도태후이시며 용수갈문왕의 아우이다.
금륜왕이 황란하여 폐위된 뒤 궁에 유폐되어 있다가 3년만에 죽었는데
용춘공은 아직 어렸기 떄문에 그 (금륜왕)의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새로운 왕(진평왕)을 섬겼는데 용춘공은 새 왕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이 때문에 왕께서 불쌍히 여기시더니 총애함이 더하였다.
용수전군이 죽을때 (천명)부인과 아들(김춘추)을 용춘공에게 부탁하였으니
그 아들이 곧 태종으로서 우리 왕이시다.  <화랑세기>

=> 곧 <용춘전군이 일찍 죽으면서 용수공에게 천명부인과 아들 김춘추를  부탁하였다>가 진실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용춘공의 기록중 대부분이 실상은 용수공의 기록인 것을 용춘으로 고쳐놓은 것이다.
김춘추가 추봉한 문흥대왕은 곧 김용춘인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용수공이고, 그렇기에 김법민이 김춘추의 아들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26년에 김법민이 태어났는데,
일본의 문무천황이다. 그런데 이 문무천황의 아버지가 천무천황이고, 천무천황의 맏아들이라는 것이다.
천무천황은 연개소문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곧 연개소문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김춘추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를 태자로 세웠을리는 없는 셈이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신라가 응하여 3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선덕여왕
645년 여름 5월, 당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내어 도왔는데,
백제가 그 빈틈을 타고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그 이후 고구려와의 관계 기록이 9년간 없는 것이다.
당나라에 승리를 거둔 고구려에 당시 신라의 처지가 생략된 것이다.
선덕여왕의 기사의 마지막부분에 선덕여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 일부분이다.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易經)』에서는 “암퇘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선덕왕 [善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김용수가 643년 황룡사9층탑 건립에 감군으로 참여하였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같은 연유로 김법민이 태자가 되었고. 신라왕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크크리 (2017-03-26 18:53:31)   
김춘추가 고구려에 잡혀 있을 때, 왕의 총신 선도해가 김춘추가 달아날수 있는 지혜를 주었는데, 신라에 고구려 첩자들도 있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선도해는 왕의 총신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휘하일 뿐이고, 김춘추가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지도 않았다고 생각된다, 뇌물량이 너무 많을 뿐더라... 뇌물을 들고 갔다면, 고구려왕에게 먼저 바쳐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풀어준 것이고, 신라 김유신이 1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로 들어 갔다고 신라본기에 쓰여있지만, 열전에는 3천을 거느리고 출정할 날짜를 선덕여왕에게 청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이 3천을 거느리고 어찌 고구려에 들어갈수 있었겠는가?
크크리 (2017-03-27 01:33:50)   
진지왕은 676년에 즉위하지만, 거칠부에게 실권을 빼앗긴 것으로 보아 즉위하였지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채 679년에 죽었다고 생각된다, 화랑세기에도 사도태후가 태자를 왕위에 올려놓고는 몸소 제위에 있으면서 신왕을 통제하고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여론을 무마했다고 하니, 그는 즉위하자마자 퇴위된 것이나 다름없다. 용춘을 578년생이며 647년 70세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용수라 생각된다. 용수가 재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생각된다. 문흥대왕은 용춘일수밖에 없으면, 629년 낭비성에 출정한 용춘은 용수일수밖에 없다.
크크리 (2017-03-27 05:58:58)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일본 천무천황과 일본 문무왕이 연개소문과 문무왕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결국 일본 고대사에서 이들이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천무천황과 문무왕의 업적이 일본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해준 것이다.
크크리 (2017-03-27 08:33:38)   
문무왕이 일본으로 떠난뒤에 일어난 김흠돌의 난에 고위층들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문무왕이 연개소문의 아들이라는 사실들을 알게 된 김씨 고위층들이 반란을 계획했다고 생각된다. 연개소문과 보희의 아들인 문무왕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고시, 대진, 초벽 등이 천무천황에 반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시해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둔갑을 하는 사람을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되며, 고시 등등의 나이로는 가당치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인터넷에 천무와 지통의 합장묘를 도굴한 결과 천무의 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는데, 위키백과를 보면 천무의 관에 유골이 있었다고 그 당시의 기록이 있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D%B4%EB%AC%B4_%EC%B2%9C%ED%99%A9
위키백과에 천무천황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여 이곳에 링크를 시킨다.
크크리 (2017-04-09 01:52:54)   
김인문의 묘비에 祖文興大王知機其神多 이란 구절이 있는데, 화랑세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것이니... 여기서 문흥대왕은 용춘을 추봉한 것이고, 만약에 용수를 추봉한 것이라면 武자로 시작되었을 겁니다. 603년8월 진평왕이 북한산성을 구원했을때 용춘이 참여했다고 하였고(화랑세기 13세 용춘공), 629년에 낭비성에도 참여하였으니(신라본기 진평왕), 문흥대왕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용수를 용춘으로 둔갑하여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용춘이 일찍 죽었고, 용수가 622년 내성 사신이 되었고, 629년 대장군으로 낭비성에 참전하였고, 643년 황룡사9층탑 건립에도 참여했던 것입니다. 김인문의 묘비에 조부 문흥대왕이 신이함이 많아서 기미를 알았다고 하였는데, 유키백과의 천무천황을 보면 천무천황도 비숫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즉 김인문에게 할아버지 역할을 한 사람은 용수이며, 용수는 딸들만 있었고, 동생의 아들인 김춘추만이 아들로 있었던 것입니다.
화랑세기에서 천명부인이 용춘을 좋아했다고 하나, 사실은 용수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용춘이 일찍 죽었고, 천명부인이 용수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김춘추와 함께 용수에게 갔던 것입니다. 화랑세기의 13세 용춘공의 실체는 용수공이라고 봐야 하는 겁니다.

(13세 용춘공)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52575&cid=49232&categoryId=49232&expCategoryId=49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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