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 비문의 지명 연구: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 복원 시도

Identification of the Geographic Names on the Epitaph of King Gwanggaeto(廣開土王): An Attemp to Reconstruct the King's Southerly Conquest

최범영 (Choi, Pom-yong)
한국지질자원연구부 지질연구부

요약

광개토왕릉비에는 남정 과정의 攻取城과 사후 守墓人 烟戶를 뽑은 지역이 銘記되어 있다. 지명의 위치 비정은 지리적인 제한이나 지리적인 관계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면 신빙도가 낮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기존의 연구들 은 국어학적인 근거를 확보하지조차 못해 광개토왕릉 비문에 나오는 지명 위치 비정에 큰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능비문에 명기된 두 그룹의 지명 기술순서가 지리적인 정보를 줄 것이라는 가정에 서 접근한 결과 攻取城이 몇 개의 묶음으로 군집화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군집별 지명 비정을 통해 지리적인 분포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추가 지명 비정을 수행하였다. 위치 비정된 지명들 사이에는 공취성 기술순서에서 준하여 선형 배열이 발견되는데 이는 공취성을 공략하여 취한 순서대로 기술하였음을 시사한다. 지리정보 추출작업, 공취성 기술순서의 선형성 등의 발견은 비정되지 못한 지명들과 마멸된 자리의 지명들에 대해 통찰력을 줄 수 있었으며 보다 많은 공취성의 위치 비정에 보다 신빙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연구결과 丙申大遠征에서 광개토왕은 백제와 지근 국경인 에성강선을 뚫지 않고 우회하여 강원도 이천 지역으로 돌파하였으며, 경기, 강원, 충청 일대의 백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완전 포위된 백제가 항복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광개토왕의 공취성에는 경북 동해안의 신라의 지역까지 포함되는데 병신대원정의 목적이 외형적인 명분보다는 영토확장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어

고구려, 광개토왕, 광개토왕릉 비문, 광개토왕비, 남정, 지명

목차

  I.   머리말
  II.  능비문 지명자료처리를 위한 선결문제
       1. 지명의 구조
       2. 탁본에 따른 비문 해독상의 문제
       3. 誤字 문제
       4. 고대시대 기본 행정단위와 능비문의 지명이 갖는 의미
       5. 광개토왕의 병신대원정 직전 백제와 신라의 영역
       6. 고대 지명표기에 대한 약술
  III. 攻取城의 위치 비정
       1. 기술순서가 갖는 정보와 지명 군집화
       2. 지명 군집들의 위치 분포추정
       3. 군집 위치를 고려한 추가 지명 비정
  IV.  攻取城의 지리 분석
       1. 攻取城의 기술순서와 지명들의 지리적인 관계
       2. 攻取城의 기술순서가 갖는 의미
       3. 나머지 攻取城의 위치 비정과 마멸된 자리의 공취성 찾기
       4. 공취성 기술순서대로 따라가기
  V.   守墓人 烟戶의 징발지의 분포와 의미
  VI.  토론 및 결론
       1. 攻取城 기술순서의 의미
       2.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
       3. 묘지기 분포와 5세기 초 고구려의 영역
       4. 강원도 지역의 靺鞨의 성격
       5. 광개토왕의 남정 이유
  
  참고문헌

I. 머리말

광개토왕릉 비문(앞으로 능비문으로 부른다)은 광개토왕 생전의 업적과 고구려인의 천하관을 기술한 기념비(勳績碑)로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능비문에는 많은 지명들이 포함되는데 지명은 영토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영역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가능케 한다. 지명 자체는 역사학적인 또는 정치적인 속성보다는 언어학적인, 지리학적인 속성을 보다 갖고 있어 이에 대한 적합한 연구를 통해서만이 능비문에 나타난 지명의 의미와 지명을 통해 본 이 시기의 고구려 영역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대한 관심은 많은 경우 왜와의 관계에 집중되었고, 일부의 자구해석이 비문 전체 해석인양 치부되어 중요한 단서가 될 나머지 부분들이 도외시되곤 했다. 지명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위치 비정 시도가 있어 왔으나(酒井改造, 1954; 朴性鳳, 1979; 金聖昊, 1982), 장세경과 최병선(1997)이 지적했듯이 '상당수의 지명 비정이 국어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며, 판단하기 어려운 항목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들도 많았음'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국어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신뢰도 높은 지명의 위치 비정이 요구되고 있다. 廣開土王은 18세에 임금자리에 올라 39세에 돌아갔으며 (413년 癸丑 10월 겨울, 21년간 재위), 일년후(414년 9월 29일) 능침에 안장되었다. 永樂太王은 서기 396년, 百殘(百濟)을 응징하기 위해 백제를 공략하는데(丙申大遠征), 능비문에는 이 과정을 밝혀 주는 58개의 攻取城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왕 사후에는 광개토왕릉의 묘지기(守墓人 煙戶)로 國煙과 看煙을 뽑았으며, 능비문은 이들을 명기하는 역할로도 세워졌다.

광개토왕릉 비문의 지명은 고구려어 아닌 언어일 수 있다. 지명의 보수성을 고려한다면 지명은 토착민의 언어일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 高句麗語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인정되는 때에만 한정하며, 그 밖의 경우에는 古代語라고 부르기로 하거나 'OO계 지명표기' 따위로 지칭하겠다. '古代國語'라는 말은 현대국어의 모태라는 언어대중의 의식을 반영한 용어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 나라가 다르면 언어도 다를 것이라는 언어대중의 의식을 반영한 용어가 高句麗語, 百濟語, 新羅語이다(Chambers and Trudgill, 1980). 반면, '古代語'는 '우리나라에서 고대에 쓰이던 말'이라는 정도의 가치만 부여되며 이 글에서 다루는 지명의 언어는 高句麗語가 아닌 先住人인 馬韓人의 언어일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는 고구려의 영역에 있어 큰 변화를 보인 광개토왕 시대를 반영한 능비문의 지명을 다룸으로써 앞서 제기된 고구려 영역변화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논문은 최범영(2000)에서 같은 주제의 내용을 다루었으나, 국어학적/언어학적 논증과 논리적 흐름이 미흡하여 이를 수정, 보완하여 발표한다. 지명의 위치 비정 과정에서 언어학적인 논증을 심화시키고 역사학적인, 지리학적인 논의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 복원을 위한 시도를 하기로 하겠다.

II. 능비문 지명자료처리를 위한 선결문제

1. 지명의 구조

지명은 언어요소, 지리요소, 행정단위 따위로 이루어진다. 첫째, 언어요소에 있어서 지명은 토착어(방언 포함)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우 보수성을 띤다. 그러한 까닭에 지명을 바꾸어 표기가 달라져도 같은 소리값을 나타내는 수가 많다. 두 번째로 지명은 지리정보를 포함한다. 같은 음성의 지명이 여럿 있을 수 있으나 위치 지사자가 없으면 지명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셋째로 시대에 따라 지명은 행정단위가 바뀌어 현의 이름이었다가 군의 이름이었다가 또는 시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땅이름이 겪어 온 가장 큰 발자취는 한자말로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언어요소로 '까치'와 '내'가 개천의 이름으로 쓰이다가(까치내) 마을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마을 이름으로 쓰이는 단계는 지리요소가 덧대어진 것이다. 까치내가 面의 이름이 되면서 작천면(鵲川面)이라는 행정단위가 탄생한다. 행정단위로 되면서 땅이름은 한자로 적는 경우가 태반이고, 본디 무슨 지명이었는지 알 길이 없도록 짓는 경우도 있다.

가. 오이내 = ① 오이(瓜)-내(川)(개천 이름) => ② 외내(마을 이름) => ③ 外川里
나. 은골 = ① 은(銀?)-골(谷)(골짜기 이름) => ② 은골(마을 이름) => ③ 銀谷里, 魚隱洞

그럼에도 땅이름의 보수성은 대단하다. 경남 밀양시는 신라시대에는 추화군(推火郡), 경덕왕이 고쳐 밀성군(密城郡)으로 바꾸었으며 밀양(密陽)에 이르렀다. 밀양의 고지명 복원에 있어서 이기문(1961)은 '밀블'로, 이병도는 삼국사기 주해에서 '밀(ㅂ+아래아+ㄹ)'로 틀 잡기도 하였으나 '미리벌 신용협동조합', '미리벌 민속박물관' 따위 이름에서 보듯이 원래의 명칭이 여태까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미리벌(密城)은 ① 미리(推)-벌(火, 原)로, 들판 이름(또는 나라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대와 행정단위가 바뀌면서 ② 密城郡, ③ 密陽郡/密陽邑, ④ 密陽市(1989년)로 되었다.

고구려 지명의 기본 단위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따르면 성(城)과 촌(村)이다(於是得五十八, 七百; 凡所攻破 六十四, 一千四百). 성은 행정구조를 위해 형태를 갖춘 것이고 촌은 생산업을 담당하는 요소로 생각된다. 성은 방어체계이면서 행정단위의 규모에 따라 군도 되고 현도 되었던 것이다. 村은 이러한 방어체계나 행정체계에 속하는 단위가 아니라 자연 부락이었을 것이고 성은 이를 관리, 감독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2. 탁본에 따른 비문 해독상의 문제

廣開土王陵 碑文 연구는 현재 여러 본의 탁본과 釋文 결과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어느 것이 원래의 상태에 근접하는가 하는 문제는 비문연구가들 사이에서 매우 첨예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비교적 탁본의 정밀성이 높다는 周雲台본조차 비교적 오래 전의 것에서 나타나지 않는 글자들이 나타난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며, 원석 탁본에 바탕을 두고 다른 탁본들을 참고로 하여 釋文을 내는 일이 첫째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저자는 첫째 周雲台탁본을 바탕으로 王健群(1984)의 석문상의 오류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원석 탁본과 비교를 통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였다.

58번째의 공취성인 백제도성을 제외한 나머지 공취성과 수묘인을 뽑은 성을 각각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攻取城]

1 壹八城, 2 臼模盧城, 3 若模盧城, 4 幹저利城, 5 口口城, 6 閣彌城, 7 牟盧城, 8 彌沙城, 9 古舍조城, 10 阿旦城, 11 古利城, 12 口利城, 13 雜珍城, 14 奧利城, 15 勾牟城, 16 古模耶羅城, 17 須鄒城, 18 口口城, 19 口而耶羅城, 20 전城, 21 於利城, 22 口口口, 23 豆奴城, 24 沸城, 25 比利城, 26 彌鄒城, 27 也利城, 28 大山韓城, 29 掃加城, 30 敦拔城, 31-32 口口口城, 33 婁賣城, 34 散那城, 35 那婁城, 36 細城, 37 牟婁城, 38 于婁城, 39 蘇炎城, 40 燕婁城, 41 析支利城, 42 巖門암[1]城, 43 林城, 44-47 口口口口口口口利城, 48 就鄒城, 49 口拔城, 50 古牟婁城, 51 閏奴城, 52 貫奴城, 53 삼穰城, 54 曾拔城, 55 宗古婁城, 56 仇天城, 57 口口口.

[守墓人 烟戶]

(1) 賣勾余民, (2) 東海賈, (3) 敦城民, (4) 于城, (5) 碑利城, (6) 平穰城民, (7) 此連, (8) 俳婁人, (9) 梁谷, (10) 梁城, (11) 安夫連, (12) 改谷, (13) 新城, (14) 南蘇城.

新來韓穢: (15) 沙水城, (16) 牟婁城, (17) 豆比押岑韓, (18) 句牟客頭, (19) 求底韓, (20) 舍조城韓穢, (21) 古模耶羅城, (22) 炅古城, (23) 客賢韓, (24) 阿旦城, (25) 雜珍城, (26) 巴奴城韓, (27) 臼模盧城, (28) 若模盧城, (29) 牟水城, (30) 幹저利城, (31) 彌鄒城, (32) 也利城, (33) 豆奴城, (34) 奧利城, (35) 須鄒城, (36) 百殘南居韓, (37) 大山韓城, (38) 農賣城, (39) 閏奴城, (40) 古牟婁城, (41) 전城, (42) 味城, (43) 就咨城, (44) 삼穰城, (45) 散那城, (46) 那旦城, (47) 勾牟城, (48) 於利城, (49) 比利城, (50) 細城.

3. 誤字 문제

廣開土王陵 碑文의 서체는 草書體를 隸書體로 바꾼 서체로 알려졌다. 그 예로 '開'라는 글자체를 보기로 들어왔다. 지명의 대비를 통해 보면 여러 글자가 誤字이거나 관습적으로 쓰는 글자(常用體字)일 것으로 보이는 글자들이 있다. 33번째 攻取城인 婁賣城은 38째 守墓人 城인 農賣城에, 35째 攻取城인 那婁城은 46째 守墓人 城인 那旦城과 같은 성일 것으로 짐작된다. 62번째 攻取城인 婁城에 있어서도 '婁'가 고구려어 표기에서 대개 음성표기에 주로 쓰인다는 점에서 보면 어두의 제약(두음법칙)으로 인해 'ㄹ-'로 시작하는 단어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며 비슷한 글자의 誤字로 추측된다. '婁'가 빈번하게 쓰인 사정에서 무의식적인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婁'자의 상용화로 빚어진 오류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16째 守墓人 城에서 牟盧城을 牟婁城으로 쓴 듯하다. 48째의 就鄒城은 守墓人을 뽑은 성의 就咨城과 동일한 지명으로 보이는데 표기상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 표기에서 '壤'이 다수 쓰이는데 비해 능 비문에서는 '穰'이 쓰인다. 53째 攻取城이면서 여섯째 守墓人 城인 平穰과 44째 守墓人 城인 삼穰城에서와 같이 壤 대신 穰이 쓰이고 있다. 三國史記 地理誌에서 물(水)과 관련된 지명이 '買'로 쓰인 반면, 이에 배당되는 글자로 능비문에서는 '賣'가 쓰였다. 20번째 攻取城이면서 41번째 守墓人 城인 전城은 삼국사기에 쓰인 글자의 사용빈도로 보아 椽城의 잘못일 것으로 짐작된다.

서체상 셋째 공취성인 若模盧城은 各模盧城으로도 해독하기도 하나, 첫 글자의 아래 부분이 右임이 분명하여 艸변에 쓰인 若으로 보았다. 39째의 공취성 蘇炎城의 가운데 글자는 보기에 따라서 灰, 炭, 赤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불분명하다. 11째 守墓人城인 安夫連의 가운데 글자는 失로 읽기도 한다. 20째 수묘인성의 舍조城은 아홉째 공취성인 古舍조城으로 보이며 '古'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4. 고대시대 기본 행정단위와 능비문의 지명이 갖는 의미

능비문에는 병신년(서기 396년) 대원정 결과 58 城, 村 700을 차지했으며(於是得五十八城, 村七百), 광개토대왕 평생에 城64, 村 1400을 부쉈다고 하였다(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삼국의 핵심적인 지방행정 요소가 城과 村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三國史記 地理誌에 삼국의 지방행정단위가 州, 郡, 縣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城의 행정기능에 따라 州, 郡, 縣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城은 山城 또는 邑城 體系였고 村은 自然 部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방 행정체계는 城이 유형의 형태임을 내비치며 지명의 위치 비정에 있어 三國史記 地理誌에 나타난 지명과 廣開土大王陵 비문에 나타난 지명을 대비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은 후대의 기록으로 攻取城 또는 守墓人 城의 수보다 많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부분 집합인 攻取城 또는 守墓人 城을 삼국사기 지리지에 적힌 지명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상정된다.

이전의 연구에서는 유래가 밝혀지지 않는 현재의 지명과 攻取城을 대비시키기도 하였으나 그에 적합한 고대시대의 城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파다하여 지명 비정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5. 광개토왕의 병신대원정 직전 백제와 신라의 영역

앞으로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나타난 공취성의 지명을 비정하기 위해서는 병신대원정(서기 396년) 직전의 삼국의 영역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의 '丙申大遠征' 당시 百濟는 이미 水谷城(新溪), 關彌城(喬桐島) [2] 을 고구려에 빼앗겼다(392-394년). 浿水에서 저항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百濟 땅은 馬息嶺 산맥 남동쪽, 禮成江남쪽에 한정된다. <그림 1a>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나타난 지명과 관련 기사의 연대를 고려하여 등장하는 지명들로 엮은 최소한의 백제와 신라의 영역으로 3세기초부터 고착된 영역의 현황을 보여준다. <그림 1b>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삼국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경북 동해안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림 1. 두 시점에서 삼국의 영역.
(a) 광개토대왕의 남정 직전의 백제와 신라의 3세기초-4세기말의 영역.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기사로부터 관련 지명(검은 점)을 도시하여 그 분포로 추정함.
(b)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삼국의 경계. 경북 동해안 지방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술된 삼국의 영역은 어느 시대를 반영할까 하는 문제를 짚어 보겠다. 지명에는 고구려 22대 安藏王(서기 519년에서 531년까지 재위)의 활약을 적은 것이 발견된다. 지리지 권 37에는 王逢縣(幸州)과 達乙省縣(高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① 一云皆伯.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이곳은 개백이라고도 한다.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은 곳으로 王逢이라고 부른다).

② 漢氏美女, 於高山頭點烽火, 迎安臧王之處, 故後名高烽(이곳은 한씨 미녀가 높은 산머리에서 봉화 불을 올려 안장왕을 맞은 곳으로, 뒤에 이름이 고봉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권37에서 고구려계 지명과 관련된 일화를 적은 것은 아마도 위의 安藏王과 漢氏美女의 일화가 유일하다. 고구려의 최대영역인 시대를 반전시킨 사람은 신라의 진흥왕(서기 540년에서 576년까지 재위)이라 할 수 있으며, 북진정책의 결과 북한산비 (561-568년 사이 건립?), 마운령비(太昌元年, 568년에 건립), 황초령비(癸未, 563년에 건립) 등의 순수비 건립한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안장왕의 일화와 진흥왕 순수비 건립 연대로 보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삼국의 영역은 6세기 초엽에서 중엽 사이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명기한 삼국의 영역은 광개토왕 사후 안장왕대(?) 또는 그 이후까지의 고구려 최대영역이며 광개토왕(서기 391년에서 412년까지 재위)의 남진정책 이후 결과가 많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백제의 동북부, 신라의 북부에는 오랫동안 정체가 확인되지 않는 靺鞨이 있었다(<그림 1a>). 광개토왕과 동시대인 백제의 辰斯王때나 신라의 奈勿尼師今 때에도 이들과 몇 차례의 접촉이 있었음이 기록되고 있다 [3].

6. 고대 지명표기에 대한 약술

앞으로 다루게 될 능비문의 지명 비정에 앞서 지명표기에 자주 설명이 필요한 고대어 단어와 고대 지명의 표기 방식, 한자음 따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城='구루-골-고-기, 부리-벌', 忽과 兮의 한자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城을 나타내는 말은 고구려계에서 忽(골), 火(벌), 백제계에서는 屈(굴/골), 忽(골), 阿(고), 己(기) [4], 夫里(부리) 따위, 신라계 지명에서는 火(벌), 支(기) [5] 따위로 다양하며 언어지리학적인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에는 '溝루者 句麗名城也.'라 하였다. 城은 溝루(구루/고루/골)로도 쓰였던 것이다. 口(또는 串)를 표기하기 위해 忽次, 古次로 교체된다. 忽의 한자음이 [고] - [골]이었음을 보여준다.

강원도 淮陽은 고구려때 各連, 客連, 加兮牙로 교체 표기되었다(連城郡, 本高句麗各[一作客.]連城郡, 景德王改名, 今交州. 領縣三; 客連郡 客一作各. 一云加兮牙). 牙의 고구려계 지명표기에서 한자음이 [야]였기 때문에(長淺城縣 一云 耶耶 一云 夜牙), 各連나 客連의 東音 '각연/객연'에 비추어 보면 加兮牙는 '가기야'로 읽혔을 것이다. 連이 '-ㄴ'으로 끝나는 것은 뒤에 오는 말이 '-골' 따위 말과의 사이에서 기생음이 끼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가기야골'에서 '각얀골/가걍골/가기양골'로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加兮牙가 各連이나 客連보다 오래된 표기임을 시사하며 [6], 兮의 한자음은 [기]로 추정된다. 忽의 中古音은 xuet으로(Karlgren, 1954), 東音이 [ㅎ-]로 시작되는 한자는 고대 한자음이 [ㄱ-]임을 뜻하며, 중국한자음의 上古音이나 中古音과 같은 형태임을 시사한다.

國=불

國內城은 '尉耶巖城/尉那암城' 또는 '不而城/不耐'라고도 하였다. 國이 不과 대응되고 있으며, 忠州가 朱乙省 또는 國原城이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國='불'쯤이었을 것으로 보인 다. 마한어 夫里, 卑離, 만주-여진어 guru-n(<*buru-n), 몽골어 ulus(<*hulu-s<*bulu-s) 따위가 이에 대비될 것으로 본다.

水=川=買

지명요소로 자주 쓰이는 글자가 물(水)과 관련된 말이다. 水는 川과 잦은 교체를 보이며 둘은 買 또는 勿로도 쓰였다. 邑, 村으로 쓰이던 지명 중에는 水로 대치된 경우도 있다. 현재 자료만으로는 어찌 읽혔는지 불분명하나 다른 교체 예에는 武(무), 宗((ㅁ+아래아)(ㄹ+아래아)) 따위로 바뀐 것으로 보면 '무-물/몰-(ㅁ+아래아)(ㄹ+아래아)'의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말로 보인다. 광개토왕릉 비문의 臼模盧城, 若模盧城, 古牟婁城 따위의 지명(農賣城도 포함)은 '-모로'형의 지명으로, '模盧'는 물(水)의 고대어형으로 생각되며, 중세국어 믈, 현대국어 물, 몽골어 mören, 거란어 müren/ moron 木連, 여진어 mu 沒, 일본어 mizu 따위가 비교될 수 있으며 語末에 '-n'이 오는 몽골어나 거란어와 달리 고구려어는 중세국어, 현대국어, 여진어, 일본어처럼 어말에 '-n'이 오지 않는 언어 계열에 속하는 듯하다.

壤=노

壤과 교체 표기되는 한자에 있어 삼국사기 지리지 권35와 37 사이에 특이한 차이가 보인다(<표 1>). 壤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35권에는 奴로, 37권에서는 內, 奴, 弩 [7], 惱라 하였다. 특히 37권에서는 內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奴의 초서체를 잘못 읽어 內로 쓴 듯이 보인다. 백제 때 奴斯只였던 儒城은 文武王대 기사에는 內斯只로도 쓰였다. 이 또한 奴의 초서체를 잘못 읽어 內로 읽은 듯하다. 결론적으로 壤의 새김은 '노'였다고 할 수 있다.

  高句麗地名(37권) 高句麗地名(35권) 景德王 改名
1 今勿內/萬弩 今勿奴 黑壤
2 仍伐奴 仍伐奴 穀壤
3 骨衣內 骨衣奴 荒壤
4 於斯內/斧壤 斧壤 廣平
5 休壤/金惱 休壤 金壤
<표 1> 壤의 표기 비교.

獐=古斯=여(ㅿ+ㅡ), 古=여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계 지명 중 古斯也忽次는 두 곳의 지명(경기도 안산과 임진 나루)에 쓰였다.

① 獐口郡, 本高句麗 獐項口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 獐項口縣 一云古斯也忽次.
② 臨江縣, 本高句麗 獐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獐項縣 一云古斯也忽次.

한약재인 薺 (현대국어로 '모시대')는 중세국어에서 '(여+ㅿ)의 갗'이었는데 [8] 鄕藥救急方에서는 獐矣加次 [9] 로, 훈민정음에는 狐皮로 표기되었다. 中世國語 '여(ㅿ+ㅡ)'는 조선조이전까지 '노루'(獐)를 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古斯'는 '여(ㅿ+ㅡ)'와 관련되는 표기이고, 古의 새김은 후기중세국어 '녜'가 아닌 '여'였다.

斯의 한자음과 穴과 岳/嶽의 새김

지명표기에서 '斯'는 자주 쓰이는 한자 중의 하나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斯'는 'ㅿ-(ㅿ+ㅡ)'를 표기하기도 하며 한자음에서 'ㅅ-시-소-수' 따위 넓은 모음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신라의 국호는 徐耶伐, 斯羅, 斯盧, 新羅, 尸羅 등 갖가지인데 뒤의 네 가지 표기는 거의 같은 음을 표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어 표기의 특징 중에 중복표기가 있다. '시리'를 표기하기 위해 辛이(=泉)로 '수리'를 표기하는데 述이/首泥(=峰)로 쓰였다. 이러한 중복 표기 관점 [10] 에서 新羅는 '시라'를 전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尸羅와 동일한 소리 값을 갖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斯羅와 斯盧는 각각 '시라', '시로'를 표기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斯의 한자음은 [시]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後期中世國語에서는 '-ㄹ, -ㅿ, -ㅣ'로 끝나는 말 뒤에서 'ㄱ'이 'ㅇ'으로 바뀌는 음운 규칙이 있었다(李基文, 1977). 예) 말-(勿)+-고 => 말오. (ㅎ+아래아+ㅣ)-(白)+-고 => (ㅎ+아래아+ㅣ)오. 이를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ㄹ┐
ㄱ => ㅇ / │ ㅿ │ -----------
└ ㅣ ┘

고구려지명 표기에서는 '갑'(嶽, 穴)으로 나타나야 할 자리에 경우에 따라서는 [압]으로 바뀌었다.

① 松岳= 보소갑 扶蘇岬( 보소+갑)
② 窮嶽 = 아돌압 阿珍押( 아돌+갑)
③ 唐嶽 = 가벌압 加火押( 가벌+갑)
④ 心岳 = 걸압 居尸押( 걸+갑)
⑤ 朽岳城 = 골압 骨尸押 ( 골+갑)
⑥ 牙岳城 = 가일압골 皆尸押忽( 가일+갑+골)
⑦ 雉嶽城 = 도랍 刀臘( 돌+갑)
⑧ 穴城 = 갑골 甲忽( 갑+골)
⑨ 猪守穴 = (도+ㅿ)압 鳥斯押((도+ㅿ)/도(ㅿ+ㅡ)+갑)

후기중세국어에서 적용되는 음운규칙과 유사한 음운규칙이 고구려계 지명 표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규칙이 중세국어 음운규칙과 같은 것이라면 斯는 'ㅿ' 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다음과 같이 중세국어 음운규칙과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 ㄹ┐
갑 => 압 /   -----------
└ ㅿ ┘

위의 ⑦의 경우를 제외하면 중세국어에서처럼 연음(liaison)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李基文(1977)은 후기중세국어에서 'ㄱ'에서 변화한 'ㅇ'이 [유성음 h]의 음가를 가져 연음이 안 되도록 경계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

고대어에서 '아래아'의 존재 일본 역사서에서 公州는 kumanari 久麻那利와 kumanori 久麻弩利로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 권 35에 따르면 熊州는 백제 옛 서울로 신라 신문왕이 熊川州로 고쳤고 경덕왕이 熊州로 다시 고쳤으며 편찬당시 分州(公州의 잘못)라고 한다. 권 37에는 熊川州를 熊津이라고도 한다. 중세국어에서 熊津은 '고마(ㄴ+아래아)(ㄹ+아래아)'라 하였으며 지금의 '곰나루'로 이어진다.

향가에서 川里로 표기된 점으로 보아 '내'(川)의 고대어형은 '나리'로 재구성된다(金完鎭, 1980). 熊川(州)는 '고마나리'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역사서는 '나리'가 '노리'로도 발음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熊川이 '고마나리'가 아닌 '고마(ㄴ+아래아)리'였고 고대시대에도 '아래아'가 음운체계에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한편 고마(ㄴ+아래아)(ㄹ+아래아)'(熊津)와 '고마나리'(熊川)의 혼효 현상(blending)으로 '고마(ㄴ+아래아)리'라는 형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구개음화와 日, 熱의 한자음

중세한자음에서 智=知=[디]였고 至=[지]였다. 智證麻立干이 智=[디]로 시작되는 휘를 갖고 있으나 냉수리비에서 至都盧로 한자음이 [지]인 至가 쓰였다. 삼국사기의 比助夫는 신라비문에서 比次夫 또는 比知夫로도 쓰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 比枝輩로 표기되어 있다. 知와 枝는 중세한자음에서 각각 [디]와 [지]였다. 知의 한자음은 신라시대에는 [지]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智證麻立干이 '디OO' 또는 '지OO'로 불릴 가능성보다는 신라어에 구개음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新羅 지명에서 日谿縣은 본디 熱兮縣으로 泥兮라고도 했다. 후기중세국어시대 한자음에서 '日'은 '(ㅿ+ㅢ+ㄹ)', '熱'은 '(ㅿ+ㅕ+ㄹ)'였고 泥의 새김은 '즐-'이었다. 삼국유사 2권 기이 만파식적조에는 金春質을 春日로 교체 표기한 예로 보면 신라어 음운체계에는 음소 /z/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어에서 '日'과 '熱'의 한자음은 [질], 泥의 새김도 '질'이라는 결론이다. 앞서 말했듯이 峰은 述 로도 쓰였다. 述의 한자음이 '-t'형 한자였다면 중복표기로 述 대신에 述恥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ㄹ'형 한자이기 때문에 述 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日'과 '熱', '述'은 '-ㄹ'형 한자로, 중국의 上古音에서 '-t'형 한자(日, 熱, 述)는 우리나라 고대한자음이 중국 상고음과 달리 '-ㄹ'형 한자였음을 의미한다.

중세국어에서 '딜'(缶)과 '디르-'(臨)는 신라어에서 모두 '질'(泥, 臨)에 대비된다(예, 臨 郡, 本切也 [11] 火郡). 신라어에서의 구개음화 존재를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百濟 지명에서 尼山縣은 본래 熱也山縣이었다고 하는데 尼는 泥의 잘못이라면 충남지역에도 구개음화가 일어나던 언어권(또는 방언권)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울말에서 구개음화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바뀌는 시점에 들어서서 일어나기 시작했다(李基文, 1977). 반면, 남부지역 방언에서는 고대시대 이미 구개음화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若=소

春川은 고대 시대에 首次若이었고 鳥根乃로도 표기되었다. 若의 한자음(上古音;*niak, 中古音; *nziak, 관화음; zo; Karlgren, 1954)과 乃의 후기중세국어 새김이 '사/(ㅿ+ㅏ)'임을 참조할 때 若의 한자음은 상고음이나 중고음과는 거리가 멀고 받침 없는 한자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계 지명인 若只頭恥縣은 朔頭, 衣頭로도 쓰였는데 '소기마티-소마티'쯤을 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so(衣)를 고려하면「若 = 朔 = 소」일 때 위 세 표기는 같은 계열의 표기로 인정된다. 若의 한자음은 '-ㄱ'이 상실된 [소]로 북경 관화음(Mandarin)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12]. 東音이나 중국 남방계 한자음 [13] 과 다른 고구려계 지명표기에 쓰인 한자음의 일면이다.

巖/峴, 波와 押의 표기내용

중세국어 '바회'(巖)와 현대국어 '바위/바우/바구/방구'(巖)에 해당하는 말은 고대지명 표기에서 '巴衣', '波衣'로 표기되었다.

① 孔巖縣, 本高句麗濟次巴衣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② 偏 縣, 本高句麗平珍峴縣, 景德王改名, 今雲巖縣; 平珍峴縣一云平珍波衣.
③ 靈巖郡, 本百濟月奈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④ 城 一云租波衣, 一云 巖郡.

'波衣'는 '巖'뿐만 아니라 '峴'을 표기도 하며, '峴'은 아울러 '波兮'로도 쓰였다.

① 夫斯波衣縣 一云仇史峴.
② 三峴縣 一云密波兮.
③ 文峴縣 一云斤尸波兮.
④ 猪 峴縣 一云烏生波衣, 一云猪守.
⑤ 平珍峴縣 一云平珍波衣.

위의 보기들에서 巴衣나 波衣, 波兮는 각각 '보의', '바의', '바기'를 표기한다고 판단된다. 반면 고구려계 지명표기에서 押은 波衣로 교체되었고(平淮押縣 一云 別史波衣), 신라 지명 표기에서는 獐과 교체되었다(獐山郡 祗味王時 伐取 押梁(一作 督)小國, 置郡. 景德王 改名 今 章山郡 領縣三). 押, 波, 獐은 각각 現代國語로「누르-, 놀, 노루」에 해당되며 古代語에서 波衣는 '노리' 쯤으로 재구성된다. 이처럼 '波'는 '놀'이라는 현대국어처럼 音讀이 아닌 釋讀字로도 쓰인다. 또 다른 예로 평해는 고구려 때 波且(波旦의 잘못으로 보인다) 또는 波豊으로 불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斤乙於, 箕城으로도 불렸다. 중세국어에서 '斤=ㄴ'임에 비추어 두 계열의 표기가 동일한 것이려면 波旦과 斤乙於은 각각 '노리돌', '놀돌'(또는 '(ㄴ+아래아+ㄹ)돌')로 해석할 때 가능하다.

III. 攻取城의 위치 비정

1. 기술순서가 갖는 정보와 지명 군집화

현재 우리나라 지명 중에 '까치골'이라는 곳은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지명의 음성만으로 위치를 비정하는 일은 암중모색만큼 유의미한 작업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다행히 광개토왕릉 비문에는 공취성과 수묘인 연호를 뽑은 지역을 銘記하고 있다. 이 두 그룹의 자료에서 어떤 지리적인 특성을 끌어낼 수 있다면 지명의 위치 비정은 보다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서술상 지명 나열은 지리적인 원근에 대한 것이 포함될 것임이 선험적으로 인식된다. 廣開土王陵 碑文의 지명 서술에서도 이러한 필법이 있을 것으로 가정된다. 능비문에는 '攻取城'과 '守墓人 烟戶를 뽑은 성' 두 편의 기술이 있다. 廣開土王陵 묘지기는 대왕이 직접 攻取한 城民들과 舊民들의 성중 각각 220 戶와 110 戶를 뽑아 구성하였다. 능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를 銘記하고 있다.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煙戶差錯. 唯國崗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入碑, 銘記煙戶, 不令差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윗대 할아버지와 선왕 때부터 묘 위에 돌비를 세우지 않아 묘지기 관리에 잘못이 있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만이 할아버지 아버지 왕 묘 위에 비를 세워 묘지기를 새겨 놓아 잘못이 없게 하였다. 또 묘지기제도를 만드는 바, 이제부터는 돌려 팔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제멋대로 사고 팔 수 없으며, 그를 어길 때에는 판 이를 벌주고, 산 이를 묘지기로 만들 것이다).

능 비문을 세운 이유 중에 하나가 守墓人 烟戶를 銘記하는 일이었다. 先驗的으로 '이웃하여 기술된 지명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것'으로 가정된다. 묘지기(煙戶) 선발지역 순서 또한 이러한 지리적인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공취성과 수묘인 연호성의 두 그룹의 지명자료가 갖는 지리적 위치 정보는 보다 신뢰도가 높은 정보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명들을 기술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攻取城 기술순서와 煙戶城 기술순서를 비교하면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다(<표 3>도 볼 것).

<표 2> 攻取城과 守墓人 烟戶 선발지역의 기술순서 비교.
攻取城순서 攻取城 煙戶순서 비 고
1 壹八城    
2 臼模盧城 27  
3 若模盧城 28 各模盧城
4 幹저利城 30  
5 口口城 (29) (牟水城?)
6 閣彌城    
7 牟盧城 (16?) (牟婁城)
8 彌沙城 15 沙水城
9 古舍조城 20 舍조城
10 阿旦城 24  
11 古利城    
12 口利城    
13 雜珍城 25  
14 奧利城 34  
15 勾牟城 47  
16 古模耶羅城 21  
17 須鄒城 35  
18 口口城 (26) (巴奴城?)
19 口而耶羅城    
20 椽城 41 전城
21 於利城 48 [於利城]
22 口口口 (22) (炅古城?)
23 豆奴城 33 [豆奴城]
24 沸城    
25 比利城 49  
26 彌鄒城 31  
27 也利城 32  
28 大山韓城 37  
29 掃加城    
30 敦拔城    
31 口口 (42) (味城?)
32 口口    
33 婁賣城 38 農賣城
34 散那城 45  
35 那婁城 46 那旦城
36 細城 50  
37 牟婁城 (16?) (牟婁城)
38 于婁城    
39 蘇赤城   蘇炭城
40 燕婁城    
41 析支利城    
42 巖門암城    
43 林城    
44 口口    
45 口口    
46 口口    
47 口利城    
48 就鄒城 43 就咨城
49 口拔城    
50 古牟婁城 40  
51 閏奴城 39  
52 貫奴城    
53 삼穰城 44  
54 曾拔城    
55 宗古盧城    
56 仇天城    
57 口口口    
58 (百濟國城)    

<표 2>는 攻取城과 守墓人 烟戶를 각각 기술한 순서가 비슷하게 군집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 순서가 지명간 지리적인 거리관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면 37째 攻取城인 牟婁城은 16째 守墓人 烟戶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쯤에 기술된 공취성 군집(33-37)의 해당 수묘인 연호 기술순서(38∼50)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앞서 기술순서가 지리적 관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보면 수묘인 연호인 牟婁城은 일곱째 攻取城인 牟盧城일 가능성이 있다. 여덟째 공취성인 彌沙城과 15째 수묘인성인 沙水城은 두 군집에서 대비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이 논문에서는 두 지명이 서로 같은 지명일 것으로 상정하였다.

守墓人 烟戶城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攻取城에 나타나지 않는 煙戶城은 牟水城, 炅古城, 巴奴城, 味城 등이 있다. 앞서 우리가 세운 가정이 '참'에 가깝다면 攻取城에 나타나지 않고 守墓人城으로만 나타나는 성들은 <표 2>에 나타낸 바와 같이 마멸된 자리의 성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후술 참조).

攻取城과 연호를 뽑은 성의 순서를 비교하여 구한 주요 군집은 다음과 같다(숫자는 기술 순서로 攻取城順/煙戶順이며, 괄호 안은 해당군집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攻取城임).

[1군]
2/27 臼模盧城, 3/28 若模盧城, 4/30 幹저利城, 7/(16?) 牟盧城(1 壹八城, 6 閣彌城).
[2군]
8/15 彌沙城/沙水城, 9/20 古舍조城/舍조城, 10/24 阿旦城, 13/25 雜珍城, 16/21 古模耶羅城(11 古利城, 12 口利城, 14/34 奧利城, 15/47 勾牟城, 17/35 須鄒城).
[3군]
20/41 椽城/ 전城, 21/48 於利城, 23/33 豆奴城, 26/31 彌鄒城, 27/32 也利城, 28/37 大山韓城(19 口而耶羅城, 24 沸城, 25/49 比利城, 29 掃加城, 30 敦拔城).
[4군]
33/38 婁賣城/農賣城, 34/45 散那城, 35/56 那婁城/那旦城, 36/50 細城(37/16? 牟婁城, 38 于婁城, 39 蘇赤城, 40 燕婁城, 41 析支利城, 42 巖門암城, 43 林城).
[5군]
48/43 就鄒城/就咨城, 50/40 古牟婁城, 51/39 閏奴城, 53/44 삼穰城(49 口拔城, 52 貫奴城).

2. 지명 군집들의 위치 분포추정

역사서에 기술된 표기와 같아 확인 가능한 지명은 沙水城(沙川), 阿旦城(阿且城), 彌鄒城 정도이다. 지명 군집들의 분포를 확인하기 위해 한자 표기가 지시하는 음성 중에서 해당 군집에 속하는 지명들의 위치에 비겨서 비슷한 음성을 가진 지명들을 찾았다. 앞서 말했듯이 攻取城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城들의 이름들로부터 찾는 것이 논리적으로 적절하다고 보며 일부는 기존의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지명도 고려해 넣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과 공취성의 표기상 음성이 유사성에 따라 비교적 확실성이 있는 공취성의 위치 비정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하의 예문에서 밑줄 없는 한글은 고대국어, 밑줄 있는 한글은 中世國語 또는 현대국어, 밑줄 없는 영문은 中世몽고어, 밑줄 있는 영문은 滿洲-女眞語임).

[1군] 가. 若模盧城 = 소모로 : 소몰 非勿(=所勿) = 僧梁.

僧山縣(杆城 부근)은 所勿達이라고도 하였으며, 非勿은 ?소몰 所勿(僧)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듯하다.

나. 牟盧城 = 모로골 : (ㅁ+아래아+ㄹ)/mori-골   馬忽 = mürü-골  臂城 = ?(ㅁ+아래아)(ㄹ+아래아)골   堅城 = 抱川.

中世國語 (ㅁ+아래아+ㄹ)(馬), 蒙古語, 滿洲-女眞語 mori-n(馬), 그리고 蒙古語 mürü-n(臂), 滿洲語 meire-n(臂), mulu(槪)를 참조할 때 모로골은 포천에 대비된다.

[2군] 가. 彌沙城/沙水城 : 沙川 = 놀모로 內乙買 = 노리모로 內爾買 = 漣川.

나. 古舍*薦(조)城 = 여-샤-?(고치?) : (여+ㅿ)야고치 古斯也忽次 = 獐項/臨江/臨津城.

나'. 古舍*薦(조)城 = 여-샤-?(고치?) : (여+ㅿ)야고치 古斯也忽次 = 獐項口 = 安山.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古斯는 '여(ㅿ+ㅡ)' 또는 '(여+ㅿ)'이다. 古斯也忽次는 '여(ㅿ+ㅡ)'와 '야 也'(소유격 조사?) 사이 연음이 없으며 '(여+ㅿ)야고치' 또는 '여(ㅿ+ㅡ)야고치'를 표기한다. 후기중세국어로 '(여+ㅿ)의 곶'로, 연음 안된 것으로 보인다. 古代語 고치(口, 串)는 중세국어 곶(串), 칼카몽고어 xurč (串), 일본어 kuchi(口)와 비교된다. 능비문의 古舍조城와 古斯也忽次를 대비키 위해 '조'는 '고치'를 표기하는 것이어야 하며, 글자 모양으로 보아 '꽂을'의 새김을 갖는 '薦'의 상용체자일 개연성이 있다. '여샤고치 古舍 '로 보아 古斯也忽次는 '(여+ㅿ)야고치'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 비정에서의 문제점은 고구려계 지명에서 /z/의 음소가 있었음에도 공취성의 표기로 어찌 '샤舍'가 쓰였는지 의문이다.

다. 阿旦城 : 阿且城 = 峨嵯山城(서울동쪽).

라. 雜珍城 = -돌-골 : 주부토 主夫吐 = 長堤 = 富川.

마. 古模耶羅城 = 고모야라 또는 고모(ㄴ+아래아)(ㄹ+아래아) : 곰나 冬音奈 = 곰 休陰 = 河陰.

사. 古利城 = 고-리-골 : 골의노 骨衣內 = 荒壤.

자. 勾牟城 = 구-모-골 : 검개 黔浦 = 金浦.

차. 須鄒城 = 수-추-골 : 수치소 首次若 = -- 鳥根乃 = 春川.

[3군] 가. 城/椽城 = /-기 : 열기 悅己 = 두렁열기 豆陵尹城 = 定山.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백제계 지명에서 城은 '굴-골-고-기, 부리'로 쓰였다. 비정 지명을 위해 '城=기'를 대입하였다.

나. 豆奴城 = 두노기 : 두나기/두잉기/둥기 豆仍只 = 燕岐.

당군의 점령후 생긴 古四州는 본디 古沙夫里(고부)로 다섯 현이 있는데 그 중에 淳牟縣으로 표기된 豆奈只는 豆仍只(燕岐)와 豆乃山(萬頃)에 대비시킬 수 있다. 豆奈只는 豆仍只(燕岐)일 개연성이 보다 크다. 只는 향가에서 '-ㄱ'을 표기하는데 쓰였고(金完鎭, 1980), 고려시대 鄕藥救急方에서는 '기'를 표기하는데 쓰였다(南豊鉉, 1981). 豆奈只=豆仍只='두나기'일 것으로 보인다. 公州의 고지명 관련하여 '아래아'가 고대시대에도 존재한 점을 고려하면 광개토왕 남정 당시에 비정 지명은 '두(ㄴ+아래아)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 彌鄒城 = 미추골 : 미추골 彌鄒忽 = 仁州 또는 仁川.

라. 大山韓城 : 西山市 大山面 또는 鴻山.

[4군] 가. 那旦城/那婁城= 나-돌 : 노리돌 波旦 = (ㄴ+아래아+ㄹ)돌 斤乙於 = 平海.

나. 牟婁城 = 모-루-골/벌 : 므르-벌 退火 = 義昌 = 興海.

다. 于婁城 = 우-루(-골) : 울 于尸 = 寧海.

라. 燕婁城 = 연-루-골 : 얄골 也尸忽 = 盈德.

古代語 表記에서 '-ㄹ'은 乙, 尸, 知 등으로 전사되었는데 寧海(于尸 : 于婁)와 盈德(也尸忽 : 燕婁城)의 대비관계에서 보면 '尸'의 자리에 '婁'를 쓰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지명표기 방식과도 차이를 보인다.

마. 析支利城 = 서/-지-리 : 사지리 沙熱伊 = 淸風.

[5군] 가. 就鄒城/就咨城 = -추/치-골 : 야치골 也次忽 = 母城/益城 = 金城.

나. 古牟婁城 = 여-모-루 : 얄모로 也尸買 = 狼川/ 川 = 華川.

나'. 古牟婁城 = 고-모-루 : 골(ㅁ+아래아)(ㄹ+아래아) 屈旨 = 牙山郡 新昌.

앞서 '古斯'가 '여(ㅿ+ㅡ)'와 관련되는 표기인 점으로 보아 古는 새김은 '여'이고 한자음은 '고'이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다. 閏奴城 = 윤-노-골 : 욘고치 要隱忽次 = 楊口.

라. 삼穰城 = 심-노 : 시모로 悉直 = 三陟.

<그림 2>는 1차 비정 결과를 지도에 표시한 것이다. [1군]과 [2군]은 강원도와 서울부근의 경기도 지역, [3군]은 충청남도와 일부의 경기도, 충청북도 지역, [4군]은 경상북도 동해안 일대와 일부의 충북지역. [5군]은 강원도 지역에 해당한다. [2군]의 須鄒城(春川)은 같은 그룹의 지명들과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다. [4군]의 析支利城(淸風)의 예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2: 1차 비정에 따른 군별 공취성의 위치.

각 군집이 지역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기초로 하면 [2군]의 古舍조城은 안산일 가능성보다 임진성일 가능성이, [5군]의 古牟婁城은 아산시 신창면일 가능성보다는 강원도 華川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

3. 군집 위치를 고려한 추가 지명 비정

군마다의 개략적인 지역 비정을 바탕으로 각 군의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여 유사지명들로부터 나머지 지명들의 위치를 추정해보기로 한다(<그림 3>). 그러나 공취성의 위치 비정이 경우에 따라서는 신뢰성이 매우 낮은 경우도 있음을 지적해 둔다.


그림 3: 1, 2차 비정에 따른 군별 공취성의 분포.

[1군] 가. 臼模盧城 = 伊川

臼模盧城은 「?-모로-골」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강원도와 경기도 인접지역에서 '-모로'형 지명으로 買, 勿로 끝나는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앞은 지리지 권35, 뒤는 권37의 기재내용임).

① 황해도 덕수: 德水縣 本高句麗 德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② 경기도 청평군 조종면: 浚水縣 本高句麗 深川縣 景德王改名 今朝宗縣; 深川縣 一云 伏斯買
③ 경기도 연천: 沙川縣 本高句麗 內乙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內乙買 一云 內이米
④ 강원도 이천: 伊川縣 本高句麗 伊珍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⑤ 강원도 정선: 旌善縣 本高句麗 仍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乃買縣
⑥ 경기도 이천 黃武縣 本高句麗 南川縣 新羅幷之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利川縣; 南川縣 一云 南買
⑦ 경기도 지명: 芟[一作沂]川郡, 本高句麗述川郡, 景德王改名, 今川寧郡. 領縣二; 述川郡一云省知買
⑧ 강원도 화천: 狼川郡 本高句麗 川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川郡 一云 也尸買

위의 지명중 [1군]에 가장 가까운 지명은 이돌모로 伊珍買(伊川)로 臼模盧城에 비정된다.

나. 幹저利城 = 兎山

幹저利城은「간-뎌-리(-골)」또는 '幹'을 釋讀하여「?-뎌-리(-골)」쯤이다. [1군] 지역에서 '-뎌리' 내지 고구려계 지명에 자주 보이는 '-달'형 지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에 해당할 지명으로 烏斯含達(兎山)을 꼽을 수 있다. 古代語 烏斯含(兎)과 비슷한말로 주변언어에는 日本語 usaki(兎), 女眞語 usahi 兀撒希(野猫) 따위가 있는 바 烏斯含은 烏斯兮의 잘못일 가능성이 높다. 烏斯兮는 '오소기'쯤으로 읽을 수 있으며, 幹과 대응시켜야 하는데 몽고어로 줄기는 esi임에 비추어 궁색하나마 幹저利城은 兎山에 얽을 수 있다.

다. 閣彌城 = 고미골 : 長湍郡 고미성리?.

'-ak'으로 끝나는 현재 한자는 고대지명 표기에서 -o에 대응되는 양상을 고려하면 閣 = [고]일 것으로 추정되며 閣彌城은 [고미골]일 것이며 장단군에 위치한 고미성리가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군] 가. 奧利城 = 오-리-골 : 얼모로고치 於乙買串= 泉井口 = 交河.

[2군]지역에서 奧利城에 해당될 만한 지명은 교하뿐이다.

[3군] 가. 沸城 - : 비술 雨述(>比豊>懷德)

나. 比利城= 비리골: 朱乙城(忠州)

忠州는 國原城으로 朱乙省 또는 託長城으로 불렸다(三國史記 地理誌 권 37). 朱乙省은 '未乙省'으로도 解得되기도 하였는데 '불골 朱乙省'(國原城)이 比利城인 듯하다.

다. 於利城 = 어리기 : 얼기 構(혜)郡 = 唐津郡 沔川面.

沔川의 고지명 構(혜)郡은 외자의 지명으로 '얼기설기' 또는 '얽-'이라는 말들을 대입시키면 어말이 '-기'로 끝나 외자여도 되는 성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沔川을 於利城과 也利城에 대비시킬 수 있다.

다'. 於利城 = (ㄴ+아래아)리기 : 노-(ㄷ+아래아+ㄹ)-?기 黃等也山 = 連山 : 누르기재(連山).

고구려지명에서 날개(翼)는 '於支'로 표기되었다(於支呑 一云 翼谷; 三國史記 地理誌 권37). 후기중세국어에서 '(ㄴ+아래아+ㄹ)애'(翼)임에 비추어 보면 '於支'는 '(ㄴ+아래아+ㄹ)기' 정도로 재구성된다. 於가 (ㄴ+아래아+ㄹ)로 읽히는 예는 鄕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ㅅ+다)(ㅎ+아래아+ㄹ) 버리곡 어드리 가(ㄴ+아래아+ㄹ)뎌 此地힐 捨遣只 於冬是 去於丁(金完鎭, 1980). '누르기'와 黃等也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也는 [기]를 표기해야 하며 書體로 보아 己의 誤字인 듯하다. '놀뫼'로 알려진 論山은 '누르-뫼'(黃山 < 노(ㄷ+아래아+ㄹ)기-뫼 黃等也山) 또는 '늘-뫼'(連山)에서 유래한 듯하다.

라. 也利城 = 야리기 : 얼기 構(혜)郡 = 唐津郡 沔川面.

위의 다 설명 참조.

[4군] 農賣城/婁賣城 = 橫城

고구려계 지명 표기에서 水는 買로 교체되나 능비문에서는 '買' 대신 '賣'를 쓰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賣 = 買 = 모로'이다. 婁賣城이 農賣城의 잘못이라는 전제에서 農賣城은 음독자인 경우 중복표기의 가능성이 있으므로「노모로(-골)」로 읽을 수 있고 釋讀字인 경우 「?-모로(-골)」로 볼 수 있다. 앞의 경우로 본다면 나미 餘美 [14] 일 가능성이 있다. [4군] 지역(강원도)에서 '-모로'로 쓰인 지명은 於斯買(橫川, 橫城), 也尸買( 川, 華川), 於乙買(泉井, 德源), 乃買(旌善) 따위로 橫城과 旌善이 대상이 된다. 만주어 usi-n(農)을 고려하면 엇모로 於斯買(橫川, 橫城)쯤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5군] 宗古盧城 = (ㅁ+아래아)(ㄹ+아래아)고로 : 멸걸滅烏(용인)?, 모로골 買忽(수원)?

宗古盧城은 宗을 釋讀字로 보면 「(ㅁ+아래아)(ㄹ+아래아)-고-로」와 가까울 것이고 멸걸 滅烏/巨杰(龍仁) 또는 모로골 買忽(水城)인 水原에 비정될 수 있으며 音讀字로 보면 「-고-로」와 비슷한 지명일 것이나 비정할 만한 지명이 없다.

<그림 3>은 1, 2차 위치 비정을 통해 위치가 확인된 군집별 攻取城의 분포를 도시한 것이다. 그림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공취성의 기술순서와 수묘인 연호를 징집한 위치 기술 순서로부터 추출한 군집은 지리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음이 명확하다. 이러한 사실확인을 근거로 능비문에 나타난 지명의 위치에 대해 다 심화된 접근을 시도하기로 하겠다.

IV. 攻取城의 지리 분석

1. 攻取城의 기술순서와 지명들의 지리적인 관계

앞서 공취성 기술순서와 수묘인 연호를 뽑은 성의 기술순서로부터 찾아낸 군집에 속하는 지명들이 지리적으로 매우 인접하는 지역들에 놓임을 알아냈다. 이제 공취성 기술 순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그림 4>는 앞선 작업을 통해 위치 비정된 공취성들을 도시하고 각각의 기술순서상(번호로 표시) 두 지명이 바로 앞과 바로 뒤인 경우와 한 지명 건너서 인접해 있는 경우를 표시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앞서 설정한 [1군]과 [2군]은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공취성에서 16째 공취성까지는 인접의 것들 사이에 순서가 바뀌기는 해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하는 방향성은 일관된다. [3군]에 있어서는 해안에서 육지방향으로 육지에서 다시 해안으로의 일관된 방향성을 보여준다. [4군]이나 [5군]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4군]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다시 육지로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5군]에서는 金城에서 華川, 楊口, 三陟까지 북서에서 남동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4: 공취성 기술순서와 인접지명들의 상관성.
a. 공취성 기술순서에서 바로 인접인 경우.
b. 공취성 중 인접에 있으며 하나 걸러 인접해 있는 경우.
화살표는 앞의 번호에서 뒤의 번호로 연결함.

2. 攻取城의 기술순서가 갖는 의미

공취성 기술순서가 지리적으로 선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기록에 안 보이는 무언가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취성 기술순서는 攻取한 순서대로 전쟁중에 기록한 것이거나 고구려군이 공격에 성공하는 대로 전투 지휘부(왕)에 보고된 순서일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서 능비문을 어떻게 작성했는지 기록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으나 공취성의 기술 순서가 공격하여 전투사령부에 보고된 순서이고 그를 사료로 하여 능비문이 지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공취성 기술 순서가 공취 순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몇몇 작업을 수행해 보기로 한다.

3. 나머지 攻取城의 위치 비정과 마멸된 자리의 공취성 찾기

우리의 작업과정에서 위치를 찾지 못한 공취성이 여럿이 있는데 공취성 기술순서로부터 앞뒤의 지명들을 통해 이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그림 4>에서 열째 阿旦城(阿且山城)과 11째 古利城(荒壤/豊壤)에 이르는 길은 확실치 않으나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곱째 공취성인 포천(牟盧城)을 지나 남쪽으로 왔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천 방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12째 口利城은 열째 阿旦城, 11째 古利城과 13째 雜珍城 사이에 놓인다. 口利城에 해당할 지명으로 '-리-'를 가진 지명은 首이忽(守安, 부천-김포 부근)과 述이忽(峯城, 교하 부근)이 있으며 지리적으로 보아 부천-김포 부근의 守安이 12째 공취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열아홉째 口而耶羅城은 [3군]이 위치한 충남지역 진입에 앞서 기술되어 있으며 16째 古模耶羅城 또한 강화도의 해안 지명과 관련되는 점에서 바닷가에 위치한 곳으로 추측된다. 부여군 정산까지 이르기에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그러한 대상으로 대천에서 서천 또는 전북해안에 이르는 영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新來韓穢 수묘인 연호성으로만 나타나는 성의 일부는 공취성중 마멸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수묘인에는 城뿐만 아니라 집단에서 뽑은 경우도 있다. 城 단위 지역으로 표기되지 않은 豆比押岑韓, 句牟客頭, 求底韓, 客賢韓, 百殘南居韓 등의 지역은 공취성의 목록에 나올 수 없다. 반면에 炅古城, 巴奴城, 牟水城, 味城 등의 수묘인성은 城이기 때문에 마멸된 성에 해당할 것이다. 炅古城은 한자음만으로는 '경고/견고/결고'를 표기하며 결기 結己(結城)로 상정된다. 巴奴城은 고구려계 지명 표기에서 巴가 [보]를 표기하므로 '보노' 쯤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지명으로 北漢山州 또는 平壤으로 불린 楊州로 비정할 수도 있다. 味城은 고구려 지명표기 방식으로 '미골'이며 未谷 또는 昧谷 [15] 으로 불린 보은군 懷仁(지금의 懷北面)이 상정된다. 앞서 확인한 지명들의 분포를 고려할 때 炅古城은 22째 공취성, 巴奴城은 18째 공취성, 味城은 31째 공취성일 것으로 상정된다. 牟水城은 불명확하나 다섯째 공취성에 놓을 수 있을 듯하다(<표 2> 참조).

4. 공취성 기술순서대로 따라가기

공취성 기술순서가 광개토왕의 남정 루트와 밀접하다는 면에서 지리적인 위치를 감안하여 攻取城 나열 순서에 준하여 따라 가보기로 하겠다. 첫번째 공취성인 壹八城의 위치는 현재 찾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1군] 지역인 황해도-강원도-경기도 접경지대인 것만은 확실하다. 비슷한 지명으로 백제 辰斯王 2년 기사에 나오는 八坤城을 상정해 볼 수 있다 [16]. [1군] 지역의 지명 중에 이와 비슷한 지명은 아돌압 阿珍押(窮嶽; 安峽)이 있는데 적절한 위치 비정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壹八城에 대비할 만한 지명은 安峽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壹八城을 지나 이돌모로 臼模盧城(伊川, 2), 남으로 소모로 若模盧城(僧梁, 3), 오소기달 幹저利城(兎山, 4)을 지난다. 그 뒤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남으로 長湍路로 진출하여 牟水城(5), 고미골 閣彌城(長湍郡 고미성리, 6), (여+ㅿ)야고치 古舍薦城(9)를 지난다. 지리적으로 보아 牟水城은 長湍郡내의 渭川里에, (여+ㅿ)야고치 古舍薦城는 安山이 아닌 임진나루 동쪽 臨江(坡平郡 栗谷里 臨津城)임이 확실하다. 그 뒤 얼모로고치 奧利城(交河, 14) => 句牟城 (金浦, 15) => 강화도의 고모(ㄴ+아래아)(ㄹ+아래아)/곰나 古模耶羅(河陰, 16)에 이른다. 소모로 若模盧城(僧梁, 3)에서 나뉜 다른 한 흐름은 노리모로 沙水城(沙川, 8) => 모로골 牟盧城(抱川, 7) => 골의노 古利城(荒壤, 11) => 아돌골 阿旦城(10) => 口利城(守安?, 12) => 주부토 雜珍城(富 川, 13)으로 이어진다.

이후의 흐름은 충청도 일대에서 나타난다. 口(ㅿ+ㅣ)(ㄴ+아래아)(ㄹ+아래아) 口而耶羅城(19)는 어디인지 불확실하지만 루트로 보아 남포 내지 서천쯤에 해당하는 듯하며 이곳으로 水軍이 상륙하였던 것 같다. 해안으로 상륙한 흐름은 열기 椽城/전城(定山, 20) => 어리기/(ㄴ+아래아)리기 於利城(沔川?/ 連山?, 21) => 비술 沸城(懷德, 24) => 두(ㄴ+아래아)기 豆奴城(燕岐, 23) => 불골 比利城(忠州, 25) => 미추골 彌鄒忽(26) => 야리기 也利城(唐津郡 沔川?, 27) => 大山(28) => 掃加城(29) => 敦拔城(30)으로 연결된다. 후에 충청도 지역의 미골 味城(懷仁, 31) 등도 연결된다. 지리적인 관계로 보아 於利城은 連山, 也利城은 唐津郡 沔川이고, 미추골 彌鄒忽은 충주 또는 연기와 당진군 면천 사이에 놓여야 하므로 仁川보다는 牙山市 仁州面일 개연성이 크다. 掃加城은 禮山市 五加面, 敦拔城은 고라부리 古良夫里(靑陽)로 추측된다.

또 다른 흐름은 수치소 須鄒城(春川, 17)에서 엇모로 農賣城(橫城, 33)을 지나 경북 동해안으로 연결된다. 그 다음의 공취성을 지역적으로 연결하면 노리돌 那旦城/那婁城(平海, 35) => 細城(36) => 모루벌 牟婁城(興海, 37) => 얄골 燕婁城(盈德, 40) => 울 于婁城(寧海, 38)의 순으로 이어지고 다시 충청지역의 사지리 析支利城(淸風, 41)로 연결된다. 散那城(34)과 蘇赤城/蘇炭城(39), 細城의 위치는 아직 모르나 각각 昔里火(靑松), 골벌 屈火(臨河), 아기 阿兮(淸河)일 개연성이 있다.

강원도 일대와 동해안으로 연결된 흐름은 僧梁 또는 춘천에서 시작하여 야치골 就鄒城 (金城, 48) => 얄모루 古牟婁城(華川, 50) => 욘고치 閏奴城(楊口, 51) => 貫奴城(52) => 시모로 삼穰城(三陟, 53)로 이어진다. 貫奴城은 지리적으로 보아 고시라 河瑟羅(江陵) 정도로 추정된다.

공취성 기술순서를 지리적인 관계를 고려하며 따라간 결과 표기나 음성이 명확하여 위치 비정이 가능했던 城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알 수 없었던 성이나 비슷한 음성으로 지역을 확정할 수 없었던 지명들의 위치를 보다 신빙도 높게 찾아낼 수 있었다.

V. 守墓人 烟戶의 징발지의 분포와 의미

광개토왕이 돌아간 뒤 광개토왕릉의 守墓人으로 國烟과 看烟이 선발된다. 묘지기중 1/3은 기존의 영토지역에서 뽑았다. 賣勾余, 東海賈, 敦城, 于城, 碑利城, 平穰城, 此連, 俳婁人, 梁谷, 梁城, 安夫連, 改谷, 新城, 南蘇城(14 개 성)이 그것이다(<표 3>).

<표 3> 묘지기의 현황.
  이름 國烟數 看烟數 非攻取城 비 고
1 賣勾余 2 3 O  
2 東海賈 3 5 O (집단)
3 敦城   4 O  
4 于城   1 O 丹東
5 碑利城 2   O 北鎭
6 平穰城民 1 10 O 平壤
7 此連   2 O  
8 俳婁人 1 43 O (집단)
9 梁谷   2 O 新溪
10 梁城   2 O 義州
11 安夫連   22 O  
12 改谷   3 O 犁山城
13 新城   3 O 瀋陽동쪽
14 南蘇城 1   O 新賓
15 沙水城 1 1   連川
16 牟婁城   2   抱川
17 豆比鴨岑   5  
18 勾牟客頭   2  
19 求底韓   1 全義
20 舍薦城韓穢 3 21   臨江
21 古模耶羅城   1   河陰
22 炅古城 1 3 (ㅿ) 結城
23 客賢韓   1 淮陽
24 阿旦城   10   峨嵯山
25 雜珍城       富川
26 巴奴城   9 (ㅿ) 楊州
27 臼模盧城   4   伊川
28 若模盧城   3   僧梁
29 牟水城   3 (ㅿ) (渭川)
30 幹저利城 2 3   兎山
31 彌鄒城 1 7   仁州
32 也利城   3   沔川
33 豆奴城 1 2   燕岐
34 奧利城 2 8   交河
35 須鄒城 2 5   春川
36 百殘南居韓 1 5 (집단)
37 大山韓城   6   大山
38 農賣城 1 7   橫城
39 閏奴城 1 22   楊口
40 古牟婁城 2 8   華川
41 전城 1 8   定山
42 味城   6 (ㅿ) 懷仁
43 就咨城   5   金城
44 삼穰城   24   三陟
45 散那城 1     靑松
46 那旦城   1   平海
47 勾牟城   1   金浦
48 於利城   8   連山
49 比利城   3   忠州
50 細城   3   (淸河)

(ㅿ : 남정 이전 백제나 신라의 영역에 있던 지명이면서 공취성의 목록에 들지 않는 곳.
(ㅿ): 공취성 중에 마멸된 자리의 성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이 어려운 지명)

新來韓穢 지역이 아닌 옛 영토 내에서 煙戶를 뽑은 지역의 위치는 신빙성은 떨어지나 예성강 북쪽 지역에 한정하여 비정하면 다음과 같다.

(1) 于城 = 우골 : 오골 烏骨城 = 丹東市 鳳城縣.
(2) 碑利城 = 비리골 : 비리 碑麗 = 牌離 = 霜巖 = 險瀆= 北鎭.
① 永樂 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 人, 躬率住討過富山, 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洛 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 王備獵 遊觀土境 田獵而還.
② 集州, 懷衆軍, 下, 刺史. 古牌離郡地, 漢屬險瀆縣, 高麗爲霜巖縣, 渤海置州(遼史 地理志)
(3) 梁谷 = (ㅁ+아래아)(ㄹ+아래아)돈 : 모로돈골 水谷城 = 新溪.
(4) 梁城 = (ㅁ+아래아)(ㄹ+아래아)골 : 모로골 抱州 = 義州.
(5) 改谷 = 가이돈 : 갈달 加尸達 = 犁山城(鴨綠 以北 逃城).
(6) 新城 = 瀋陽 동쪽 渾河 중류에 위치한 성(?)
① 西川王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 [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서천왕 7년(276) 여름 4월: 왕은 신성(新城)-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큰 진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② 삼국사기 지리지: 鴨綠水以北, 未降十一城: 新城州, 本仇次忽[或云敦城.]
新城은 瀋陽 동쪽 渾河 중류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데 위의 두 기록에 의하면 仇次忽 또는 敦城으로도 불렸다. 敦城이 연호를 뽑은 지역에 별도로 있다는 것은 新城과 동일 지명이 아님을 뜻한다. 新城이 나라(서울?)의 동북 큰 진이라고도 하였음을 보면 新城은 여러 개였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7) 南蘇城 = 渾河 지류 蘇子河/南蘇水 가의 新賓(허투알라 Hetuala).

광개토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거란 지역인 北鎭(碑利城)에 이르는 바 오라 烏剌(遼河) 서쪽까지 영역에 포함된다. 아울러 南蘇城, 단동 봉황성(烏骨城), 犁山城 등이 보인다. 한반도 지역에서 東海 商人(집단), 平壤, 新溪, 義州 등이 포함되나 客賢城은 기존의 영토에 포함되고 있지 않고 百濟, 新羅 지역처럼 '新來韓穢'로 분류하고 있다 [17]. 客賢城은 客(各)連(가기야 加兮牙)임이 확실하며 淮陽이다. 수묘인 연호를 뽑는 성의 분포는 장수왕대 광개토왕릉비를 세울 당시의 고구려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주목된다.

VI. 토론 및 결론

고대 지명은 한자의 새김(釋讀字)과 한자음(音讀字)을 활용하여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요소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명은 언어 요소와 지리 요소가 결합한 것으로 복원된 음성에 의한 비정은 신빙도가 낮다고 할 수 있다. 전국에 걸쳐 '까치내'라는 지명은 수도 없이 많으나 해당 지명이 어느 곳에 위치한 '까치내'인지를 밝혀 내지 못한다면 적절한 위치 비정이라고 할 수 없다.

언어요소만에 의한 지명의 위치 비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명기된 攻取城과 수묘인 연호를 선발한 지역 기술순서가 갖는 정보를 활용하였다. 선험적으로 인접하여 기술된 지명은 다른 지명보다는 가까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개념을 갖는 두 그룹의 지명에 순번을 매겨 두 그룹을 비교한 결과 攻取 지역 (또는 新來韓穢 지역)의 지명들이 몇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된다.

고대 시대의 지리요소는 城과 村으로 이루어진다. 유형의 요소인 城은 행정 기능에 따라 州, 郡, 縣 따위의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에서 공략한 城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재된 지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래가 밝혀지지 않은 지명을 攻取城과 대비시킨 기존의 연구자들의 작업은 유의미한 작업과 멀음을 가리킨다. 이 논문의 작업 결과를 종합하고 미진한 부분에 대해 논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攻取城 기술순서의 의미

지리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볼 때 공취성의 기술순서는 일률적으로 선형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웃하여 기술된 지명들 사이 약간의 순서는 바뀌기도 한다. 지리적인 순서를 감안 하여 묶음들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2군] ① 1-2-3, ② 4(-5)-6, ③ 8-7, ④ 9, ⑤ 11-10-13, ⑥ 14-15-16.

[3군] ① 20-21-23, ② 24-25, ③ 26-27-28

[4군] ① 33(-34)-35 ② 40-38-37 ③ 41

[5군] ① 48-50-51-53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공취성으로 인해 더 많은 묶음을 찾아내기는 현재로선 어려우나 묶음들이 있다는 것은 각 묶음별로 전쟁 지휘부에 보고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취성 기술 순서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광개토왕릉 비문의 공취성은 공략한 순서를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

공취성을 기술순서대로 추적하면 인접하여 기술된 지명들이 지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이 확인된다. 광개토왕은 원정의 돌파구를 찾은 곳은 백제와 접경하던 浿水 지역이 아니고, (安峽-) 伊川-兎山 지역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취성 기술순서를 따라 줄을 대보면 이들 지역으로 모인다. 우회전술로 浿水 국경선의 후방을 공격하여 국경수비군을 피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安峽이나 僧梁 쯤에서 공격루트를 여러 방향으로 잡은 듯하다. 일부는 강화도 지역으로 진출하고 일부는 연천-포천 지역을 지나 지금의 서울지역으로 진입한 뒤 인천 방면으로 루트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그림 5>).


그림 5: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
1-58: 396년 병신대원정 기간의 공취성.
59-60: 398년 帛愼土谷 가는 길에 공략한 성.
59: 莫斯羅城 (모시라馬西良=옥구).
60: 加太羅谷(가몰고甘勿阿=함열).
61-63: 407년 정벌전에서 돌아오면서 취한 성.
61: 沙溝城(나리고乃利阿=김제군 이성면).
63: 牛由城(소려기所力只=익산시 옥야면).
영락 10년 (400년), 신라왕조를 구하러 출병할 당시 고구려는 男居城(문경?)을 지나 육상으로 이동하였다.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倭와 처음 조우한 任那加羅가 놓이는데 문경과 경주 사이에 영역국가는 高靈의 大加耶가 있으며 大加耶가 任那加羅일 가능성이 높다.

경기만 일대로 모인 군대는 충남 藍浦 쯤에서 충청 내륙으로 연결되는데 이 사이에 광개토왕이 몸소 이끈 水軍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나 부천 지역에 이른 부대는 황해도 延安 또는 喬桐島(達乙斬 = 關彌城)에서 출발했을 水軍과 합류하여 백제의 후방인 충청 지역을 공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상륙후 結城, 定山 - 連山(論山) - 懷德 - 忠州 - 燕岐 - 牙山市 仁州面 - 唐津郡 沔川 - 西山市 大山面 - 禮山市 五加面- 靑陽 등을 공략한 듯하다. 부천까지 온 흐름과 충남지방으로의 연결선에 이미 仁川이 놓이므로 후의 흐름에 나타나는 彌鄒忽은 仁川이 아니고 牙山市 仁州面일 가능성이 높다.

서울 또는 僧梁에서 갈라져 나온 부대는 春川 방면으로 진출하여 남동쪽으로 橫城 - 靑 己 - 平海 - 盈德 - 興海 지역으로 진출하는 듯하고 승량 또는 춘천 지역에서 갈려 나온 일부는 金城(金化) - 華川 - 楊口 - 江陵 - 三陟 방향으로 진출한다.

백제의 후방과 신라지역을 점령한 뒤, 고구려군은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추가로 공략에 나서며 이로써 백제는 도성 일대를 빼고는 모두 고구려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광개토왕의 초기 작전계획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은 우회전술, 후방 초토화, 포위고사작전으로 보인다. 병신대원정이 永樂 6년 한해 동안 벌어진 일로는 실로 엄청나게 속전속결의 원칙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백제의 阿莘王은 광개토왕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丙申大遠征 이후에도 고구려는 추가전쟁에 나선다. 영락 8년(398년) 帛愼 땅을 보러 가서 59 莫斯羅城과 60 加太羅谷에서 남녀 300 인 남짓 잡아왔으며 조공 약속을 받아 왔다. 莫斯羅城은 '모시라/마시라'쯤으로 읽을 수 있으며 유사 지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 沃溝縣, 本百濟馬西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② 代勞縣, 本百濟馬斯良縣, 景德王改名, 今會寧縣
③ 歸化縣, 本麻斯良 (都督府一十三縣)

馬西良는 현재의 沃溝이고 馬斯良는 長興郡안의 지명이다. 莫斯羅城을 전북 옥구에 비정할 때 加太羅谷은 옥구 인근 지명 가운데 甘勿阿(咸悅)일 개연성이 크다. 帛愼土谷을 보고 오는 길에 全北 沃溝, 咸悅을 쉽게 얻은 것으로 보아, 帛愼은 전북 해안지역 또는 益山 쯤에 자리한 나라였던 것 같다(<그림 5>).

영락 9년(399년) 백제가 왜와 손을 붙잡자 광개토왕은 下平壤을 巡幸하였으며 이때 신라는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광개토왕은 庚子年(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라 명하였다. 庚子年條는 男居城에서 新羅城(경주)까지 가는데 왜군이 가득했으며 관군이 이르자마자 왜군을 물러갔다고 적고 있다. 이 출정 길에서 倭를 처음 조우한 곳은 任那加羅로 보인다. 男居城이라는 성을 지나고 있는 점과 任那加羅 城을 함락시키고 다시 경주지역으로 간 것으로 보아 任那加羅는 백두대간 동남쪽,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신라와 연결통로에 있던 영역 국가인 대가야(경북 서부와 경남서부 일대)가 임나가라일 가능성이, 고구려군이 왜와 처음 조우한 곳은 경북 고령일 가능성이 높다.

영락 17년,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정벌에 나서는데 돌아오는 길에 沙溝城, 婁城, 牛由城 따위를 쳐부쉈다. 沙溝城은 支王 13년조의 沙口城과 같은 성으로도 보인다( 支王 十三年,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沙溝城이 '노리-구-골/기'일 때 이와 비슷한 지명으로는 다음의 두 지명이 있다.

① 利城縣, 本百濟乃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② 汝湄縣, 本百濟仍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和順縣; 仍利阿縣 一云海濱.

乃利阿(利城)와 仍利阿(和順) 모두 '나리고'를 표기한다. 牛由城은 '쇼/우-유-기/골' 쯤의 구성을 가지므로 소려기 所力只(益山市 玉野面)를 물망에 올릴 수 있다. 沙溝城과 牛由城에 대비되는 성들을 모아 본 결과, 두 성은 각각 전북의 김제군 이성면과 익산시 옥야면일 개연성이 높다(<그림 5> 참조). 지리정보를 이용한 다각적인 접근으로 보다 심도 있게 공취성의 위치비정이 가능해졌으며 지명 위치 비정 결과를 종합하면 <표 4>와 같다. 표기상의 상이점을 고려하여 당시 음가를 추정하였다.

<표 4> 광개토왕릉 비문 攻取城의 위치 비정.
  攻取城 대비지명 당시지명 비 고
1 壹八城 (安峽) (아돌압) (阿珍押)
2 臼模盧城 伊川 이돌모로 伊珍買
3 若模盧城 僧梁 소모로 非勿
4 幹저利城 兎山 오소기달 烏斯含達
5 (牟水城) (長湍 渭川) (모모로)  
6 閣彌城 長湍 고미성 고미골 (長湍郡내)
7 牟盧城 抱川 모로골 馬忽
8 彌沙/沙水城 沙川/漣川 노리모로 內 買
9 古舍조城 臨江/臨津城 (여+ㅿ)야고치 古斯也忽次
10 阿旦城 峨嵯山城 아돌골 阿旦城
11 古利城 荒壤 골의노 骨衣奴
12 口利城 (守安) (수리골) (首 忽)
13 雜珍城 富川 주부토 主夫吐
14 奧利城 交河 얼모로고치 於乙買串
15 勾牟城 金浦 고모개 黔浦
16 古模耶羅城 河陰 고모(ㄴ+아래아)(ㄹ+아래아)/곰나 冬音奈/休陰
17 須鄒城 春川 수치소 首次若
18 (巴奴城) (楊州) (보노) (平壤)
19 口而耶羅城 (藍浦) -(ㅿ+ㅣ)(ㄴ+아래아)(ㄹ+아래아) (寺浦)
20 椽城/전城 定山 열기 悅己
21 於利城 連山 (ㄴ+아래아)리기 黃等也山
22 (炅古城) (結城) (결기/결고) (結己)
23 豆奴城 燕岐 두(ㄴ+아래아)기 豆仍只
24 沸城 懷德 비술 雨述
25 比利城 忠州 불골 朱乙城
26 彌鄒城 仁州 미추골 彌鄒忽
27 也利城 唐津郡 沔川 야리기/얼기 構城/혜城
28 大山韓城 大山    
29 掃加城 禮山市 五加    
30 敦拔城 (靑陽) (고라부리) (古良夫里)
31 (味城) (懷仁懷北) (미골) (未谷)
32 口城 ?    
33 農賣/婁賣城 橫城 엇모로 於斯買
34 散那城 靑己 사리벌 昔理火
35 那婁/那旦城 平海 (ㄴ+아래아)리돌 波旦/斤乙於
36 細城 (淸河) (아기) (阿兮)
37 牟婁城 興海 모루벌 退火
38 于婁城 寧海 于尸
39 蘇赤城 (臨河) (골벌) (屈火)
40 燕婁城 盈德 얄골 也尸忽
41 析支利城 淸風 사지리 沙熱伊
42 巖門암城 ?    
43 林城 ?    
44 口口 ?    
45 口口 ?    
46 口口 ?    
47 口利城 ?    
48 就鄒/就咨城 金城 야치골 也次忽
49 口拔城 ?    
50 古牟婁城 華川 얄모루 也尸買
51 閏奴城 楊口 욘고치 要隱忽次
52 貫奴城 (江陵) (고시라) (河瑟羅)
53 삼穰城 三陟 시모로 悉直
54 曾拔城 ?    
55 宗古盧城 龍仁/水原 모로고로 滅烏/買忽
56 仇天城 ?    
57 口口口 ?    
58 (百濟都城) 慰禮城    
(공취성중 괄호를 한 것은 마멸된 자리에 수묘인 연호를 뽑은 新來韓穢의 성을 끼워 넣은 것이고 괄호안의 대비 지명은 비정에 있어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한 경우임)

3. 묘지기 분포와 5세기 초 고구려의 영역

長壽王은 廣開土王陵의 묘지기를 百濟의 영토인 충청지역(全義, 結城, 仁州, 沔川, 燕岐, 大山, 定山, 懷仁, 連山)에서도 뽑았다. 서기 475 년, 長壽王이 百濟王都 漢城을 함락하여 蓋鹵王을 弑殺하자 文周王이 등극하여 百濟의 수도를 하남위례성에서 熊川(公州)으로 옮기기까지 고구려군은 충청 지역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永樂太王 10년, 신라를 구하러 新羅 都城으로 원정을 가는 과정에서 접수된 성은 신라인을 戍兵으로 두어 지키게 했음을 명시하고 있다(安羅人戍兵). 반면 '丙申大遠征' 때의 攻取城에는 이러한 명시가 없는 것은 고구려군으로 戍兵을 두었음을 내비친다. 永樂太王 8년, 莫斯羅城(모시라 = 馬西良 = 沃溝), 加太羅谷(가타이라실) 등의 공략은 충청 지역에 주둔한 부대가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南遷後 조정되어 <그림 1b>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경이 얼마간 고착된 것으로 상정된다.

煙戶중 看烟의 수는 곳에 따라 대단히 큰 수가 배당되기도 하였다. 舊民중 平穰城, 俳婁人, 安夫連에 대해서는 각각 10, 43, 22 등으로 매우 많다. 뒤의 두 집단은 城의 형태가 아닌데 현격히 많은 烟戶가 징발될 수 있는 상황을 현재로써 이해하기 힘들다. 새로 편입된 지역에 있어서도 古舍薦城, 閏奴城, 삼穰城에서 각각 21, 22, 24 호를 뽑는 등 월등히 많은 수의 看烟을 뽑았다. 金城, 華川, 楊口, 江陵, 三陟은 지리적인 위치에 비해 매우 뒤에 기술되어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攻取城 기술 순서가 점령 순서라면 金城 - 三陟 지역이 매우 공략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楊口 및 三陟은 평양에 비해 큰 도시로 보기 힘들며 징발된 연호수가 월등히 많은 것은 쉽게 공략되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일 수 있다. 연호의 수가 징벌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古舍薦城(臨津城)도 공략키 어려운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묘지기의 분포는 장수왕대 초기 고구려의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新來韓穢를 제외한 지역은 특히 광개토왕 이전 고구려의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서북지역의 지명으로 碑利城, 敦城, 新城, 南蘇城 등이 포함되며 요하 서쪽 北鎭에서 遼河, 渾河일대와 渾河 지류의 南蘇城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4. 강원도 지역의 靺鞨의 성격

남정 이전 원래 영토에서 연호를 뽑은 성중에 한반도 지역의 東海 商人, 平壤 등이 포함된다. 淮陽은 기존의 영토에 포함되고 있지 않다. 강원도 지역은 비교적 공략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뒤에 고구려의 영토로 분류된 지역으로 鐵原(털도비 毛乙冬非), 金化(夫如), 平康(어시노 於斯內 [18] ; 廣平/斧壤), 通川(소노 休壤), 高城(달골 達忽), 杆城(가라골 加阿忽/加羅忽) 따위는 攻取城의 범위에 들지 않으며 이 지역에 상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靺鞨 (<그림 1a>)과의 충돌이 기록되고 있지 않음도 주목된다.

僧梁쯤에서 분기한 부대는 金城 - 華川 - 楊口 - 江陵 - 三陟 지방의 공격을 맡았으나 비교적 뒤에 서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48-53), 공격에 매우 난항을 겪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아울러 金城이 僧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을 고려할 때 초기부터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전담했으나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을 반영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靺鞨은 고구려와 우호관계였던 것 같으나 병신대원정 때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자연히 靺鞨은 고구려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광개토왕의 남정 이유

광개토왕의 남정 목적은 무엇이었을까를 되짚어 보기로 하겠다. 첫째, 백제와 신라를 괴롭히는 倭의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을까? 倭와 관련된 능비문의 기사를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口口新羅以爲臣民.
②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③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特遣使環, 告以密計.
④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隋倭, 安羅人戍兵.
⑤ 口殘倭遣逃, 拔口城, 安羅人戍兵.
⑥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口通殘兵口石城. 口連船口口口, 王躬率住討, 從平穰. 口口口鋒相遇. 王幢要截蕩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⑦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口口口口口口口口. 王師口口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環破 61 沙溝城, 62 婁城, 63 牛由城, 64 口城, 65-67 口口口口口口城.

능비문에는 남정의 원인을 왜에게 돌리고 있으나, 396년 병신대원정중 倭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백제도성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지역을 고구려군이 점령하고 백제도성을 포위하자 백제의 阿莘王은 男女 生口 1000명과 細布 1000필을 바치며 휴전을 청하며 굴복하였다. 광개토왕은 쾌히 용서를 하고, 阿莘王의 동생과 大臣 열 명을 잡아갔을 뿐이다.

②의 기사에 따르면 396년 大戰 이후 399년에 백제가 倭에 구원을 요청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397년 여름 5월, 阿莘王은 왜국과 동맹을 맺고(結好), 인질로 태자 支를 보낸다. 결국 백제가 왜국에 구원요청을 함으로써 왜는 구원군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③의 기사는 그런 맥락에서 희생을 치러야 했던 집단이 신라였고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400년,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러 출정을 한다(④, ⑤). 404년 다시 帶方 지역으로 倭의 침공이 있었다(⑥).

그렇다면 왜는 백제의 구원요청으로만 신라를 침범했는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고 오랫동안 신라를 괴롭혀 왔다. 병신대원정 몇 년 전인 392년(奈勿尼師今 38年) 여름 5월, 왜인들은 金城을 닷새동안 포위하고 있다가 협공에 대패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왜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오랫동안 침입해 온 것으로 보인다. 392년 왜의 신라 침범이 신라를 괴롭히는 倭를 응징한다는 명분에는 부합하기는 하나 이 문제는 신라 자체적으로 해결하여 위난을 막아냈기 때문에 고구려의 왜에 대한 응징 문제는 명분으로서 적절치 않다.

다시 ①의 기사를 다시 풀어 가보기로 하겠다.

①' 百殘과 新羅는 옛날 대저 屬民으로 전부터 조공해 왔다. 헌데 倭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신라를 ...해서 臣民으로 삼았다.

위의 기사는 소위 '신묘년조' 기사로 불리는데 사실은 영락 5년조와 6년조 사이에 놓이기 때문에 '신묘년조'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盧柄煥, 2000). 글자대로라면 왜가 고구려의 속방을 침범했다는 논지는 신묘년, 곧 광개토왕이 즉위하던 해부터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권위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응징을 위해 출정하였다는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능비문을 쓰던 414년의 관점에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굴복했거나 은혜를 입은 턱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능비문 세울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屬民이라는 말을 쓸 만한 자격은 충분하다. 그 이전의 관계는 어떠한가? 245년(助賁尼師今 16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가 패했고 248년(沾解尼師今 2년)에는 고구려와 結和하였다. 391년 신라 奈勿尼師今은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바 고구려가 강성함에 伊 大西知의 아들 實聖을 인질로 보낸 바가 있다. 이런 구도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권 또는 동맹관계에 있었다거나 屬邦이었거나 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초기에 屬民의 성격보다는 적국의 성격이 보다 강하다. 그 참혹한 패전속에서 백제가 왜에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신라는 왜에 전역이 유린되었고 백제는 왜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보기에는 두 나라가 왜의 臣民이 된 것처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를 괴롭히는 왜는 맞아도 백제를 괴롭히는 왜는 맞지 않다.

둘째로, 광개토왕의 남정이 故國原王 41年 평양성까지 쳐들어온 백제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시해하였기 때문일까?

고국원왕이 시해된 시기는 371년이고 광개토왕(374년 甲戌生)이 태어나기 3년 전의 일이다. 국가적인 수치를 풀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소수림왕이나 고국양왕 대에도 이러한 복수전으로서의 전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병신대원정이 복수전었다면 처절하게 백제왕실을 물고를 냈었어야 한다. 그러나 인질을 잡아갔을 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앙갚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구려가 일단의 대가를 챙기고, 백제왕조는 어느 정도 보전되었다.

셋째로 광개토왕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남정을 했을까? 정복전쟁의 당연한 이유가 영토와 人口확보가 아닐까?

三國史記 地理誌 권37에는 蔚珍(于珍也), 平海(波旦 = 那旦城), 盈德(也尸忽 = 燕婁 城), 助攬(眞寶 부근), 靑己(昔里火=散那城), 臨河(屈火=蘇赤城), 安德(伊火兮), 寧海(于尸 =于婁城), 淸河(阿兮=細城?), 三陟(悉直= 삼穰城) 등은 고구려 영토로, 권 34에서 興海(退火 =牟婁城), 安東(古抒耶), 眞寶(柒巴火)는 신라 영토로 분류되어 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지리지의 저본의 형성 시기가 6세기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이 지역에까지 이른 것은 광개토왕의 丙申大遠征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확인된다. 新羅 영토였던 이들 지역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廣開土王의 丙申大遠征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음을 내보여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광개토왕릉 비문을 통해 생존시 이름으로 好太王이신 분이 廟號로 왜 廣開土王이 되게 되었는지를 원점으로 돌아가 확인한 셈이다.

1 至로도 읽혔으며 王健群 석문에서는 山부에 日이 합쳐진 자로 해득하였다.
2 廣開土大王 元年 記史(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 絶 海水環繞)에 근거하여 關彌城은 喬桐島로 보는 경우가 많다.
3 辰斯王 三年, 秋九月, 與靺鞨 戰 關彌嶺, 不捷.
辰斯王 七年, 夏四月, 靺鞨攻陷 北鄙 赤峴城.
奈勿尼師今 四十年, 秋八月, 靺鞨侵北邊, 出師大敗之於悉直之原.
4 己의 고대일본 한자음은 [kö]이고(金思燁, 1983), 현대 일본한자음은 [ko]이다.
5 支는 岐, 兮와 교체되어 [기]의 음가를 갖는다(三岐縣, 本三支縣[一云麻杖.]; 菓支縣 一云 菓兮). 사서에서는 우리나라식 표기와 일본식 표기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가야의 관직인 干支는 旱岐로, 昆支는 昆伎로 쓰기도 한다. 支는 之, 子와 교체하기도 한다( 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이러한 쓰임새는 支는 원래 [지]이나 사용체자로 쓰여 [기]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6 여치를 방언에서는 '연치'라 하고, 영어 placard를 [플랭카드]라고 자주 하는데 사이에 낀 '-ㄴ/ㅇ -' 은 기생음이다. 중세국어에서 '무(ㅿ+ㅜ)'(蘿)와 '(우+ㅿ)-'(笑)은 만주어에서 'menji', 'inje-'에 대응되는데 만주어에서 '-n-'의 기생음을 제외시킬 때 두 언어는 비교 가능케 된다.
7 앞의 세 한자의 조선조 초 새김과 한자음은 각각 '안 내/(ㄴ+아래아+ㅣ)', '놈 노', '소니 노'이다.
8 訓民正音 解例에서는 '(여+ㅿ)의갗爲狐皮'라고 하였으며 訓蒙字會에서는 薺 를 '계로기'라고 하였다.
9 南豊鉉(1981)은 '노(ㄹ+아래아)(ㅇ+아래아+ㅐ)갗'으로 보았으나 '(여+ㅿ)의 갗'이 薺 의 이름인 것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10 불경에서 釋迦牟尼를 [서가모니]로, 南無大悲觀世音을 [나무대비관세음]으로, 十方을 [시방]으로 읽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1 也가 皐에 대응되는데 也는 己의 誤字, 己의 한자음은 [고]였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주 5) 참조.
12 강원도 지명중 功木達은 熊閃山과 교체된다. 山/達 부분을 제외하면 功木=熊閃이다. 전자는 '고모'쯤으로, 중세국어 '고마'(熊)보다 진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閃이 問의 잘못이고 木의 한자음이 [모]일 때 두 교체표기는 일치하며, 전자는 '고모달' 후자는 '고몬달'을 표기하고 후자는 기생음이 끼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고구려계 지명표기에서 木의 한자음은 '-ㄱ'이 없다.
13 남방계 한자음에는 -k, -p, -t의 어말이 유지되는 반면 북방계에서는 소실되었다. 북방계에서 '-o/e'형(보기: 河, 何, 阿)는 남방계에서 '-a'형의 발음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東音은 남방계 한자음에서 유래했다.
14 조선조에 貞海縣과 餘美邑을 海美로 통합하였다.
15 골짜기(谷)는 高句麗語에서는 '돈 旦, 톤 呑'(또는 (ㄷ+아래아+ㄴ)/(ㅌ+아래아+ㄴ)), 百濟語, 新羅語에서는 '골'과 '실'이 쓰였다.
16 백제 辰斯王 2년,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17 고구려 이남지역을 '新來韓穢'로 분류한 바탕에는 한반도 중남부 百濟, 新羅 지역에 고구려와 다른 부류가 있었으며 아울러 이전에 복속된 韓穢 또한 있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8 古代語 어시 於斯(廣)는 거란어 osy/esy 阿斯(寬大), 後期中世國語 어위(<*어쉬, 廣), 여진어 oćo 我撮(寬), 만주어 onćo(廣)( o o+기생음)와 비교된다.

참고문헌

1 金思燁, 1983, 日本의 萬葉集.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6, 民音社, 311p.
2 金聖昊, 1982,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原. 知文社, 370p.
3 金完鎭, 1980, 鄕歌解讀法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285p.
4 南廣祐, 1984, 補訂 古語辭典. 一潮閣, 579p.
5 南豊鉉, 1981, 借字表記法硏究. 學術叢書 第6輯, 檀大出版部, 313p.
6 盧柄煥, 2000, 廣開土王陵碑文 倭關係記事 考察. 東國史學, 34권, 57-98.
7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주)사계절출판사, 5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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