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왜(倭) 기사의 체계적 이해

- '倭人'과 '倭國' 유형 기사의 차별성을 중심으로 -

A Systematic Understanding of Wae(倭) in Sillabongi(新羅本紀) of Samguksagi(三國史記)

박연하 (Park, Yeonha)

요약

『삼국사기』 倭 기사 가운데, 7세기 이후의 倭는 일본열도의 倭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이전의 倭 기사는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대다수 倭 기사가 실려 있는 「신라본기」에는 倭人, 倭賊, 倭國, 倭兵, 倭國王, 倭王, 倭女王 등 다양한 표기로 약 500년에 걸쳐 꾸준히 실려 있어 선입견 없는 연구가 절실하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규칙성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난립한 기사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과도 맞물리면서 그 체계적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이 논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한 시도이다.
먼저, 필자는 기사 속 倭의 다양한 표기 방식이 최초 기록자에 의해 임의로 무의미하게 선택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신라본기」 倭 기사를 ‘國’을 전제로 하는 倭國, 倭兵, 倭國王, 倭王, 倭女王으로 표기된 ‘倭國 기사’와 그 나머지 倭人, 倭賊으로 표기된 ‘倭人 기사’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보았다. 그 다음에는 기사에 나오는 倭가 전부 일본열도의 倭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견제하기 위해 『후한서』 기록 등과 대조하여 비미호 기사 등 일본열도의 倭와 연계할 근거가 있는 기사들만을 제외하여 보았다. 그 결과 이 두 단계 작업 후 남은 기사들에 나오는 倭의 표기 방식은 뜻밖에도 불규칙하지 않고 약 500년에 걸쳐 뚜렷하게 다음 세 단계로 구분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1) 기원 전후부터 3세기 초까지는 예외없이 倭人으로 표기되는데, 이는 가야 기사가 나오는 기간과 일치한다.
   (2) 가야 기사가 사라지는 3세기 전반 이후 서기 400년 무렵까지는 倭人 대신 倭國이라는 표기가 급증한다.
   (3) 서기 400년 무렵부터는 倭人, 倭國이라는 표기가 교차되다가 5세기 중엽부터는 다시 倭人으로 계속 표기된다.
이 결과는 다양한 倭 표기들이 임의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차별성을 전제로 선택되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 다른 시점도 아니고 서기 200년과 400년 무렵을 경계로 하여 倭人-倭國-倭人 순서로 표기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초기 김해가야의 단절과 광개토대왕의 원정이라는 양대 사건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므로 여기 나오는 倭는 한반도 동남부에 있었던 실체이지, 일본열도의 倭를 나타낼 가능성은 없다고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1)단계의 倭人은 非신라 세력으로서 가야와 병존했던 낙동강 동쪽과 남해안의 포상팔국 세력으로, (2)단계의 倭國은 김해가야 소멸 후 낙동강 하류 양안에 포상팔국 주도로 성립된 강력한 고대국가로, (3)단계의 倭人은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倭國이 타도되고 좌지왕을 시조로 하는 후기 김해가야가 성립된 후 낙동강 동안에 잔존한 포상팔국 세력으로 보는 것이 최선의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1), (3) 단계의 倭人을 임나 가라로, (2) 단계의 倭國을 광개토대왕비문의 倭로 대입해 보면 합리적인 점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 온 필자의 「신라본기」 倭 기사 해석 방법 역시 무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주제어

삼국사기, 신라, 신라본기, 왜

목차

  I. 머리말
  II. 倭 기사의 유형별 분류
      1. 기존 분류의 문제점
      2. '倭人'과 '倭國' 유형의 분류
  III. 「신라본기」의 倭와 가야
      1. 가야사 시대 구분의 재검토
      2. 浦上八國의 난과 倭國의 형성
      3. 永樂 17년 전투와 倭國의 소멸
  IV. 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삼국사기』에는 '倭'라는 글자가 110회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倭山, 倭典 등 倭 자체에 대한 기사와 상관없는 것과 한 기사에 여러 번 쓰여 중복되는 것을 빼고, 바로 앞 倭 기사에 이어서 '又'로 주어가 생략된 기사를 더하면, 「고구려본기」에는 왜 기사가 전혀 없고, 「백제본기」에는 10회, 「신라본기」에는 54회 나온다고 한다 (田中俊明 1982: 166-167).

이 가운데 「신라본기」는 倭 기사 수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기원 전후부터 수백 년 동안 꾸준히 나온다는 점에서 『삼국사기』 왜 기사 연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런데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 기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기록된 '倭'가 모두 같은 실체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옛날에는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를 당연히 日本(大和朝廷)이라고 보았고, 이런 인식은 뿌리 깊은 것으로 아직도 큰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학계에서 점점 인식되어 왔다. 「신라본기」의 倭를 北九州와 出雲에 있었던 백제계와 신라계 왜왕국으로 본 金錫亨 (1966)의 주장이 그런 계기를 최초로 열었고, 井上秀雄은 「신라본기」에 보이는 倭人, 倭兵이 육지와 이어진 곳에 살고 있던 倭人, 倭兵이었으며(井上秀雄 1973: 390), 신라에서는 7세기 중엽까지 신라와 접해 있던 임나 지방을 倭라 불렀다고 본 것(井上秀雄 1972: 139) 등 이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대표적 연구 결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倭에 대한 논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 는데 [1], 그 이유로는 좀더 객관적인 잣대로 좀더 넓은 시기에 걸쳐 보는 시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특정 시기나 특정 기사에서 왜는 어떤 실체로 추정되기 때문에 다른 시기에 나오는 모든 왜도 그와 같다고 한다거나, 연구자가 상정한 특별한 과거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 각 기사를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사 각각에 의미를 주기보다는 기사 각각에 나오는 구성 요소들이 전 시기에 걸쳐 어떻게 변천하는지 변화 경향을 보는 것이 훨씬 객관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결과를 주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서, 기원전 50년부터 500년까지 기사를 대상으로 각 기사에 나오는 倭의 표기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2]. II장에서는 「신라본기」 倭 기사를 분류한 기존 연구들을 소개하고 그 문제점들을 지적한 바탕 위에서, 새로 제안된 필자의 분류 방식을 따르면 전체 倭 기사가 倭의 표기 방식에 따라 시간적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짐을 보일 것이다. III장에서는 이렇게 표기 방식에 따라 분류된 倭 기사들이 가야사와 어떻게 접목되는지 포상팔국의 난과 광개토대왕 비문의 영락17년 기사를 재해석함으로써 추론해 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IV장에서는 필자의 결론을 종합한다.

II. 倭 기사의 유형별 분류

1. 기존 분류의 문제점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 기사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기사의 주요 구성 요소별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倭의 표기 형태: 倭人, 倭兵, 倭賊, 倭國, 倭國王, 倭王, 倭女王
(2) 倭의 활동 지역: 木出島, 沙道城, 長峰城, 風島, 吐含山, 斧峴東原, 金城, 明活城, 獨山, 月城, 活開城, 良城, 五道, 臨海鎭, 長嶺鎭, 長峰鎭 등
(3) 倭의 행태: 침공, 외교, 求食, 來往 등

이처럼 倭의 특정 표기나 활동 지역, 행태가 특정 시기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어떤 규칙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사실상, 倭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물론 이 기사들이 여러 실체를 지칭하는지 단일 실체를 지칭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倭 기사의 거시적 이해를 위해서는 유형별 분류가 불가피한데, 지금까지는 倭人, 倭兵, 倭賊과 倭國, 倭國王, 倭王, 倭女王이라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을 다른 사료 계통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倭賊이라는 표기가 493년에 단 1번만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倭人과 倭兵 기사를 한 묶음으로 보고 나머지 기사를 다른 묶음으로 보는 이분법인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田中俊明 1982: 170)

(1) 奈勿 9년(364) 4월 항목에 倭人과 倭兵이 같은 실체로 나오기 때문이다.(표 1 참조) 여기에는 의미상 성격상 같은 倭賊도 포함된다.
(2) 倭人, 倭兵, 倭賊은 대부분 신라를 침공한 존재이고, 倭國, 倭王, 倭國王, 倭女王은 交聘, 請婚, 人質 등 신라와 외교를 한 존재로 행태가 구별된다.

이러한 분류는 일견 매우 자연스러워서 어떤 연구자이든 「신라본기」의 倭 기사를 늘어놓고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김석형(1966)이 '신라와 대립하였던 왜= 北九州의 百濟係 倭國'으로 '신라와 대립하지 않았던 왜= 出雲 吉備의 新羅係 倭國'으로 구분하여 分國說을 주장한 것도 신라에 침공을 하는 倭人, 倭兵과 외교를 하는 倭國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분류가 가진 문제점도 몇 가지 지적할 수가 있다. (1)에 대해서는 한 기사 안에 倭國이나 倭兵이 倭人과 같이 나오는 364년의 단 한 개 기사를 통해 倭人=倭兵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전체 倭 기사에 적용시키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본다. 예컨대 295년 기사에서는 倭人=倭國이라고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2)에 대해서는 비록 두 개에 불과하지만 침공 기사가 아닌 倭人 기사도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158년과 193년 기사 표 1 참조.)

년대 유형 「신라본기」 본문 관련 기록
전50
혁거세8
왜인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전20
혁거세38
왜인 (瓠公)對曰: 我國自二聖肇興...自辰韓遺民, 以至卞韓 樂浪 倭人無不畏懷. 瓠公者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14
남해11
왜인 倭人遣兵船百餘 ,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 以禦之.  
57
탈해1
왜국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59
탈해3
왜국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建武 中元二年(57),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後漢書』
73
탈해17
왜인 十七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  
121
지마10
왜인 夏四月, 倭人侵東邊.  
122
지마11
왜병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 翌宗等諭止之.  
123
지마12
왜국 春三月, 與倭國講和. 安帝 永初元年(107),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後漢書』  
158
아달라5
왜인 春三月, 開竹嶺. 倭人來聘.  
173
아달라20
왜여왕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桓 靈間, 倭國大亂 ... 有一女子名曰卑彌呼 ... 於時共立爲王. 『後漢書』
193
벌휴10
왜인 六月, 倭人大饑, 來求食者千餘人.  
208
내해13
왜인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 利音, 將兵拒之.  
232
조분3
왜인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233
조분4
왜병
왜인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 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249
첨해3
왜인
왜국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以汝王爲鹽奴, 王妃爲 婦. 倭王聞之怒. 『三國史記』 「昔于老列傳」
287
유례4
왜인 夏四月, 倭人襲一禮部,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289
유례6
왜병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292
유례9
왜병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 大谷, 領兵救, 完之.  
294
유례11
왜병 夏, 倭兵來攻長峰城, 不克.  
295
유례12
왜국
/왜인
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三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300
기림3
왜국 春正月, 與倭國交聘.  
312
흘해3
왜국왕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 急利女送之.  
344
흘해35
왜국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345
흘해36
왜왕 二月, 倭王移書絶交.  
346
흘해37
왜병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 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364
내물9
왜병
/왜인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393
내물38
왜인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402
실성1
왜국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405
실성4
왜병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07
실성6
왜인 春三月, 倭人侵東邊. 夏六月, 又侵南邊, 奪掠一百人.  
408
실성7
왜인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 貯以兵革資粮, 以謀襲我, 我欲先其未發, 揀精兵擊破兵儲. 舒弗邯未斯品曰: "臣聞: '兵凶器, 戰危事.' 況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 不若依 關,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 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策之上也." 王從之.  
415
실성14
왜인 八月, 與倭人戰於風島, 克之.  
418
눌지2
왜국   秋, 王弟未斯欣, 自倭國逃還. (인용 생략) 『三國史記』 「朴堤上列傳」
431
눌지15
왜병 夏四月, 倭兵來侵東邊, 圍明活城, 無功而退.  
440
눌지24
왜인 倭人侵南邊, 掠取生口而去. 夏六月, 又侵東邊.  
444
눌지28
왜병 夏四月, 倭兵圍金城十日, 糧盡乃歸. 王欲出兵追之, 左右曰: "兵家之說曰: '窮寇勿追.' 王其舍之." 不聽, 率數千餘騎, 追及於獨山之東合戰, 爲賊所敗, 將士死者過半. 王蒼黃棄馬上山, 賊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賊謂有陰助, 收兵退歸.  
459
자비2
왜인 夏四月, 倭人以兵船百餘 , 襲東邊, 進圍月城, 四面矢石, 如雨. 王城守, 賊將退, 出兵擊敗之, 追北至海口, 賊溺死者, 過半.  
462
자비5
왜인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463
자비6
왜인 春二月, 倭人侵 良城, 不克而去, 王命伐知 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 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場, 緣邊築二城.  
476
자비19
왜인 夏六月, 倭人侵東邊. 王命將軍德智擊敗之, 殺虜二百餘人.  
477
자비20
왜인 夏五月, 倭人擧兵, 五道來侵, 竟無功而還.  
482
소지4
왜인 五月, 倭人侵邊.  
486
소지8
왜인 夏四月, 倭人犯邊.  
493
소지15
왜적 秋七月, 置臨海 長嶺二鎭, 以備倭賊.  
497
소지19
왜인 夏四月, 倭人犯邊.  
500
소지22
왜인 春三月, 倭人攻陷長峰鎭.  
표 1. 「신라본기」의 倭 기사들. 필자의 분류 방법에 의한 倭國 기사에는 그림자를 넣어 倭人 기사와 구별되어 보이도록 하였다. 한 기사 안에서 倭人과 倭國 표기가 같이 나오면 倭國 기사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보다 필자가 좀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느낀 것은, 중립적인 표기인 '倭人'이 침공을 주로 한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표기의 의미상 전투와 항상 연관될 수밖에 없는 '倭兵'도 침공하는 속성을 가진다고 해서 倭人과 같은 유형으로 묶는 점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이것은 倭의 행태만 보지 않고 동시에 표기에도 관심을 가질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분법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倭人, 倭兵, 倭賊과 倭國, 倭王, 倭國王, 倭 女王이 같은 실체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旗田巍(1975: 112)는 침공과 외교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을 들어, 내습하는 경우에는 倭人, 倭兵이라 하고 講和가 성립하면 倭國 이라고 바꾸어 말할 뿐 두 실체가 같다고 하였고, 鈴木英夫는 倭人, 倭兵은 신라인에게 국가적 세력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으로 倭國, 倭王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여 두 실체를 다르게 보았다.

그러나 두 유형을 같은 실체로 보았을 때에는 같은 실체를 침공과 외교라는 행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였을 특별한 이유를 찾기 어려우므로 설득력이 없다. 각각 다른 사료 계통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井上秀雄(1973)의 입장도 논거가 불확실하여 따르기 어렵다. 또, 두 유형을 다른 실체로 볼 경우에도 수백 년 동안 침공, 외교 등 특정한 행위만 하는 실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신라와 외교도 하고 필요에 따라 침공도 하는 존재가 자연스러운 것이지 항상 외교만 하거나 항상 침공만 하는 실체를 생각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약간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田中俊明(1982: 171)은 기본적으로 旗田巍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倭'에 중점을 두느냐 '人, 兵, 國'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倭를 같은 실체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실체로 볼 수도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 주장은 倭人, 倭兵, 倭國 등 고정된 표기 각각을 따로 보지 않고 倭의 다양한 면이 人, 兵, 國으로 표현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倭의 실체에 대해 융통성 있는 설명 가능성을 보였으나 스스로 더 이상의 전개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처럼 기존 분류는 倭人, 倭兵 기사와 倭國 기사 둘로 나누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유형 기사들의 시간적 변화를 살피기 위해 표 1을 바탕으로 그림 1을 그렸다. 그림 1 (a)는 倭人과 倭兵이라는 표기(단 한번 나오는 倭賊도 포함)에는 '0'을, 倭國이라는 표기(倭國王, 倭王, 倭女王도 포함)에는 '1'을 임의로 지정하여 그린 것이다.

그림 1:기존 분류를 따라 그린 「신라본기」 倭 표기의 변천.
(a)는 倭國 기사=1로, 倭人, 倭兵 기사=0 으로 놓고 그린 것이다.
(b)는 그 가운데 일본열도의 倭로 판단되는 기사=-1로 값을 바꿔 다시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우선 4세기 전반기 약 50년 동안 倭國 기사 4개(300, 312, 344, 345년 기사) 가 모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또 이 倭國 기사 4개 좌우에는 좀 간격을 두고 역시 倭國 기사들이 있는데, 이 기사들은 『三國志』와 『後漢書』, 『三國史記』 등 다른 역사책에 해당되는 기사가 있으므로 상당히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것들인데 모두 일본열도와 관련이 있는 倭國 기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라본기」 이외 다른 문헌 자료로 일본 열도의 倭와 연계가 가능한 것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59년의 倭國 교빙 기사는 『후한서』에 나오는 57년 왜국 기사와 연계된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표 1 참조) 바로 그 앞 불과 2년 전인 57년에 脫解의 고향인 多婆那國의 위치 가 倭國 동북쪽 1,000리라고 한 기사의 倭國도 같은 倭國을 지칭한 것이라고 보는 데에 무리가 없다.
② 123년의 倭國 講和 기사도 『후한서』를 참조하면 그 무렵 일본열도의 倭國이 활발한 외교를 펼치고 있음을 고려하면 역시 신라와 일본열도의 倭國 사이 외교 관계를 기록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1년 전인 122년의 倭兵 침입 訛言 기사도 연관 기사일 것으로 추측된다 [3].
③ 173년의 倭女王 비미호 기사는 『후한서』 기록과 비교할 때 분명히 일본열도의 倭가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402년의 미사흔 인질 기사와 418년의 미사흔 귀환 기사 역시 『三國史記』 「朴堤上列傳」 을 고려하면 일본열도의 倭와 연관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본 연구의 목적은 「신라본기」에 나오는 실체가 확실하지 않은 倭를 탐구하는 것이 므로 일단 일본열도의 倭와 연관되는 기사로 확실시되는 기사들을 골라 제외시키는 것이 연구의 효율성을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倭 기사 가운데 일본 열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기사에 '-1'을 부여하여 다시 그린 것이 그림 1 (b)이다. 이 그림을 통해, 일본열도의 倭를 제외하면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倭 기사는 대부분 倭人, 倭兵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倭國으로 표기되어 있는 기사 단 4개가 4세기 전반 기라는 특정 시기에 몰려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주목되는 기사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사와 연관되는 어떤 형태의 다른 문헌 기록도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전은 불가능한 것이다. 木下禮仁(1982: 144)의 말을 빌면 基臨 3년에서 訖解 36년까지 보이는 300년, 312년, 344년, 345년 4개의 기사는 "완전히 『三國史記』에만 보이는 기사여서 귀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떤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추구할 방법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이처럼 來襲者로서 倭人과 倭兵을 같이 묶어보는 기존의 분류법은 연구자로서 충분히 떠 올릴 수 있는 분류이지만 무엇보다도 분류 그 자체에 그쳤을 뿐 현 시점에서 의미 있는 해석이 불가능한데, 필자는 이것은 역으로 그 분류 방법이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倭人과 倭兵을 묶어서 보지 않는 전혀 새로운 분류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2. '倭人'과 '倭國' 유형의 분류

「신라본기」 倭 기사들의 다양한 표기들이 별다른 의미가 없고 단지 처음 기록자가 머리 속에 생각나는 대로 倭人이라고 쓰기도 하고 倭兵이라고 쓰기도 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보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459년부터 500년까지 10차례에 걸쳐 倭人이라는 표현이 명백히 집중된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정확히는 493년에 倭賊 표기가 1개 포함되어 있다) 침공을 하는 실체로서 倭兵과 倭人 표기가 동등하게 쓰일 수 있다고 한다면 倭兵이 배제되고 倭人으로만 연속해 N번 기재될 확률은 (1/2)N이다. 이어지는 倭人 기사 중간에 하나 들어간 倭賊을 倭人과 구별하지 않는다면(N=10) 그 확률은 0.097%이고 倭賊을 倭人과 구별하여 493년 倭賊 기사 이전에 연속되는 倭人 기사 7번만 셈한다고 하여도(N=7) 그 확률은 0.781%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5세기 중반 이후에 '倭人'으로 집중적으로 표기된 것은 기록자가 임의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라인들의 인식 체계 속에서 다른 표기와는 구별된 것을 암시한다고 판단된다.

필자는 이처럼 특정 표기가 특정 시기에 몰려 있는 경우가 또 있는지 전체 倭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그런 경우를 찾기가 어려웠다. 倭人과 같이 완전히 동일한 표기가 몰려 있는 경우는 더 이상 없었고, 倭國, 倭兵, 倭人, 倭王 등 다른 표기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필자는 倭國, 倭兵, 倭國王, 倭王, 倭女王이라는 표기는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國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國을 전제로 하는 표현인 倭國, 倭兵, 倭王, 倭國王, 倭女王과 그렇지 않은 표현인 倭人, 倭賊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기존 분류의 한 쪽 유형에서 倭兵을 떼어 다른 쪽 유형에 포함시키는 것에 불과하지만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차이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國, 王, 女王, 兵이란 '國'을 키워드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상으로 묶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고 자연스럽다 [4]. 또 침공이란 성격을 지닌 倭兵이 외교란 성격을 지닌 倭國, 倭王, 倭國王, 倭女王란 표현과 같은 부류로 묶임으로 인해 이제 倭國은 외교만 하는 존재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침공도 하는 좀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침공을 하면 倭人이나 倭兵으로 표기하고 외교를 하면 倭國으로 표기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더 합리적이라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림 2 (a)는 필자가 제안한 분류를 쉽게 알아보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倭國, 倭王, 倭國王, 倭女王 등 國을 전제로 하는 표기(이하 '倭國 기사'로 통칭함)에는 '1'을, 倭人, 倭賊이라는 國을 전제로 하지 않는 표기(이하 '倭人 기사'로 통칭함)에는 '0'을 임의로 부여하여 그린 것이고, 그림 2 (b)는 앞에서 한 것처럼 그 가운데 일본열도와 관련되는 倭國 기사에 '-1'을 부여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그림 2:필자의 분류를 따라 그린, 「신라본기」 倭 표기의 변천.
(a)는 倭國 기사=1로, 倭人 기사=0 이라고 놓고 그린 것이다.
(b)는 그 가운데 일본열도의 倭로 판단되는 기사=-1로 값을 바꿔 다시 그린 것이다.

倭人 기사와 倭國 기사의 차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기사를 분리하여 보는 것 만으로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3세기 초반 이전의 倭 기사는 모두 倭 人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고, 이것은 그 이후에 연속되는 倭國 표기와 대비되어 뚜렷한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림 2 (b)를 자세히 보면 289년부터 36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國을 전제로 하는 표현들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전체 기간을 구체적으로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5].

(1) 倭人으로 표기되는 시대(기원 전후 - 3세기 초반)
(2) 대부분 倭國으로 표기되는 시기(3세기 초반 - 5세기 전반)
(3) 다시 倭人으로만 표기되는 시기(5세기 중반 이후)

이처럼 3세기 초반 이전에 나오는 倭國 기사는 모두 다른 기록에 의해 일본열도의 倭國으로 볼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일본열도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없는 倭國 기사는 233년 처음 나온다. 즉 그 이전에 신라인들은 일본열도의 倭國을 제외하면 정체불명의 倭에 대해 倭人이라는 표기만 남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점은 「신라본기」에 가야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212년에서 21년이 지난 233년에 倭人 대신에 倭國이라는 표기가 처음 보이기 시작하여 약 200년 동안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가야사와 倭 표기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므로 다음 장에서 그 연관성을 살펴보기로 하되, 이어질 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신라본기」 倭의 근거지에 대한 필자의 잠정적인 생각을 미리 적어 보기로 한다.

필자가 「신라본기」에서 분류한 '倭人'과 '倭國'도 '倭'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동시대를 기록한 『三國志』와 『後漢書』에 나오는 倭 기사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들을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 기사들이 이들 다른 기록에 나오는 倭 기사 들의 연장선 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倭가 일본열도에만 있었다고 볼 수 없게 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존재한다.

① 낙랑의 바다에 왜인이 있는데 백여 국으로 나뉘어 있다.
夫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漢書』 「地理志」
② 韓은 帶方 남쪽에 있는데, 동서는 바다로 막히고 남쪽은 왜와 접한다.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③ 변진은 진한과 섞여 기거하며 (중략) 그 瀆盧國은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 열 두 나라 역시 왕이 있다.
弁辰與辰韓雜居, (중략)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④ 郡에서 倭에 이르려면 해안으로 물길을 따라 韓國을 지나고, 혹은 남쪽으로 혹은 동쪽으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인 狗邪韓國에 이르게 되니, 이렇게 7천여 리를 가다가 비로소 한 차례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對馬國에 이르게 된다.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⑤ 광무제 중원 2년에 왜노국이 공물을 올리고 예방하여 하례하며, 그 자신이 스스로 대 부라 일컬었으니, 왜국의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建武 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也 『後漢書』 「東夷列傳」

여기서 ①은 분명히 일본열도의 倭가 아닌 倭가 존재함을 보여 주고 ②③④는 구체적으로 한반도 안에 이른바 '倭地'가 있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할 방법은 없으며, 여기에 나오는 한반도 남부의 倭가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 기사와 일부라도 겹치지 않는다고 할 근거도 전혀 없는 것이다. 또, ⑤는 '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진 金印이 발견된 九州 북부 해안을 倭奴國으로 보는 통설을 받아들인다면 이곳을 倭國之極南이라고 한 이상 그 북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는 倭國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신라본기」 편찬 때 사용된 사료를 작성한 신라인이나 「광개토대왕비문」을 작성한 고구려인 모두 『삼국지』와 『후한서』를 보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보고, 이들 기록에 나오는 '倭'의 용법도 같은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 2세기에 가야와 같이 나오는 '倭人'은 이들이 일본열도의 왜라고 하는 선입견만 버린다 면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倭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倭人의 위치는 어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신라와 인접해야 하고 가야 와 겹치지 않아야 하는데 [6],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역은 낙동강 하류 동쪽의 경남 지역밖에 없다고 필자는 생각하며, 「신라본기」의 倭를 정밀하게 분석한 木下禮仁(1982: 150)의 倭人, 倭兵의 근거지에 대한 다음 결론에 동의한다.

"이들 기사군에 보이는 왜인이나 왜병이 일본열도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왜인의 거주 범위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낙동강 하류의 오른쪽 지역과 對馬를 한계로 하는 반도의 동남 해변부 일대라는 사실 이상을 사료에서 해석해 낼 수가 없었다. (중략) 신라가 낙동강 왼쪽 지역 해변부에서 오늘날의 울산에 이르는 지역을 언제 손에 넣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44 열전 제4의 居道 전승을 통해 탈해 니사금 때 于尸山國(지금의 울산 방면)과 居柒國(지금의 동래 방면)이 신라와 이웃해 있어 국가의 대단한 害가 되었음과 居道가 이 두 나라를 멸망시킨 공을 세웠음을 볼 수 있다. 그 실제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가 이 방면을 그 세력 아래에 둘 때 애먹었던 기억을 남긴 전승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방면은 신라에게는 매우 골치 아픈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대도 왜인의 거주 지역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부근에서 신라 왕도로의 침공을 생각할 때 해로를 택하는 것도 당연히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居道에 의한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7] 공격 기사가 있어서 신라가 낙동강 동쪽 경주 이남 지역을 아주 이른 시기에 장악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사가 곧 영토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창녕, 양산, 울주 지역 등은 신라나 김해 가야 연맹 어느 쪽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던 倭人의 지역으로 상정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8]. 이 지역이 이른 시기부터 신라에 확고하게 점유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으며, 만일 그런 점이 확실하게 입증된다면 물론 필자의 논고는 무의미하게 됨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III. 「신라본기」의 倭와 가야

1. 가야사 시대 구분의 재검토

가야사의 시대 구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견해가 나왔다. 그 가운데 비교적 널리 받 아들여진 것은 김정학(1987)이기동(1982)의 견해로 1-3 세기를 전기로, 4-6세기를 후기 로 나누되, 전기를 『삼국지』 「동이전」의 변한 12국으로 설명하고, 후기를 『삼국유사』의 6가 야 연맹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김태식 2002: 76)

그런데 그 시대 구분의 계기로 고총 고분의 출현과 함께 313년 고구려에 의한 낙랑군의 소멸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낙랑군의 소멸은 원거리 교역을 통한 선진 문물 보급의 핵이 사라진 것으로 이를 계기로 가야 소국들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3세기 초에 일어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포상팔국의 난을 100년 정도 끌어내려 4세기 초 교역권의 주도권을 상실한 김해가야에 대한 소국들의 반란으로 보기도 한다.(김태식 2002: 130-131)

한편, 김태식(1985)은 고고학적으로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는 3-5세기 기간의 한가운데인 서기 400년 무렵을 경계로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로 시대를 구분하자고 제안하였다. 김태식은 기존의 학설들에서 고총 고분의 출현 시기로 잡고 있는 300년 무렵이 가야사의 중요한 시대 구분 기준으로 잡기에는 불확실하며 문헌상 맹주국이었다는 김해에는 고총 고분의 조성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맹주권의 큰 변화를 중심으로 시기 구분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김태식 1985) 그의 주장대로 왕통과 지역의 교체가 동시에 일어났고 더욱이 이것이 고구려의 원정이라는 매우 큰 일대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대 구분은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400년 무렵을 가야사의 중요한 시대 구분 계기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1세기 중반 에서 400년 무렵 사이의 짧지 않은 시기는 또 한번 더 구분이 필요 없을 만큼 평면적인 시 대였는지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최신 고고학 자료를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할 때 서기 200년 무렵을 중요한 변화의 계기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표 2 참조)

시대 구분 기간 국가 형태
가야의 태동기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1세기 부족국가
가야의 성립기 1세기 - 2세기 도시국가
가야의 발전기 3세기 - 5세기 영역국가
가야의 쇠퇴기 6세기 초엽 - 6세기 중엽 영역국가
<표 2> 고고학 자료를 기준으로 한 가야사 시대 구분. (윤석효 1997: 67)

가야 지역에는 이전 시기의 고분 출토물과 비교할 때 확연히 다른 양동리 토광묘의 後漢鏡 등 1세기 유물군과 회현리의 貨泉 등을 볼 때 늦어도 기원후 1세기부터 지배 영역과 지배 권력에 상당한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윤석효 1997: 52) 이 때를 수로왕 가야의 시작을 알리는 고고학상의 획기로 본다면 약 150년 후인 3세기 이후는 고고학적으로 이른바 원삼국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 전기에 걸친다는 시기로서,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의 도입, 신묘제의 출현, 철제품의 보편화, 철제 무기류의 급증, 패총 유적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고지성 집락의 분포 등 새로운 문화 양상이 나타나는, 또 다른 획기이다. 그 연장선 위에서 가야 지역 유물을 다른 영남 지역과 비교할 때 동래를 포함한 가야 세력의 최전성기는 4세기라는 고고학적 견해는 참조할 만하다.(신경철 1989)

이와 같은 고고학 자료로 드러난 3, 4세기 가야 지역의 우위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김태식의 전기 가야를 다시 이등분한 것은 백승충(1989)이었다. 그는 가야사를 초기(기원전후-2세기 말), 중기(3-4세기), 말기(5-6세기 중반)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본 논문에서 서기 200년 무렵을 경계로 倭의 표기가 倭人에서 倭國으로 바뀜을 밝힌 것과 대략 통한다. 그리고 기존 연구들이 『三國志』 기록을 중요시하여 1-3세기 한반도 남부를 평면적인 사회로 파악하고, 4세기 초반 한사군 소멸이라는 외부 상황을 한반도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발전의 계기로 간주하고자 하는 것은 뚜렷한 근거 없이 관념적으로 가야사를 종속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란 점에서 비판받을 이유가 충분하므로(백승충 1989: 2-4),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하여 포상팔국의 난을 가야사 구분의 중요한 계기로 본 점도 필자의 관점과 같다. 그러나 『晋書』 기록을 고고학적 근거와는 상반되게 해석하여, 이 시기 가야 세력권의 선진적인 문화 양상에도 불구하고 구심체가 상실되어 신라에 종속되었다고 본 것은 필자의 생각과 정반대 입장에 선 것이다 [9].

필자는 고고학적 변화와 포상팔국의 난이 있었던 서기 200년 무렵을 경계로 하여 3-4세기를 김해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시기로 본다면, 3세기 들어서 倭國 기사가 급증하는 것도 더욱 강력해진 김해 세력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고고학적 자료와도 부합하는 타당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또 가야 기사가 사라지는 시기와 倭人에서 倭國으로 표기가 갑자기 바뀌는 시기가 모두 3세기 초반으로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역사 기록에서 두 세력이 동시에 나오다가 한 세력이 기록에서 사라지고 다른 세력은 계속 기록에 나온다면 한 세력이 다른 세력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3세기 초반까지 가야 기사와 倭 기사 가 동시에 기록에 나오다가 가야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지지만 倭 기사는 계속 나오는 것 은 가야가 倭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倭의 표 기가 倭人에서 倭國으로 바뀌는 것은 가야를 타도한 후에 격상된 倭의 위상을 신라인들이 기록에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

그리고 여기서 짚고 나갈 점은 다음 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가야 기사와 밀접한 상관 관계를 갖는 倭 기사들의 주체인 倭가(倭人이든 倭國이든) 일본열도의 倭는 아닐 것이라는 점 이다. 만일 일본열도의 倭라면 그것이 이른바 大和朝廷이든 九州王朝이든 이처럼 가야 기사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일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서기 200년 무렵을 전후로 가야에 정치적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여주는 문헌 근거를 제시한다면, 김성호(2000: 272-273)가 처음에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 「駕洛國記」에 나오는 금관가야 왕들의 재위 기간 중간에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표 3에서 볼 수 있듯이 157년 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수로왕을 비롯하여 재위 기간이 50년, 60년 이상 되는 기록들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1대 30년을 기준으로 할 때, 30년 이상 재위한 왕들이 대부분 왕력 앞부분에 몰려 있음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후기의 왕들은 知王과 구형왕이 30년 이상 재위하였지만 김유신의 연대와 비교하여 구형왕의 재위 연대는 신뢰할 수 있다고 보이며, 질지왕도 "나이가 많아서 정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화랑세기』 15세 庾信公 기록을 참고하면 오래 재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면에서 재위 기간이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표 3>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왕들의 재위 기간.
*표는 30년 이상 재위한 왕들을 표시함. 재위 기간이 과도하게 긴 초기 다섯 왕들의 고친 재위 기간은 「신라본기」에 수로왕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102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평균 재위 기간 30년씩 더해서 고친 것이다.
대수 왕명 재위 연대 재위 기간 고친 재위 연대 관련 기록
1 수로* 42-199 157 42-102 金官國 首露王年老多智識.『삼국사기』
2 거등* 199-253 54 102-132  
3 마품* 253-291 38 132-162  
4 거미질* 291-346 55 162-192  
5 이시품* 346-407 61 192-222  
가야 왕력의 시간적 공백=약 200년
6 좌지 407-421 4 407-421  
7 취희 421-451 30 421-451  
8 질지* 451-492 41 451-492 知老, 不理政. 『화랑세기』
9 겸지 492-521 29 492-521  
10 구형* 521-562 41 521-562  

이런 불합리한 왕력에 대해서는 1, 2세기 초기 다섯 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려 중간 공백을 메운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수로왕을 필두로 한 3, 4세기 왕들을 1, 2세기로 끌어 내렸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11]. 그러나 서기 200년 무렵 가야의 단절을 상정하는 입장에서 본 논문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 이것은 단순히 두 가지 입장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능성 있는 입장을 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23년(102) 조목을 본다면 수로왕이 상당히 장수하였다는 것을 인 정할 수 있는데, 이 해를 기준으로 거등왕부터 이시품왕까지 4대가 평균 30년 재위하였다고 보고 30년씩 더해 가면 3세기 초인 222년에 가야 왕력이 단절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는 필자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가야와 倭人 기사가 동시에 사라지고 倭國 기사가 등장하는 시기에 정확히 해당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수로왕부터 이시품왕까지 5대에서 가야 왕력은 일단 단절이 되고 김해 지역에 가야 대신 '倭國'이 들어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표 3의 수정 재위 연대를 인정하고 논리대로 따지자면 이 倭國은 약 200년 후 김해에 다시 후기 가 야가 시작되는 좌지왕 원년(407)에 소멸해야 한다.

이처럼 현재 「가락국기」에 전하는 김해가야 왕력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이시품왕과 좌지왕 사이에 있는 약 200년 동안의 공백 [12] 을 메우기 위해 앞에 있는 왕들, 특히 수로왕의 재위 연대를 늘여 계보가 연속된 것으로 보이게 하려 한 것이다.

이상 서기 200년 무렵을 가야사의 새로운 시대 구분 계기로 삼는 것은 고고학적 변화, 가야 왕력의 합리적 이해, 倭 표기의 변화 등을 고려할 때 매우 근거가 있다는 잠정적 결론 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로왕의 가야는 5대 이시품왕을 마지막으로 일단 소멸되고,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 지역에는 「신라본기」에 '倭國'으로 표기된 정치적 실체가 들어 선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 倭國은 于老를 죽이고 신라에 혼인을 강요하고 침공하는 등 주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2. 浦上八國의 난과 倭國의 형성

위에서 3, 4세기 가야 지역이 「신라본기」에서는 倭, 더 구체적으로는 倭國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가야라고 불리던 지역이 신라인들에게 倭로 인식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한 지역에서 정치체의 명칭이 바뀌는 원인으 로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한 정치 세력이 외부의 다른 정치 세력으로 교체되었을 때인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로왕이 세운 가야가 외부 세력에 의해 타도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3세기 초반 가야를 위태롭게 한 유일한 사건인 포상팔국에 의한 가야 공격과 관련된 다음 기사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① 나해 이사금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였다.
② 나해 이사금 14년(209) 가을 7월에 浦上의 여덟 나라가 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于老와 이벌찬 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13].
③ 나해 이사금 17년(212) 봄 3월에 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骨浦, 柒浦, 古史浦 세 나라가 竭火城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포상팔국은 8개 나라를 말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그들 나라 이름이 모두 알려져 있지 는 않다. 『삼국유사』 물계자 항목에 나오는 保羅國, 古自國, 史勿國과 『삼국사기』 나해왕 17 년(212) 기록에 나오는 骨浦, 柒浦, 古史浦로 모두 6개 나라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古自國과 古史浦를 같은 존재로 보면 5개 나라가 된다.


그림 3: 포상팔국의 위치를 마산 이서로 한정하면 209년에 김해가야를 침공하기에는 문제가 없는 위치이지만 212년에 竭火城을 공격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위치가 된다. 포상팔국 가운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4국의 위치는 이 점을 고려해서 추정할 필요가 있다.
(그림 출처는
김태식 2002: 132)

그 동안 포상팔국은 그 이름에서 강가나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소국들임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강가보다는 주로 경남 남해 바닷가에 위치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 왔다. 그 이유는 保羅國은 지명을 비정할 수 없지만, 古自國(지금의 고성으로 비정), 史勿國(지금의 사천으로 비정), 骨浦國(지금의 마산으로 비정), 柒浦國(지금의 칠원으로 비정) 4개가 낙동강 서쪽 경남 해안 지방으로 비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명 비정의 불확실성은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8개국 가운데 나머지 4개국마저 낙동강 서쪽 경남 남해안에 몰려 있다고 보기에는 우선 그 지역이 너무 좁고, 나해왕 14년(209)에 신라가 가야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보낸 것이라고 본다면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포상 팔국 의 위치가 마산 서쪽 해안이 아니고 신라와 가야 사이인 울주군이나 양산군 일대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수도 있다.(李宇泰 1997: 45 註 51) 또 나해왕 17년(212)에 骨浦, 柒浦, 古史 浦 3국이 竭火城(울산으로 비정)을 공격하기에 적당한 위치도 아니다.(그림 3 참조) 이처럼 포상팔국의 위치가 모두 낙동강 서쪽 남해안이라고 하면 가야를 사이에 놓고 포상팔국과 신라가 서로 직접 공격을 한 셈이 되므로 이는 불합리한 설정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적어도 나머지 4개 포상팔국의 위치는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면서, 김해 가야와 竭火城 모두를 공격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은 부산, 양산 등 낙동강 동쪽 연안 밖에 없다. 이들 나머지 4개국이 낙동강 동쪽 해안선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면 김해가야와 갈화성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위치이다.(그림 4 참조)


그림 4: 포상팔국의 위치를 낙동강 동쪽에도 일부 비정하면 가야 침공과 竭火城 침공을 모두 잘 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 포상팔국은 서기 200년 이전부터 「신라본기」에 倭人으로 표기되던 존재로, 특히 그 가운데 남해안과 낙동강 동쪽 연안에 있던 소국들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그림 3을 고쳐 그린 것임)

이런 정황을 보고 판단한다면 3세기 초에 가야를 공격해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으로 보 이는 포상팔국은 낙동강 동쪽과 일부 경남 남해안 지역에 위치한 해상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倭人들의 지역과 시간적, 공간적으로 겹친다. 즉 포상팔국은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人'과 겹치는 존재인 것이다. 비록 포상팔국의 난이 신라의 개입으로 격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 기사의 사라짐을 외부 세력에 의한 가야의 소멸로 이해한다면, 그럴만한 외부 세력은 신라가 아닌 이상 倭人, 구체적으로는 포상팔국이 될 수밖에 없다. 212년 포상팔국의 난이 끝나고, 233년 일본열도와 무관한 倭國 기사가 처음 나타나기 이전 기간인 212년과 233년 사이에 결국 倭人의 재공격에 의해 김해가야는 소멸된 것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14].

그러므로 「신라본기」에서 가야 기사가 사라지자 곧 倭人에서 倭國으로 표기가 바뀌는 것은 김해가야를 대신하여 낙동강 서쪽 지역뿐 아니라 동쪽 지역까지 낙동강 하류 전역이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된 것을 신라 측에서 인식하고 남긴 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倭國이 3세기 초에 등장한 이후 내부에서 평탄한 역사를 거친 것 같지는 않다. 선행묘 파괴 현상, 戰士 집단의 출현 등으로 상당히 내분이 있었지만 점차 동일성을 회복한 것으로 짐작된다. 4세기 무렵이 되면서 가야 지역에서 동서로 나타나는 지역색의 출현은(안재효, 송계현 1986)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림 5는 이러한 고고학적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데, 무투창 고배 출토지는 동쪽으로 통형 고배 출토지는 서쪽으로 몰려 있다.


그림 5: 4세기,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토기 형식으로 볼 때 지방색이 나타나고 있다.
원 모양은 무투창 고배 출토지를, 세모꼴은 통형 고배 출토지를 나타낸다.
(그림 출처는
김태식 2002: 136)

4세기 무렵이 되면 보이기 시작하는 이런 현상은 혼란을 정돈하면서 동질성을 갖게된 倭國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倭國의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주변으로 팽창하여 주변국에 대해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반에 걸쳐 신라에 강압적으로 나오는 倭國 기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5]. 김해를 중심 으로 한 무투창 고배 출토지가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몰락한 후에, 고령을 중심지로 한 통형 고배 출토지가 가야 지역의 새 중심지로 부상하였을 것이다.

3. 永樂 17년 전투와 倭國의 소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기 200년 무렵에 가야사의 큰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많은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헌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그러한 전환의 구체적인 속사정은 알 수 없었는데,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라본기」에서 왜의 표현 양식이 서기 200년을 넘어서면서 倭人에서 倭國으로 전환됨을 발견하였고, 더 나아가서 3-4세기에 가야 지방이 신라와 고구려 측에서 倭로 인식되고 표기되었을 가능성을 논하였다.

필자는 광개토대왕비문의 倭가 「신라본기」에 나오는 3, 4 세기의 倭國 기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데, 비문 倭의 대다수는 일본열도 倭의 도래와 상관없이 倭를 자처하는 것이 정 치, 군사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가야의 호족 세력이었다고 본 井上秀雄(1973)의 견해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3-4세기의 가야 지역은 倭를 자처하였다고 하여 고구려나 신라에서 그대로 믿고 기록에 남겼을 리도 없다고 생각하며, 일본열도에서 건너 온 倭에 장악 당한 것도 아닌 倭, 그 자체였다고 본다.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倭로 기록된 것은 신라와 고구려에서 그 이전부터 '倭'로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 또는 弁韓으로 불리던 지역이 倭로 인식되려면 이에 대한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필자가 앞에서 제시하였듯이 한반도 동남부의 非신라 세력은 가야뿐만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었다. 서기 200년 무렵까지 「신라본기」에 '倭人'으로 표현되던 任那 세력이었으며 이들은 기근이 들면 바로 신라 지역에 가서 求食을 하고, 고개가 열리면 곧 넘어서 방문하고, 태화강과 울산만만 건너면 바로 신라 중심부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반도 在地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필자는 이 倭人들이 수로왕의 초기 김해가야를 누르고 낙동강 하류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그 이후 낙동강 하류 전체가 倭로 인식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보았는데,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가야 지역 왜국의 소멸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필자가 「가락국기」에 나오는 김해가야 왕력에 공백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그 공백 안에 이른바 '倭國'이 들어 있었음을 언급하였는데, 그렇다면 倭國의 소멸은 공백이 끝나는 407년이 될 수밖에 없고, 같은 해인 광개토대왕 비문의 永樂 17년 조항을 주목하게 된다. 고구려군과 싸운 주체가 비면 마멸로 잘 밝혀지지 않은 이 싸움에서 고구려군은 5만을 동원 하여 갑옷 1만 벌과 수많은 軍資器械를 얻는 대승을 거두는데, 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口口口口口口口口口 師口口合戰, 斬煞蕩盡, 所荻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加稱數, 還破沙溝城 婁城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

이 정미년 기사에서 정벌된 대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진다. 현재 沙溝城과 婁城이 백제 북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407년의 정벌 대상을 백제로 보는 시각(예를 들면 박진석 1996)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16], 이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은 407년 정벌의 원인이 404년 倭의 대방계 공격이라고 인정하면서도 倭의 주도권을 무시하고 오히려 백제의 역할을 과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404년 기사에는 "不軌, 侵入帶方界, 口通殘兵"이라고 하고 전투의 결과도 "倭寇潰敗"라고 하여 倭가 주연, 백제가 조연을 맡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정벌의 원인을 나타내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전치문도 없는 407년 정벌 기사의 명분을 바로 앞에 나오는 404년 기사에서 찾아야 한다면, 407년의 정벌은 404년 대방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고 주연인 倭와 조연인 백제가 같이 정벌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倭가 전적으로 일본열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한반도 안에서 뚜렷한 근거지를 찾기 어렵겠지만 한반도 안에 倭國이 있었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還破' 이하 부분을 주목한다. 이 부분은 '돌아오는 길에 몇몇 성을 격파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沙溝城과 婁城을 백제의 성으로 인정한다면 [17], 그 이전에 鎧甲 1만 벌과 수많은 군자기계를 얻은 대상은 꼭 백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고구려군의 귀환로를 생각할 때 더 남쪽 지역이 될 수도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백제는 396년에, 신라 주변 임나가 라를 포함한 낙동강 동쪽 지역은 400년에 정벌되었으므로 [18] 이 때 새로 정벌된 대상으로는 한번도 정벌되지 않은 낙동강 서쪽 倭國이 가장 유력한 것이다. 즉 고구려군이 倭國의 본거지인 낙동강 서쪽을 평정하고 귀로에 백제의 몇몇 성을 격파한 것으로 보면 404년 공격의 주연과 조연에 대해 응징을 다 하는 셈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야 왕력의 공백, 즉 3-4세기의 倭國 시대 직후에 새로 후기 김해가야의 왕으로 즉위하는 좌지왕의 즉위 연도가 407년으로 영락 17년 기사와 같은 해에 있다. 이 일치는 고구려군의 대규모 정벌과 새로운 정권의 등장이라는 두 사건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매우 의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倭가 고구려군에게 정벌을 당하고 그 지역에 親고구려, 親신라 성격 [19] 을 지닌 좌지왕 정권이 성립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들을 가지고 문제가 많은 신묘년 기사를 필자 나름대로 복원해 보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필자가 생략되었다고 보고 첨가한 부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以辛卯年來(朝貢); (太王)渡海破百殘,倭,救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여전히 [20] 와서 조공하고, 왜는 신묘년 이래 (조공하러) 왔는데, (태왕이) 바다 건너 백잔과 왜를 쳐부수고 신라를 구하여 신민으로 삼은 것이다 [21].

여기서 倭가 일본열도의 倭라고 하면 신묘년 이래 고구려에 와서 조공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來를 앞에 나온 來朝貢의 줄임으로 볼 생각을 못하고 [22] 그 다음에 이어지는 渡海破에 연결시켜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倭가 3, 4 세기 가야 지역에 있다가 영락 17년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소멸된 「신라본기」의 倭國이라고 하면, 고구려 입장에서는 倭를 평정하고 좌지왕을 내세워 가야 지역을 복속시킨 것이므로 倭가 來朝貢을 하였다는 것이 사실과 일치하여, 고구려 입장에서는 百殘, 新羅, 倭를 동일한 屬民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 문장 구조상 신묘년 기사의 앞부분은 백잔, 신라, 倭가 고구려에 복속된 시기를 밝히는 것이며, 渡海破 이하 부분은 구체적으로 속민을 만든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渡海破의 주어는 생략되어 있지만 조공을 한 존재라고 바로 앞에서 말한(또는 바로 다음에 渡海破의 목적어인) 倭가 될 수는 당연히 없고, 고구려의 太王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407년을 가야 지역 倭國이 몰락한 시기라고 본다면 논리적 귀결로 그 이전 의 왜국 기사는 가야 지역의 倭國과 관련해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이후의 왜국 기사는 일본열도의 倭國과 연관시킬 수 밖에 없고, 그림 6은 그 결과를 그린 것이다. 이 결과대로라면

① 402년 미사흔이 인질로 간 곳은 가야 지역이 되고 [23],
② 431년과 444년의 두 기사는 일본열도의 왜국이 신라를 침공한 셈이 되는데

이의 타당성 여부는 앞으로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림 6:가야 지역의 시대 구분.
마름모 표시는 「신라본기」에 나오는 가야 기사를 나타내는데, 가야 기사가 사라지면서 倭의 표기가 倭人에서 倭國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직 점선 2개는 각각 가야 기사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212년과 고구려군의 가야 지역 평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407년(영락 17년)을 나타낸다.

407년 고구려군 5만과 싸워 대패한 倭國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 간 것은 일본 고분 시대가 질적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이 大和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고 보면 한반도의 임나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408년에 倭人이 대마도에서 습격을 준비한다고 한 「신라본기」 기사도 이런 면에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407년 이후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人'들은 다시 낙동강 동안으로 흩어진 倭國 세력이라고 판단된다. 이처럼 5세기 이후에 줄곧 「신라본기」에 倭人으로 나오던 집단은 6세기 들어 『일본서기』에 나오는 任那, 『화랑세기』에 후기 가야의 복속 집단으로 묘사된 野國, 野人으로 이어진다고 필자는 본다.

마지막으로 가야 지역=倭라고 보는 한 倭國의 위치에 관련된 다음 기사들에 대한 필자의 입 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①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 온 까닭에 瓠公이라 불렀다.
瓠公者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삼국사기』 혁거세 38년
②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北은 바다로 隔해 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任那者去北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일본서기』 「崇神」 65년 7월
③郡에서 倭에 이르려면 해안으로 물길을 따라 韓國을 지나고, 혹은 남쪽으로 혹은 동쪽 으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인 狗邪韓國에 이르게 되니, 이렇게 7천여 리를 가다가 비로소 한 차례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對馬國에 이르게 된다.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④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弘權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 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三我國 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①에서 호공이 '渡海'한 바다는 지금의 대한해협이 될 수도 있지만 필자의 주장대로 혁거세 당시 「신라본기」의 倭人이라는 표기가 구체적으로 낙동강 동쪽 사람을 지칭한 것이라면 호공은 울산 지역 사람으로서 울산만을 건너 경주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삼국사기』 혁거세 38년)"라고 瓠公이 馬韓王에게 한 말 가운데 나오는 倭人이 꼭 일본열도의 倭人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倭人 기사와 倭國 기사를 분류한 데서 오는 논리적 귀결일뿐이므로 실제로는 호공이 일본열도에서 온 것일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②는 고대의 海 인식이 지금과 달랐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임나는 결코 한반도 내에 있을 수가 없지만, 고대에는 수면이 높아서 바다로 흘러가는 넓은 강 하귀를 바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있는 곳을 한반도 동남부에서 찾는다면 김해와, 부산, 울산이 있다.

③에서 其北岸이라고 한 것은 倭의 북쪽 海岸이라는 의미이므로 狗邪韓國을 김해로 본다면 역시 낙동강 하구를 바다로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④에서 유례왕이 백제와 '一時浮海'하여 倭國을 치겠다고 한 것도 倭國이 김해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설명이 가능하다. 신라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 남동 해안을 따라 김해 지역으로 가는 것을 '浮海'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육지를 통해 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김해를 북동쪽으로 싸고 있는 '海'인 낙동강 하구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②를 인용하여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임나를 김해로 본 연구자들은 적어도 이 부분에는 동의할 것이다.

IV. 맺음말

「신라본기」에서 倭의 표기는 지금까지 여겨져 왔던 것처럼 임의적인 것이 아니며 적절한 기준으로 분류를 할 때 일정한 시기에는 일정한 표현으로만 나타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이는 신라인들이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倭라고 하는 집단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기록에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倭人이라는 표기는 주로 낙동강 하류 동쪽(필자의 관점에서는 任那)에 있는 상태를 의식하는 것 같으며, 倭國이라는 표기는 같은 집단이 낙동강 서쪽까지 점유한 상태를 의식한 표기로 보인다.

필자는 이처럼 시기별로 달라지는 倭 표기 차이를 기준으로 3-4세기 가야 지역이 倭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논의하였는데, 이것은 기존 연구자들이 일본열도의 倭에 의한 가야 지역의 석권이나 가야와 일본열도 倭의 활발한 교류, 개입 차원에서 광개토대왕 비문 倭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신라와 인접하고 있던 任那가 원래부터 신라인들에게는 倭로 인식되었는데 가야 지역이 이들에 의해 석권되면서 낙동강 하류 지역 전체가 倭로 인식된 것으로 필자는 파악하였다. 따라서 「신라본기」에 나오는 1-2세기의 倭人 기사는 任那와의 동일성을, 3-4세기의 倭國 기사는 학계에서 말하는 전기가야 연맹과의 동일성을 의식하면서 읽혀져야 할 것이고, 광개토대왕 비문의 倭도 그 연장선 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以辛卯年來"의 '來'가 바로 앞에 나온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의 '來朝貢'을 줄인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은 倭를 일본열도의 倭로 한정시켜 보는 한 그렇게 볼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倭를 당시 가야 지방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동시에 丁未年 기사의 불분명한 정벌 대상이라고 본다면 來를 來朝貢과 같은 의미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 비문에 나오는 倭의 정체가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필자는 지적하고 싶다.

고대부터 한반도 남부의 倭가 일본열도로 가고 이들이 다시 한반도에 오기도 하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있는 것은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반도를 떠나 터키로 진출하고 역으로 그리스 반도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과 같은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후세에 倭라는 용어가 일본열도에 국한되어 쓰였다고 해서 거기에 얽매여 한반도 안에 倭가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三國史記』에 「天文志」가 공식적으로는 없지만 본기에 흩어져 있는 많은 천문 기사를 모아 「天文志」를 만들 수 있듯이, 「倭本紀」라는 것도 공식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신라본기」를 중심으로 기사를 추출하여 만들 수 있으며, 필자가 이해하는 한 그것은 「任那本紀」나 「加耶本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필자가 보기에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대다수가 「신라본기」의 왜를 일본열도의 왜로 보되, 그 성격을 해적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사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것 같다.(예를 들면, 이종욱 1999: 207)
2 「신라본기」 왜 기사는 소지왕 22년(500)을 마지막으로 문무왕 5년(665) 기사까지 165년 동안 나오지 않는다. 문무왕 이후 왜 기사는 그 실체가 분명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또, 165년 공백 기간에 대해서도 다음 연구로 미루고 다루지 않는다.
3 왜병 침입 訛言 기사에 대한 정확한 실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任那人 蘇那曷叱智가 垂仁 천황한테서 비단을 받아 가다가 신라인에게 강탈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건이 고대 신라와 일본열도 사이에 긴장을 조성시켰을 수 있을 것이다.
4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倭人도 倭王, 倭兵과 함께 倭國의 구성원으로 표기될 수 있겠다. 실제로 364년 기사처럼 倭人과 倭兵이 한 기사 안에 같이 나오는 경우 필자도 불가피하게 그런 관점을 수용하여 倭國 기사로 분류하였고, 대부분 1년에 1개 倭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만, 드물게 233년처럼 같은 해에 倭國 기사와 倭人 기사가 같이 나오는 경우에도 倭國에 중점을 두어 분류하였다. 또 14년, 408년, 459년 기사처럼 倭人 표기가 주체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兵船, 置營, 兵革資粮 등 倭兵을 연상케 하는 말이 같이 나오는 경우도 유형 분류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분류는 倭人으로 표기된다고 해서 국가적 실체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문제가 없다. 신라인들이 倭人과 倭國 표기를 의식적으로 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5 새 분류 기준에 의해 4세기를 중심으로 한 倭國 기사가 시간적으로 외연을 넓혀 더 넓게 분포함으로써, 그 결과 3세기 초에 倭人 기사와 倭國 기사의 접점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분류에서는 이 접점을 떠 올리기가 어렵다.
6 가야 기사와 ‘倭人’으로 표기된 倭 기사는 「신라본기」에서 212년까지는 같이 나오는데, 이는 분명히 같은 시기에 존재한 다른 두 실체이다.
7 다만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있는 關門城 石刻에 “骨고(人+古)南界居七山北界受地一尺”라고 한 것이 관문성 주변의 지명을 이야기 한 것이라면 居七이라는 지명이 현재의 동래 외에 별도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8 필자는 이 지역이 바로 임나가야가 아닌가 생각한다. 『翰苑』「新羅傳」에서 “今訊新羅耆老云: 加羅, 任那昔爲新羅所滅. 其故今竝在國南七八百里.”라고 하여 임나와 가야는 나란히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을 임나로 본 박정아(2003)의 견해는 주목할만하다.
9 백승충은 『晋書』에서 변진, 변한 조목이 따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진한 조목에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신라의 우위를 추정하였다.
10 필자는 표기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여 ‘倭人’이라고 해서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표기이고, ‘倭國’은 국가로 인식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倭國’이 ‘倭人’보다는 더 영향력 있는 실체로 인식한 결과 나온 표기라고 본다.
11 수로왕을 기록과 달리 駕洛九村을 처음으로 통솔한 시조가 아니고 六加耶 연맹 결성 당시의 중시조인 3세기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62: 453-455)
12 이 공백 기간은 김태식(2002: 79)의 분류에 의하면 이른바 전기가야 연맹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가야에 관한 기록은 지구상에 전무하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런데 필자는 바로 이 전기가야 연맹이 「신라본기」에 倭國이라는 표기로 나오며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倭와도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3 『삼국유사』 勿稽子 항목에는 保羅國, 古自國, 史勿國 등 여덟 나라가 공격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勿稽子 열전에서는 이 때 구원한 대상이 阿羅國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신라본기」 기록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당시에 김해가야와 아라가야가 특별히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14 필자는 『일본서기』 「神功紀」에 나오는 神功의 한반도 남부 정벌 기사가 실제로 어떤 사건을 토대로 쓰여졌다면 4세기의 사건이 아니고, 어쩌면 212년과 233년 사이에 초기 김해가야가 단절된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당시 백제왕이 肖古王(166-214)이고 태자는 훗날의 仇首王(214-234)이었다고 나오는데, 「神功紀」에 나오는 肖古王과 왕자 貴須를 반드시 近肖古王(346-375)과 近仇首王(375-384)으로 보아야 할지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본다. 또 일부 연구자의 지명 비정을 따르면 神功의 가야 공격 방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낙동강을 건넌다는 점, 神功의 실제 모델일 가능성이 있는 비미호가 바로 이 시기에 생존했다는 점과 칠지도에 나오는 太和4년을 魏의 泰和4년으로 보면 그 연대는 227년으로 역시 비미호의 생존시기와 겹치는 점도 참고로 기록해 둔다. 한편 『일본서기』「欽明紀」 2년 4월에 “옛날 나의 선조 速古王, 貴首王의 치세에 安羅, 加羅, 卓淳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되어 우호 관계를 두텁게 맺게 되었다. 그래서 子弟로 삼아 항상 도탑게 잘 지내기를 바랐었다”고 한 백제 聖王의 회고는 같은 시대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神功紀」에 나오는 정벌 기사와 180도 다른 우호 기사인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권오영(1995)은 「神功紀」의 가야 정벌은 군사적인 무력 침공이라기보다는 백제를 정점으로 比自? 등 7국이 동맹을 맺거나 통교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는데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라고 본다. 오히려 서로 대립되는 양 기사를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외부의 침공에 의해 가야의 정치적 주체가 바뀌고 난 후, 가야 지역과 백제가 처음으로 사신을 교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15 백제와 신라 사이 기사를 보면 3세기 중후반까지는 전쟁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 286년(책계왕 1년)부터 368년(근초고왕 23년)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인 시기에 해당하는데 어떤 상관 관계를 암시하는지 주목된다.
16 407년의 정벌 대상을 後燕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에 대한 문제점은 많이 지적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기로 한다.
17 연민수(1997: 253)는 沙溝城이 「백제본기」 전지왕13년(417) 조항인 “秋七月, 徵東北二部人, 年十五已上, 築 沙口城, 使兵官佐平 解仇 監役.”에 나오는 沙口城과 동일한 성으로 간주한 바 있다.
18 영락 10년에 고구려가 낙동강 서쪽을 공격했다고 하는 유일한 근거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를 김해에 비정한 것뿐인데, 필자는 낙동강 동쪽 지역을 임나가라로 보고 있음을 앞에서 밝혔다.
19 좌지왕이 道寧 아찬의 딸 福壽을 왕비로 삼은 이후 가야에서 신라 여자를 왕후로 삼기 시작했다는 『화랑세기』 기록은 좌지왕 이후 김해가야가 親신라적이었음을 명백히 말해 준다. 그 이전 가야왕들은 각각 司農卿(이시품왕), 阿躬(거미질왕), 正宗監(마품왕), 泉府卿(거등왕) 등 신라와 무관한 관직을 가진 사람들의 딸을 왕비로 삼는데, 이들 관직은 가야의 고유 관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이시품왕 이전과 좌지왕 이후 왕들의 계보가 서로 이질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20 由는 단독으로 ‘역시’, ‘또한’, ‘여전히’ 라는 부사어로 쓰이고, 여기서는 ‘여전히’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그런 예는 다음과 같다.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舜은 천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명성을) 후대에까지 전할 수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보통 사람을 면할 수 없으니 이것이 걱정이다.) 『맹자』「이루下」
21 “倭以辛卯年來”에서 來는 바로 앞에 나온 來朝貢을 줄인 것으로 보았다. 辛卯年은 광개토대왕 즉위년으로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었지만 倭는 광개토대왕 때 속민이 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문장에 쓰였다고 보았다. 渡海破부터 의미상 주어가 太王으로 바뀌는데, ‘신묘년 이래’라고 새기는 순간 다음 문장의 주어가 太王임이 암시되므로 주어를 생략할 근거가 마련된다고 보았다. 또 渡海破의 목적어들 가운데 倭가 포함되어 倭가 倭를 破할 수 없으므로 渡海破의 주어가 倭가 될 수는 없다. 渡海破 이전의 백잔과 신라를 주어로 하는 문장과 倭를 주어로 하는 문장은 공통적인 구조이다. 주어(百殘, 新羅와 倭) + 속민이 된 시기(舊是屬民과 以辛卯年) + 서술어(來朝貢과 그 줄임인 來). 倭 앞에 붙은 而는 倭가 百殘, 新羅와 복속 시기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22 ‘來’가 ‘來朝貢’의 줄임으로 쓰인 예는 『晋書』「辰韓傳」에 보인다. 武帝 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二年復 來朝貢 ,七年又來 . 백제와 신라 사이 기사를 보면 3세기 중후반까지는 전쟁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 286년(책계왕 1년)부터 368년(근초고왕 23년)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인 시기에 해당하는데 바로 신라에 대해 왜국의 공세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어떤 상관 관계를 암시하는지 주목된다.
23 397년에 백제의 阿莘王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琠支를 볼모로 보냈다는 「백제본기」 기사도 396년에 고구려군에 큰 패배를 당한 후에 다급한 처지였던 백제가 동맹 관계를 굳게 하기 위해 가야 지역에 볼모를 보낸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당시 상황에서 일본열도에 볼모를 보내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琠支는 405년에 귀국하지만 402년에 신라로부터 미사흔을 볼모로 받은 倭國은 407년에 고구려군에 의해 본거지를 상실하고 일본열도로 이동하면서 미사흔도 데리고 갔다는 것도 논리적 귀결의 하나로 타당성 여부와 관계 없이 기록해 둔다.

참고문헌

*표를 붙인 논문들은 필자가 원문을 보지 못하고, 김기섭이 1994년 편역한 『고대한일관계사의 이해 - 倭』이론과실천)에 실린 논문 번역문을 보았고, 본문에서 인용한 쪽도 번역 논문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나타낸다.

1 권오영, 1995,「백제의 성립과 발전」『한국사』6 , 국사편찬위원회 편 : pp. 22-41.
2 김석형, 1966,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
3 김성호,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2000, 푸른숲
4 *旗田巍, 1975, 「『三國史記』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5 김정학, 1987, 「가야의 국가 형성 단계」, 『정신문화연구』 32: pp. 123-139.
6 김태식, 1985,「5세기 후반 대가야의 발전에 대한 연구」『한국사론』12: pp. 35-103.
7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 푸른역사
8 鈴木英夫, 「『三國史記』新羅本紀‘倭人?倭兵’記事の檢討」 『國史學』 101
9 *木下禮仁, 1982, 「五世紀以前の倭關係記事-『三國史記』を中心として」 『倭人傳を讀む』, 森浩一 編, 中公新書.
10 박정아, 2003, 「任那國在蔚山假說考」, 『역사21』
11 박진석, 1996 「호태왕비문 영락 17년조의 정벌 대상에 대하여」 『고구려 호태왕비 연구』 박진석, 아세아문화사: pp. 283-325.
12 백승충, 1989, 「3-4세기 한반도 남부 지방의 제세력 동향」 『부산사학』 19: pp. 29-78.
13 신경철, 1989, 「삼한-삼국-통일신라시대의 부산(고고학적 고찰)」『釜山市史』,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4 안재효, 송계현, 1986, 「고식도질토기에 관한 약간의 考察」 『영남고고학』 1: pp. 17-54.
15 연민수, 1997,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대외관계」, 『삼한의 사회와 문화』, 신서원: pp. 223-264
16 윤석효, 1997,『신편 가야사』혜안.
17 이기동, 1982, 「가야 제국의 흥망」『한국사강좌』 1(고대편), 일조각 : pp. 154-164.
18 이병도, 1962, 「수로왕고」, 『역사학보』 17,18
19 이우태, 1997,「(신라의) 성립과 발전」『한국사』7 , 국사편찬위원회 편 : pp. 27-58.
20 이종욱, 1999,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 소나무
21 *田中俊明, 1982, 「『三國史記』にみえる‘倭’關係記事について」 『歷史公論』 4月, 雄山閣
22 井上秀雄, 1972, 『古代朝鮮』, 日本放送出版協會
23 井上秀雄, 1973, 『任那日本府と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