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렁'은 서로 상생하며 모두를 위한다라는 제주도 말입니다



글 쓴 이  
   크크리 (2017-02-11 23:21:56, Hit : 72, Vote : 15)
제     목  
   온조의 고구려왕 즉위
해명태자가 죽은 뒤에 무휼이 등장하는데, 무휼은 바로 온조왕인 것이다.

AD 9년 가을부터 무휼로 등장함

AD10년 북부여와의 전쟁이 감도는 기사가 등장하고, 두곡에 이궁을 세우는데

              이궁의 주인은 바로 온조왕이다.

AD12년  유리왕이 한나라군에 의해 피살됨.  해술 즉위

AD13년  11월 온조왕이 학반령에서 부여군 격파

AD14년 정월  태자가 되어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음. 즉 후계자가 되었고, 대보에도 오른 것이다.

=> 이로인해  경주 여인왕국(혹은 여국, 적녀국, 여인국, 사라국)에 와있던 유리왕의 아들 도절이 여인왕국의 선도성모여왕과의  사이에 낳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건국함.




AD18년 4월 해술왕이 익사하여 죽자, 7월 온조왕이 두곡으로 행차하였고, 남당유고에는 7월에 황룡국왕이 죽은 것으로 보아,  이

때 고구려에서 유리왕 옹립에 참여했던 7국(황룡국 포함)이 신라에 내투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고구려비속7국이

내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월 두곡에서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곧 온조가 두곡에서 왕위에 올랐음을 역으로 기술한 것이다.  




온조는 유리왕으로부터  3년동안 군사와 식량을 지원받아 AD8년 마한을 병합했으며,  지원받은 군사가 나중에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온조가 18-28까지 고구려왕으로 재위한 다음에는 다시 고구려 주몽의 후손에게 왕

위가 돌아가도록 기여하였기 때문에, 훗날 기록에서 온조를 주몽의 친아들로 기록하며, 우호적인 기록만 남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온조가 고구려의 왕위를 찬탈한 것은 아니며,  유리왕의 정신상태와 해술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고구려 유리왕의 친위세력인 고구려의 비속7국이 내전을 벌이지 않고,

신라에 내투하였던 것이다.  유리왕이나 남당유고의 본기신편열전 해술태자 기록을 보면 비정상적인 왕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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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리왕 28년(서기 9) 가을

가을 8월, 부여 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임금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그대의 선왕 동명왕(東明王)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이르도록 유인하는 것은 나라의 모든 사람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대개 나라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임금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우리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임금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당하다.’고 하고, 여러 군신들과 상의하여 부여왕에게 회답하였다.
“과인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이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부여왕이 그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그 뜻을 두루 물으니 한 노파가 대답했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태로운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노파의 뜻은 곧 왕이 자신에게 온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는 위기를 만들지 말고 안전한 것을 택하여 스스로 자기 나라를 먼저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効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徧問群下 有一老嫗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16. 유리왕 29년(서기 10)

29년(서기 10) 여름 6월, 모천(矛川)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를 지어 싸웠다.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을 보고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검은 색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北扶餘)가 파멸할 징조이다.”
가을 7월, 두곡(豆谷)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17. 유리왕 31년(서기 12)

31년(서기 12) 한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의 주(州)ㆍ군(郡)에서는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ㆍ군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서울로 보냈다.[『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18. 유리왕 32년(서기 13)

32년(서기 13)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19. 유리왕 33년(서기 14)

33년(서기 14)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菟郡]

20. 유리왕 37년(서기 18)

37년(서기 18) 여름 4월,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알렸다.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임금이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두곡의 이궁에서 돌아가셨다.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 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瑠璃明王


각주
1.1        유리명왕(瑠璃明王): 유리왕(琉璃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孺留)•주류(朱留) 또는 누리(累利)라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왕 [琉璃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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