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국재울산가설고(任那國在蔚山假說))

Imna(任那) in the Ulsan(蔚山) Area: A Hypothesis on the Geographical Location of the Kingdom of Imna

박정아 (Park, Jeong-A; 필명)

요약

본고는 임나관련 사료를 ① 국가로서의 임나가 아니라 국제외교기구로서의 임나를 말하고 있는 기사들, ② 경상도의 비신라권 전체를 총칭하는 대표명사로서 임나라는 용어가 사용된 기사들, ③ 국가로서의 임나를 전제로 하면서, 어느 지역의 대표명사로도 쓰이지 않은 기사들로 구분한 다음 ③의 기사들과 기타 사료 및 유물자료 등을 중심으로 임나국의 위치를 찾아본다.
물론 현재 임나를 국가가 아닌 국제 외교기관으로서의 실체를 가진 것 등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유력하나, 『삼국사기』 「열전 강수전」, 「鳳林寺 眞鏡大師塔碑」, 「호태왕비문 영락 10년조」, 『일본서기』 「수인기」 2년조 등은 명백히 국가로서의 임나를 상정하고 있으므로 임나국을 상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간 임나국의 위치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까지는 김해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김해설도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새로운 모색의 필요가 있다.
본고는 임나국은 최초 울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임나의 이칭 三間名이 임나가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시사를 주는 점에 비추어, 『삼국지』「변진한조」의 彌離彌凍國, 難彌離彌凍 國, 古資彌凍國의 3개의 彌凍國이 三間名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울산지역에 三同面, 고사동 등 미동국과 관련성이 인정되는 지명이 집중하고 있으며, 광개토왕비문상 임나관련 지명인 염성 역시 울산 지역에 나타난다는 점, 그 이외에 임나관련 지명인 웅천, 다다라 등의 지명도 울산에 나타난다는 점, 임나 4현의 지명도 울산 등에 비정할 수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울산은 남한지역에서 찾기 힘든 북으로 바다를 면한 지형이고, 각종 유물이 신라의 경주 지역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출토되고 있으며, 일본과의 관련성이 강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점도 임나가 울산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분석해보면 임나국은 529년 경(신라 법흥왕대)에 신라에 복속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의 가설의 결과를 대신라관계에 적용해보면 신라가 너무 작다거나 신라와 임나가 너무 가깝다거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으나 이는 『삼국사기』에서 비롯된 초기 신라의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거도설화를 초기 신라가 울산, 부산 지역을 정복한 것으로 본다면, 임나가 울산이나 부산 등에 있을 수 없다는 근거로 볼 수 있을 것이나, 본고는 거도설화는 이사부의 행적을 분식해놓은 것으로 보고 실사는 법흥왕대의 일이라고 본다.

주제어

울산, 임나, 임나국

목차

  I.   머리말
  II.  본고의 검토 범위와 한계
  III. 임나국의 존재 여부
  IV.  임나국 위치에 관한 여러 학설 검토
  V.   임나국 울산 가설
  VI.  임나의 강역과 그 변천에 대한 추정
  VII. 가설의 결과 및 가설검증
  VIII.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1]

임나는 우리 사학에 있어서 매우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일본의 남선경영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나라고 하면 그 자체를 蛇蝎시 하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반면, 임나를 매개로 한국의 일본 경영을 주장하려는 입장도 분명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임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나아가 적극적 위상부여를 시도한다.

임나가 가지는 그 인종적, 민족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함의로 인하여 임나는 그 존재 자체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의미부여 이전의, 순수한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의미부여 이전에 사실 의 확정이 우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II. 본고의 검토 범위와 한계

우선 본고가 임나라는 명칭이 나오는 모든 사료를 그 검토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논의의 대상을 한정한 것은 필자의 역량 부족에도 한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나, 반드시 그러한 원인만은 아니다. 필자는 임나관련 사료(특히 『일본서기』 기사) 가운데는 성격이 다른 3가지 것이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任那' 라는 이름은, 한국 측 사료에서 보아『三國史記』「强首傳」의 '任那加良人', 「眞鏡大師塔碑文」의 '任那王族',「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 등 세 군데밖에 존재하지 않으나, 일본 측 사료인『日本書紀』에는 총 215회, 『신찬성씨록』에는 7회나 나오고 있다고 한다. 반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오직『日本書紀』에만 5회 나오고 '日本府'라는 용어도 同書에만 35회 나오는데(『일본서기』 안에 인용된『百濟本紀』와 관련하여 「欽明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雄略紀」 8년(464) 2월조의 1 例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欽明紀」 2년(541) 4월조부터 13년(552) 5월조의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특히 '任那日本府'라고 되어 있는 것은 「欽明紀」 2년 4월조에 2회, 7월조에 2회, 5년(544) 11월조에 1 회의 총 5 例라고 한다(김태식 1993). 필자는 이러한 사료들이 모두 임나국을 전제 로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래에서 크게 분류해본다.

첫째, 임나관련 기사 가운데는 국가로서의 임나가 아니라 국제외교기구로서의 임나를 말 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다. 이런 기사들은 특히 임나일본부[2]라는 결합형 명칭으로 나타나 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 기사는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국 임나의 위치 구명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나일본부 또는 일본부라는 용어는 주로 『일본서기』 「欽明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웅략기」 1건 예외), 이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연구는 일본부가 일종의 국제외교기구적 성격(그 주도주체와 표현의 강약 등의 차이는 있음)을 가진 것으로 귀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학설의 흐름은 「흠명기」의 상당수 기사들이 국제외교기관적 이미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국제외교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이 타당하다면, 이와 관련된 기사로서는 임나국의 직접적 위치를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상해에 비정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 외교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가 어디에 있었는가는 국가로서의 임나국(이런 관념이 인정될 수 있다면)이 어디 있었는가의 문제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역의 관계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으로서는 후술하는 임나 함안설은 바로 일본부의 위치에 관한 기사에 현혹되어 임나국의 위치를 잘못 잡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임나관계 사료 중에는 경상도의 비신라권 전체를 총칭하는 대표명사로서 임나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후술하는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 기사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바, 이러한 기사에서 사용된 임나라는 용어는 경상도 일대에서 비신라권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물론 신라권의 확장에 따라 이러한 용례가 가리키는 범위 자체에도 변화가 있으나, 대표명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므로 하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종래 영남 지역을 신라권과 가야권으로 나누는 통설과 달리 이를 3분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3]. 따라서 영남의 비신라권은 가야와 임나(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비신라권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임나를 사용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경남-부산전체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논자에 따라, 부산-경남권, 경남권, 부산권 등의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영남의 비신라권지역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임나가야, 가야, 임나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4]. 그리고 만약, 임나가 비신라권 전체를 지칭한 용어로 사용되었음에도 이를 근거로 임나의 위치를 비정한다면, 이는 임나국의 위치를 비신라권 전체로 확대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비유하자면 부산-경남지역 전체가 부산에 속한다는 희극적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으로는 임나가 남한의 상당한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일본 학자들의 남선경영론 [5] 은 바로 대표명사로 쓰인 임나의 용례에 현혹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셋째, 후술하는 것처럼 분명 국가로서의 임나를 전제로 한 것이고, 어느 지역의 대표명사로도 쓰이지 않은 기사들이 있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기사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임나관련 사료를 한정하다 보면 본래 풍부하다고 할 수 없는 임나의 위치관련 기사가 더욱 부족해질 수 있다. 그러한 부족을 본고는 종래의 임나관련 기사라고 보지 않았던 일부 사료를 추가하고, 고고학 유물의 분포상황 등을 추가하여 보강하였다. 그럼에도 후술하는 것처럼 본고는 여러 간접 증거들의 종합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실 임나의 위치에 대하여 직접 증거가 있다면 본고가 가설이라는 표제를 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본고의 주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간접 증거들의 결과가 한 지역으로 귀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연이라고 보기만은 석연치 않다.

본고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임나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이 한, 일 양국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가는 필자의 판단 대상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본고는 후술하는 것처럼 임나국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어디였을까의 문제만을 검토하고, 그 성격의 문제는 검토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III. 임나국의 존재 여부

최초 임나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대화정권의 왜왕이 남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기구라는 것(末松保和 1949)이었고 그 지배영역도 호남권 또는 남조선 전체라는 것이었으나, 현재는 이러한 견해들이 대체로 극복되면서, 임나일본부는 왜왕의 사신집단(請田正幸, 李永植) 이라거나, 왜왕이 현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설치한 정치집단(山尾辛久)이라거나, 백제의 派遣軍司令部(천관우, 김현구)라거나, 백제가 안라에 설치한 倭國使節 駐在館(김태식)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대세(특히 우리나라에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견해를 종합하면 임나일본부는 국제 외교기관으로서의 실체를 가진 것이거나 파견 군사령부라고 보는 것이므로 주민에 대한 지배를 전제로 하는 국가 내지는 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은 없거나 매우 약해진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를 부정할 의도도 능력도 없다. 문헌사학계의 능력 있는 학자들이 이렇게 본 것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며, 필자가 보기에도 그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국가로서의 임나를 상정한 것으로 이해되는 사료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고 본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래와 같은 사료들에서 나타나는 국가로서의 임나의 이미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의 방법은 이러한 사료들을 분리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이 주로 연구대상으로 삼은 『일본서기』 「흠명기」 등의 임나일본부 또는 일본부 기사와 다른 사료에 나오는 국가적 성격의 임나국 기사를 분리하여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본고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후자의 방법을 취해본 것이다.

임나를 국가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일부 기사들을 본다.

1.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 「강수전」

(전략). 태종대왕이 즉위하였을 때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그 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왕의 앞에서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러이 여겼다.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밑줄 필자)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선생이라 불러야겠다. 하고, 그로 하여금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하였다. 글이 잘되고 뜻을 다 폈음으로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 (후략) [6]

위 기사에서 강수는 임나가야인(任那加良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가라는 통상 국가를 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점만으로도 위 기사는 임나를 국제외교기관으로 보는 설들과 잘 맞지 않는다. 더욱이 국제외교기관은 지배하는 영토와 국민이 없다는 점에서 위 기사는 그에 맞지 않는다. UN본부가 있는 뉴욕이나 WTO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 태어났다고 '나는 본래 유엔인이다'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본인이 그 기관에서 근무하였다면 그러한 표현(예컨대, '나는 본래 UN 사람이다'와 같은 표현)도 가능할 것이나, 강수의 어린시절부터 쓰고 있는 강수전에 강수가 임나에 근무하였다는 서술은 없다. 더욱이 강수전에는 강수의 아버지인 석체(昔諦)가 나마 벼슬을 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미 전대부터 신라벼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강수가 임나 벼슬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위 기사는 강수가 본래 임나국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고 이는 국가로서의 임나를 상정하여야만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본다 [7].

2. 「鳳林寺 眞鏡大師塔碑」 5행

대사의 이름은 심희이고 속세에서의 성은 신김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왕족 초발성지이 다. 매번 이웃나라에 시달리다가 신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은 [8]. (후략)

위 기사에서는 임나에 왕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제외교조직으로서의 임나일본부를 상정하는 견해들에 의하면 임나일본부에는 경, 대신, 집사, 장군 등은 있을 수 있으나 국가의 왕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왕족'이라고 하여 세습적 신분으로서 표시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임나를 국가로 보면 자연스러워 진다.

3. 호태왕비문」 영락 10년조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割 新[羅]城鹽[9]城, 倭[寇大]潰. 城 」

위 기사에 의하면 임나는 '가라'로서 일반적으로 나라에 붙이는 명칭이 붙어 있다. 게다가 종발성 [10] 이라는 임나에 속한 영토가 나오고 있다. 국제외교기관에 영토가 있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국가를 전제로 하여야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4. 『일본서기』 「수인기」 2년 [11]

『일본서기』 「수인기」 2년조에는 任那國人 또는 意富加羅國人 蘇那曷叱知가 숭신 대 에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서는 모든 부분에 서 임나를 국가로 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서술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수인이 소나갈질지에게 임나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改汝本國 名追負御間城天皇御名便爲汝國名"라고 하여 나라 國자를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른 기사들 [12] 도 찾을 수 있을 것이나 위의 기사만으로도 임나관련 기사 가운데 국가로서의 임나로 읽어야 할 기사들이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들은 임나일본부를 국제외교기관 등으로 볼 때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기사들을 『일본서기』 「흠명기」를 중심으로 하는 기사에 나오는 외교기관적 (임나)일본부와 분리해서 보고, 위와 같은 기사들을 근거로 '임나국'의 존재를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지나치게 무리한 주장이 아니길 희망한다.

IV. 임나국 위치에 관한 여러 학설 검토

임나국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 있었던 것일까 하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본장에 서는 임나의 위치에 대한 기존의 몇몇 학설 [13] 을 간단히 본다. 학설을 검토하는 것은 필자의 견해와의 비교를 위해서이지 그 비판이나 검증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래의 모든 견해는 여전히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고 본다.

1. 고령 대가야 = 임나국설

고령 대가야를 임나로 보는 설은 임나의 전 이름 또는 이칭인 의부가야에서 비롯된다. 意富가 일본어로 오호로 발음되고 오호의 뜻은 大라는 점에 착안하여 의부가야는 대가야라 고 보는 것이다. 이 설은 북쪽이 바다로 막히고 계림의 서남(고령은 바다와는 멀고 경주의 서쪽임)이라는 임나묘사에 부합하지 아니한다는 약점 [14] 을 가진다.

2. 김해 금관국=임나국 설

금관가야를 임나로 보는 견해는 매우 유력한 견해 [15] 로서 학자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다음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다. 위의 의부가야에 관한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만 대가야란 가야연맹의 영도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2-3세기의 대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이고, 이점이 『삼국유사』 권2 「駕洛國記」에 "國稱大駕洛"라고 하여 표시되어 있으므로 의부가야는 김해의 금관국으로 볼 수 있다는 점, 위에서 본 진경대사탑비문상 김유신이 임나 왕족인데, 김유신은 또한 금관국 구형왕의 증손이므로 금관국=임나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한다. 또한 이 설은 『일본서기』의 임나지형묘사를 의식하여, 당시의 해수면이 높아 김해-양산평야자체가 바다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북쪽이 바다로 막혔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한다 [16].

필자도 김해=임나설에 많은 관심이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본과의 관련성이 흔히 언급되고 있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및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그 판도에 들어오는 큰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17].

우선 『한원』 권3 「신라전」이 가야와 임나의 幷在를 말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관국=임나국설은 대표적인 가야인 금관국과 임나를 동일시하게 되어 자연스럽지 않다. 게다가 이 견해가 김해를 북이 바다에 접한 지형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물론 고대의 해수면 높이가 현 해수면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 견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김해-양산 평야의 일부분이 물에 잠겨 있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시점과 정도의 문제(이를 바다로 볼 수 있을 정도인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호수바닥의 퇴적물 변동을 근거로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000년까지의 해수면 수준 변동을 연구한 일본의 연구[18] 에 의하면, 대체로 기원전후의 시점에는 현 수준보다 3.5m 이상 해수면의 높이가 낮던 것이 점차로 상승하여 기원후 200년 무렵에는 현 수준과 비슷하거나 1m 정도 높은 수준에서 해수면이 형성되었고, 500년경에는 갑자가 해수면이 하강하여 현 수준보다 3.5m 이상 낮아졌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를 받아들인다면, 김해-양산 평야의 일부(그중 해발고도가 낮은 부분)가 일정한 시기에 물에 잠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바다(海)라고 할 수 있을까는 역시 의문이다. 현재보다 최대 1m 정도의 수면상승을 전제로 그 지역의 환경을 상상해보자. 낙동강은 김해-양산 지역에 이르면 유속이 매우 느려졌을 것이고(유역의 폭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물줄기도 갈렸을 것이다), 그처럼 매우 천천히 흐르는 물 가운데 현재 높은 부분은 마른 땅으로 남고, 낮은 부분은 물이 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심은 무릎높이에서 허리높이, 깊어야 가슴높이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정도 수심으로는 정상적인 선박운행은 불가능하다. 또, 이런 환경이 수년 지속되면 외국의 큰강하구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는 대형 습지 생태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상태를 바다로 볼 수 있는 것인지 필자는 매우 의문스럽다. 고대인들이 이러한 환경을 바다로 보았다고 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인식능력을 너무 낮게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김해-양산 지역에 바다가 형성되었다고 볼 정도의 해수면 상승이 되려면 5-10m정도의 해수면 상승을 전제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해수면 상승이 김해 지역에 국한하여 발생되는 국지적 현상일 수 없는 이상, 만약 그 정도의 해수면 상승을 상정한다면 한강의 상습침수 저지대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그 시대에 수몰되어 있었어야 할 것이고, 해안이나 강변에 위치한 우리나라 모든 고대유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필자가 보기에 김해의 구야국(수로왕의 가락국을 김해로 볼 수 있고, 구야한국을 김해로 볼 수 있다면 [19])의 경우 <남쪽>으로 바다를 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기사들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 중 수로왕이 허왕후를 맞아들이는 기사를 보면, 수로왕은 허왕후가 올 것이라는 점을 신하들에게 말하면서 留天干이란 신하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이 망산도는 수도 남쪽이다 [20]. 또, 유천간등이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허왕후가 나타나는데, 이때 허왕후의 배는 서남쪽에서 북쪽으로 진행하였다 [21]. 바다의 북쪽이 금관국임을 말하는 것이다. 허왕후는 육지에 상륙한 다음 높은 언덕 (高嶠)에서 쉬면서 바로 왕궁으로 가지 않았는데 이에 수로왕은 왕후를 모시러 행차를 한다. 그런데 이때도 행차하는 방향이 대궐에서 서남쪽(闕下西南)이다. 이 전체의 기사를 보면 가락국의 경우 수도의 서남방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지형묘사는 고지도에서 볼 수 있는 김해지역의 지형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다.

또,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조」를 보면, 대방에서 출발하여 왜국에 이 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그 설명부분 중 구야한국에 관한 부분을 보자. 바다로 나온 배는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진행하고 가다보면 그 북쪽 언덕의 구야한국에 도착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22]. 이 기사를 위처럼 해석한다면 구야한국은 남쪽으로 바다를 접한 지형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구야국-금관국을 남해상의 해상 요충지에 위치한 양항을 가진 도시로 이해 하면서 그 북쪽에 바다와 항구가 있다는 생각은 상식에 반한다. 만약 금관국의 항구가 낙동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조금 올라가는 것은 파도와 태풍을 막는다는 점에서 양항의 조건일 수 있지만 김해의 북쪽에 바다가 있고 항구가 있다면 이 경우는 정말 한참을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있었다면, 금관국이 적어도 남해로의 요충지로서 발전한 것은 아닐 것이다.

3. 임나=부산설 [23]

이설은 임나를 낙동강 동안의 부산지역에 비정한다. 임나=김해설이 가지는 몇 가지 문제와 위 『한원』에서 가야와 임나가 병재하고 있다고 기재한 점, 『삼국지』에서 말하는 구야한국이 부산이라는 점 [24], 임나의 이명인 意富가야의 일본어 음인 '오호'에는 업힌다의 뜻이 있으며, 이는 한국어 '의붓'과 통하므로 의부가라란 맡은 가라, 점령한 가라라는 의미라는 점, 『삼국사기』 「거도전」에 나오는 거도가 점령한 3개의 가라가 임나라고 볼 수 있다는 점, 고대에는 현 을숙도는 없었고 이 부분이 모두 바다였으며, 현재 육지인 금정산과 구포 사이의 평야가 당시 바다였으므로 바다를 북으로 접한 지형이라는 점 등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설도 장점이 많고 임나가 3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 같지만, 구야한국을 부산으로 비정하는 것이 정당한지, 근본적으로 『삼국사기』에 석탈해의 부하로 되어 있는 거도의 행적을 신라 측과 석씨 신라 내내 쟁패를 한 왜인들의 행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을숙도가 바다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산의 서쪽일 뿐이고, 금정산-구포 사이부분이 바다였다는 주장은 김해=임나설의 주장과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4. 임나국 함안설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에 있는 임나 패망기사 중 임나 10국에 안라국이 있고 이는 함안이라고 보아 함안이 임나의 위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임나가 경남도 지역, 특히 낙동강 서안 일대를 나타내는 대표명사로 쓰인 용례와 임나소국으로 쓰인 용례를 혼동 한 견해로 본다.

5. 임나국호남설

임나를 호남일대에 비정한 견해로 일본 학자들이 초기에 많이 주장하였다. 주로 방법론상으로 임나사현인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에 대한 지명고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 학자 간에도 주장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다르다. 현재는 세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6. 임나국 대마도설

대마도 대강(大綱)이 상치리, 소강(小綱)이 하치리라고 보는 견해이다. 북이 바다로 막힌 지형은 한반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고 대마도가 적지라고 보는 것이다(문정창, 이병선). 또한 이 견해는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제6에서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 북계에 있다고 한 점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7. 임나국 일본설

북한의 김석형이 유명한 분국설 [25] 을 주장하면서 세운 견해로 현 히로시마(廣屠) 동부와 오카야마(岡山) 지역에 가야 출신 도래인들이 세운 나라가 임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모든 임나기사는 한반도 기사가 아니라 일본내 분국들과 大和정권간의 기사라는 것이다. 일본의 남선경영론에 대한 부인의 의미가 강한 견해라고 본다.

V. 임나국 울산 가설

위의 많은 견해 가운데 아직 통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고 대체로 김해설이 다수설인 것 같다. 이에 필자는 임나국이 울산지역일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다만, 필자의 견해가 이미 포화상태인 학설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될까 우려하는 마음이 크다.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보아주면 한다.

우선, 임나의 명칭에 대하여 보자. 任那의 옛 이름은 意富가라라 하고 [26], 유명한 이칭으로 彌摩那가 있으며, 彌麻奈, 三間名, 御間名 등의 이칭도 있다. 의부가라에 대한 분석으로 김해설과 부산설이 탄생한 것은 위에서 보았다. 그런데, 일본어의 경우 한자사용에 있어서 음독과 훈독이 있으므로 이칭을 만들때도 음으로 만들어진 경우와 뜻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종래 임나의 이칭의 경우 주로 미마나의 발음에 의해 만들어진 이칭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필자는 彌麻奈의 경우는 발음에 의한 것으로 보지만 三間名, 御間名의 경우에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우선 名 자의 경우 다이묘(大名)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名자가 일본에서 나라, 군, 성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間자는 나라를 세는 수량사로 본다. 만약 그렇다면 御間名의 경우는 숭신을 높이는 차원(숭신의 나라, 임금의 나라라는 뜻)에서 御자가 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三間名의 의미는 3칸 나라 정도{'미(현재 일본어 표기는 ミ 또는 み)'가 일본어로 3을 의미한다}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나는 세부분으로 이루 어 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27]. 결국 3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 이게 임나의 진정한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그럼 우리 역사상 3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찾아보자. 우리나라 역사상 3개의 부분으로 된 나라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구려, 백제는 5개, 신라, 가야는 6개의 부분으로 이루어 졌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성호, 김상씨는 3개의 구성부분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찾기 위하여, 이를 거도의 활동상과 연결시켜, 거도가 점령한 3개의 나라 [28] 가 임나라고 보았고, 그 결과가 임나부산설이다. 그러나 거도는 『삼국사기』상 신라측 인물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물론 『삼국사기』 편찬과정에서 임나의 기사가 신라기사로 둔갑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거도의 행적을 임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적대국의 기사가 신라기사에 끼어들어갈 가능성은 적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필자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다. 2-3세기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의 상황을 전해주는 유일한 문헌인 『삼국지』 [29] 에서 임나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삼국지』 「한조」를 보자. 천하의 문장이라는 진수의 문장이 유독 「진변한조」 부분만 얼마나 체계가 없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설명체계를 보면 먼저 韓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다고 설명한 후, 그 다음 마한에 대하여, 마한의 위치, 마한의 소국명, 마한의 유래(위만과 준왕남천기사 등), 마한과 중국과의 관계(염사착 기사 등), 마한의 풍속의 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체계가 있는 문장이다. 반면 그 다음에 오는 진변한에 대한 설명은 그런 조리 있는 설명이 아니다. 우선 진한에 대하여 진한의 위치와 유래에 대하여 쓰고 12국이 있다고 한 다음(국명은 쓰지 않음), 갑자기 변진에 대하여(스스로 위에서는 변한이라고 하고는 여기서는 변진이라는 용어를 사용) 12국이 있다고 하고는 진한과 변진의 소국 24개국(마연국은 2번 썼음)의 이름을 순서 없이 막 쓰고, 다시 진한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다음에 변진에 대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필자가 보기에 변진조는 다른 부분과 달리 그 문장이 왔다갔다(진한, 변진, 변진한, 진한, 변진의 순으로 설명)하는 인상이 짙고, 변진이라는 용어도 부적절하고, 24국 설명에도 굳이 변진과 진한을 섞고는 그 나열순서에도 아무런 질서가 없으며, 같은 나라를 2번 쓰기도 하고 작위적으로 진한과 변진에 12개국씩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수의 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워본다.

진수가 마한에 대하여는 군현들을 통하여 상당한 정보가 있었다. 군현과 직접 교통한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한과 변한에 대하여는 마한을 통해 얻어들은 약간의 정보밖에 없었다 [30]. 나라이름과 약간의 풍속정도만 알고 있었고 어느 나라가 변한인지 어느 나라가 진한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견인인 장화가 모시는 사마씨들의 근거인 요동, 북평지역에 대한 통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바깥의 만이들을 모두 군현에 복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그들을 많고 크게 그리고 질서 있게 서술한다는 방침에 따라 진변한에 대한 부족한 정보를 적당히 얼버무린 것이다. 따라서, 진수가 나라이름앞에 변진이라고 적어 분류한 것은 믿기 어렵다.

이러한 가정하에 『삼국지』 「변진한조」에서 임나의 후보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彌離彌凍國, 難彌離彌凍國, 古資彌凍國이 눈에 들어온다. 이 3국은 彌凍國이다. 미동국의 앞에 미리, 난미리, 고자라는 일종의 구별기호를 적고 있으나, 이는 마치 남한, 북한, 남예멘, 북예멘, 동독, 서독, 대월지, 소월지, 마한, 진한 변한이 그 이전에 한국, 예멘, 독일, 월지, 한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동국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국명이다. 미동국의 존재를 상정하고, 위 미리미동국, 난미리미동국, 고자미동국을 그 미동국의 구성부분 내지는 미동국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를 3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미동국으로 가정해본다 [31].

그럼 미동국이라는 국명이 임나국에 맞는 이름인가를 살펴본다. 彌凍國에서 彌는 위 임나의 이명 부분에서 본 바와 같이 三과 통하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凍(동)은 그 음이 나라 내지는 지역의 단위로 쓰이는 洞과 같다는 점에서 나라 내지는 지역의 수를 세는 수량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國이 名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은 위 임나 이명 부분에서 간단히 본 바와 같다. 그러하다면, 『삼국지』의 미동국은 임나의 이명인 三間名과 통하는 이름일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이를 통하는 것으로 가정해본다.

나아가 미동국을 어디로 비정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본다 [32]. 현재, 울산 광역시 울주군에는 三同面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선시대부터는 이 명칭(三同 또는 三洞)이 사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고지도(도1의 우측 하단 표시 부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언양현(현재 울산 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속하였다. 필자는 이 三同(또는 洞)이 미동국의 彌凍과 통한다고 가정하였는바, 위 삼동면은 그러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도 1. 각읍 지도(1703∼1750) - 언양 [
33]

또 고자미동국의 구별 의미소인 '古資'를 보자 [34]. 고자는 곶의 음차로 볼 수 있는바, 이는 바다로 돌출된 육지부분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이와 같은 곶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하여 古尸나 古沙가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울산 남구에는 古沙洞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아래 도 2 참고). 이 고사동은 본래 광역시가 되기 전부터 사용되던 지명으로 전에는 고사리라고 불렸다. 이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역시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선시대부터는 이 명칭이 사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현재 화력발전소와 온산공단이 들어서 해안선의 모습이 기원후 2-3세기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바다에서 울산만 안으로 들어와 있는 곳으로 고대의 항구로서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본서기』 「수인기」에 있는 임나의 지형적 조건 중의 하나 '북이 바다로 막힌 지형'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도 2, 3의 사각형 부분 참고).


도 2 현 고사동의 위치(
http://map.hanmir.com에서 인용)

도 3 조선지도 울산지역

또, 위 「호태왕비문」 영락 10년조는 고구려 군대가 임나가야를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바, 이 부분의 비문에 결락이 많아 완전한 해석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고구려 군사가 공취한 성의 이름이 일부 해독되고 있다. 그중 그동안 판독 불능으로 되어 있던 9행 34자가 가장 최근의 광범위한 연구자인 중국의왕건군(1993)과 북한의 손영종 [35] 에 의하면 '鹽'자로 읽힌다는 것이다 [36]. 만약, 이러한 독해가 옳다면 임나국관련 지명 하나가 추가되는바 이는 鹽城이다. 그런데, 울산의 옛지명(특히 태화강 북쪽, 도 2 원 표시 부분 염포동 참고)이 염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필자는 일단 미동국=임나국의 위치를 울산으로 비정해보고자 한다. 미동(삼동면), 염성(염포)이라는 지명이 이 울산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북이 바다로 막힌 남한의 몇 안 되는 지형에 고자미동국을 비정할 수 있는 '고사동'이 나타나는 점을 일단 최소한의 근거로 삼아본다. 아래에서는 여타 간접증거들로 임나가 울산에 위치하였다는 점을 검증해본다.

VI. 임나의 강역과 그 변천에 대한 추정

1. 임나의 최초 강역

임나의 최초 [37] 강역은 필자의 가정이 맞는다면 기원후 2-3세기에는 3개의 부분(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후술하는 지명고와 지형적 상황, 유적의 분포상황 등을 종합하여 추정해보면, 임나국은 현 울산 고사동을 포함하는 울산남구, 온산읍, 온양면, 서생면, 웅촌면, 양산시 웅상읍 일대와 울산 언양읍, 상북면, 상남면, 상동면 일대 및 울산 중구, 북구 일대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이렇게 되면 임나국은 동쪽은 바다로, 서쪽은 산으로(가지산 등 고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게 된다), 북은 신라와 접하는 강역을 가지게 된다 [38].

2. 임나 강역의 변화(4현 문제)와 멸망

가. 『일본서기』 「계체기」 6년조 [39] 에는 上치(多+口)唎, 下치唎 [40], 娑陀, 牟婁의 임나 4현을 백제에 넘겨주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41]. 이 기사는 511년경에 해당한다. 따라서 6세 임나는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2-3세기를 기준으로 임나가 3개의 구성부분으로 되어 있었다는 필자의 가정이 옳다면 그 사이에 강역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내용의 강역변화가 있었을까. 소위 '3+1'(한 지역의 추가)식의 변화였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좀 복잡하지만 '3+2-1'(두 지역 추가 한 지역 상실)방식 이라고 보고 있다.

나. 먼저 상치리, 하치리(혹은 상다리, 하다리 [42])에 대하여 본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비정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상치리, 하치리(혹은 상다리, 하다리)가 울산=임나국의 최초 3부분 중 남은 두 부분(결국 울산 지역)이라고 보고 있다. '치리'로 읽는 경우, 치는 산, 고개, 언덕 등을 나타내는 우리 고유어 '치'와 통한다. 또한 다리(多利)라고 읽는 경우 이 기재는 어떤 고유어의 음차로 보이는데, 필자는 상고어 다라 (dara) 또는 달(dar)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한자로는 '達' 등으로 표시되는데 그 기본의 미는 산, 고개, 언덕 등이다 [43]. 여기서 구릉이나 언덕위에 읍락이 형성되는 현상과 결합하여 '읍, 마을'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분석이 옳다면 상다리, 하다리는 上山, 下山이 될 것이고, 그 의미는 물론 산 자체가 아니라 산에 있는 읍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필자의 임나국=3소국의 가정에 대입하면, 3소국의 지명 중 2부분이 상산, 하산이라고 보게 되는바, 여기서 6세기를 기준으로 빠진 하나를 추측해보면 '中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울산 북구에는 중산동이 있고 여기에는 그 유명한 중산동 고분군이 있다.

여기서 중산동 고분군에 관하여 알려진 바를 간단히 보면, 본래 울산군 농소면 중산리 이화 마을에는 대형고분군의 존재가 일찍이 알려져 왔는데, 근자에 주택을 지으면서 이 고분군이 파괴되어 1991년에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이를 발굴조사하게 되었고, 창원대학교에서는 다시 1993년 3월에도 2차 발굴을 실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발굴 결과는, 먼저 중산동 고분군은 3개 층위로 되고 있어 상당히 긴 기간동안 상당한 세력의 정치 중심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도식적으로 말하면, 맨 아래층에는 토광 목관 내지는 목곽묘가 나오고, 중간층에서는 수혈식 석곽묘와 적석목곽분이 나오며, 맨 위층에서는 횡구식 또는 횡혈식 석실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몇 가지 점을 보면, 고총고분의 면모를 갖춘 24, 25호분은 현재까지 신라-가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고총고분이라는 점 [44], 24호 부곽에서 발견된 종장판정결판갑(縱長板釘結板甲)과 50호 목곽분에서 발견된 몽고발형주(蒙古鉢形胄)는 지금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갑옷과 투구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점 [45], 중간층에서 수혈식 석곽분과 적석목곽분이 같이 나온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중 3번째 점에 대하여 좀 더 보면, 적석목곽분은 흔히 김씨 신라의 전형적 묘제로 보는데 [46], 경주 인근에만 분포하고 널리 확산되지 않고 있는 반면, 수혈식 석곽묘는 경주권을 제외한 신라-가야 지역에 경주를 포위하듯이 나타나는 묘제인바, 중산동 고분군에는 이 두 묘제가 동시에 나타난다는 점이 이채롭다. 필자에게 이런 묘제의 의미를 부여할 역량이나 자격은 없으나, 자의적으로 추측해보면, 수혈식 석곽묘 세력이 이 중산동 지역을 지배하다가, 어느 시점(결론부터 말하면 5세기 초) 신라세력이 이 지역(태화강 북부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추측할 수는 없을까한다. 만약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6세기의 임나 4현에서 중산동 지역(필자의 추측으로 中치唎 지역)이 빠진 것이 자연스럽게 설명 가 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 이러한 가정하에 임나의 강역변화를 시간 순서에 따라 가정해 본다.

(1) 우선 최초(2-3세기) 임나는 3국(3현)이었을 것이다. 3현은 고자, 미리, 난미리로 불리기도 하고, 上, 中, 下치唎로 불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47]. 여기서 위의 도 3을 다시 보면 그 우측하단 원 표시 부분에 下山烽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필자가 고자미동국을 비정하였던 그 지역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山과 烽이 연속하여 쓰인 것에 비추어 보면 여기의 山은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의 뒤에 붙은 의미소(예를 들어 금강산의 뒤에 붙은 산처럼)가 아니라 하산이라는 고유명사의 일부라는 판단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필자의 가정처럼 下치唎=下山이고 이 지역이 고사동 지역이라는 판단도 많이 무리하지는 않 다고 생각한다 [48]. 필자는 하산-중산-상산(상산계 지명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찾지 못하였으나 필자는 후술하는 것처럼 거도가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는 于尸山國이 '웃산(上山)'의 의미이며 이것은 언양지역이라고 생각한다)으로 연결되는 지역이 임나의 초기 영역이라고 본다.

(2) 3세기 후반부터 4세기까지를 임나의 확장기로 상정한다. 필자는 이 시기 임나의 강역확대는 신공기를 재해석하여 알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는 본고의 범위를 넘는 작업으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이 시기 초기에 확대된 영역이 사타, 모루이고, 사타는 부산 기장읍 대라리 사라마을, 모루는 부산 초읍동 [49] 바로 옆의 모라동에 비추어 사타는 기장지역 [50], 모루는 부산동래지역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강역확대 및 본고에서 다루지 않는, 이 강역을 넘는 영향력 확대로 인하여 임나라는 이름이 경남지역의 대표 명사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3) 5세기는 임나의 축소기이다.그 계기는 광개토왕의 임나정벌이라고 생각한다. 「호태왕비문」 영락 10년(400년)조에 의하면 임나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함락된 성이름 중에 '鹽城'이 나온다는 점은 이미 위에서 보았다. 이 부분 비문 중 50여자가 마멸되어 고구려의 임나지역 작전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태화강 이북의 '鹽浦'지역이 점령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가능할 듯싶다. 위에서 본 태화강 북쪽지역인 중산동 지역의 신라지배 현상과 관련하여 음미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태화강을 넘어 기장, 부산 지역까지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는지는 불명하다. 그러나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도 이 시기 고구려계 유물이 나온다는 보고들이 옳다면 일단 모두 공격을 받았다고 볼 여지가 많아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로 인하여 임나국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고, 복건되었다고 본다. 『삼국사기』 「실성왕조」 원년(402년)기사에 의하면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왜국에 보낸 사실을 알 수 있는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초기 신라를 침입하는 왜인을 임나인으로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 기사가 여전히 임나의 건재를 말해준다고 보고 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태화강 북쪽지역을 신라가 영위하는 대신 더 이상의 적대행위 종식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인질 미사흔을 보내는 정치적 타협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일본서기』 「계체기」 6년조의 임나 4현 기사는 이러한 단계를 거쳐 남은 임나국의 4부분을 말하고 있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4) 그럼 임나의 멸망시점은 언제인가. 임나국을 논하는 거의 모든 견해가 임나의 멸망을 562년으로 보는 것 같다. 소국 임나를 전제로 하는 김상호, 김상씨도 562년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의 기사이다. 그 내용을 보면, "23년 춘 정월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처 멸하였다(일서에는 21년 임나가 망했다고 한다) 통틀어(總言) 임나라 하고 세분하여서는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山半下國, 乞飡國, 稔禮國 [51] 합하여 10국이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일견 이 기사가 임나의 망국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임나국의 멸망을 말한 기사로 보지 않는다. 여기에 사용된 總言 任那라는 말 자체가 경상남도 전체 또는 그 중 낙동강 서안의 가야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명사로 사용된 것으로 본다. 總言이 한마디가 스스로 대표명사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임나 10국내에 함안지역의 독립국임이 분명한 안라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맨 앞에 나오는 가라국을 고령 대가야로 보면(『일본서기』에서는 김해지역은 남가라라고 흔히 칭하므로 이 가라국은 대가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52]) 『삼국사기』에서 토멸하였다고 한 진흥왕 23년 (562년)에 정확히 맞아 들어간다 [53]. 다시 말해서, 위 흠명 23년기사는 소국 임나국의 멸망을 말한 기사가 아니라 경상남도 지역 특히 낙동강 서안 지역의 가야 지역 전체를 신라가 토멸완료 하였음을 말하는 기사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즉, 대가야, 아라가야 등 이 지역 모든 소국은 562년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그 즈음에 모두 망한 것으로 본다.

(5) 그럼 소국 임나는 언제 망하였는가. 다시 말하면 울산-부산 지역이 언제 신라의 지배에 들어갔는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경상남도 지역의 국제관계를 말하는 기사들을 순서 있게 늘어놓아 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래에서 순서대로 본다.

504년 [54] 신라가 밀양-양산지역(낙동강 좌안 지역)으로 진출하여 지배권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55]. 점령한 땅에 새로 방어 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508년 백제가 임나지역의 통제를 강화한다. 백제는 이해 임나의 백제 백성에 대하여 호적 정리를 단행한다 [56].

511년 백제의 요구에 따라 대화정권은 임나 4현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백제에 내어준다 [57]. 왜 갑자기 임나의 보전방법이 문제가 되었을까. 필자의 임나=울산 가설이 맞는다면, 임나의 북쪽(경주-울산 북부지역)은 물론이고 그 서쪽(양산-밀양)까지 신라의 영토화 된 것(504년)이 이 지역(울산-부산 지역)의 방어에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고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임나는 신라에 포위 된 것이다. 반면, 이러한 백제에 대한 임나할양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턱밑에 백제의 영토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므로 강력 반발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반발은 『일본서기』 흠명 원년 9월조에 의하면 계체천황때 임나 4현을 백제에 준 일로 신라가 원망을 쌓았다고 되어 있는 점(新羅怨曠積年)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522년 신라는 고령지방의 대가야와 혼인관계를 맺어 신라 서쪽 경계를 안전하게 한 다음 [58],

524년 공격에 나서 신라남쪽의 땅을 점령한다 [59]. 필자는 이 신라 남쪽 땅이 김해 (남가라), 창원(녹기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위 『삼국사기』의 기사에 법흥왕이 가야왕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는 점과 아래에서 볼 기사들에서 갑자기 남가라와 녹기탄의 복건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신라측의 이 공격으로 임나는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되게 된 것이다. 만약 이처럼 임나가 신라에 포위된다면 대화정권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대화정권측의 어떤 움직임이 예상된다. 계속 살핀다.

526년 북규슈에서 磐井의 亂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난의 원인을 말하는 부분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60].

"近江毛野臣은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패한바 있는 南加羅, 녹己呑을 회복하고 부흥시켜 임나에 합하고자 하였다(밑줄 필자). 그런데 이때 筑紫國造 磐井이 반역할 것을 음모하고 있었는바 이를 유예하여 몇 년을 지낸 상황이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뇌물을 磐井에게 보내 毛野臣의 군대를 막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磐井은 해로를 차단하고,..(후략, 필자)"

이 기사에서 필자는 첫째, 524년경 남가라(김해)가 신라에 일단 망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고, 둘째, 이에 대화정권이 모야신을 파견하여 남가라의 복건을 꾀하려 하였고, 셋째, 신라는 김해 지역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磐井에 영향을 미쳐 해로를 봉쇄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본다.

528년 반란을 진압한 대화정권은 드디어 모야신을 파견한다. 『일본서기』 계체 23년조 3월기사에 의하면 "이달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신라에 권하여 다시 南加羅, 녹己呑을 세웠다. 백제는 장군 伊貴, (이하 인명 생략. 필자)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하였다. 신라는 인국의 관가를 깨뜨린 것을 두려워하여 높은 관직을 보내지 않고, 夫智奈麻禮 등을 보내어 안라에서 조칙을 듣도록 하였다.(중략. 필자) 무릇 수개월간 당상에서 의논하였다. 백제 장군들이 당하에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이 기사에 의하면, 안라에서 백제, 신라, 대화정권의 모야신이 모여 회의를 하였고 그 결과 남가라 등이 복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추측하건대, 신라측이 일단 명분에 밀려 남가라와 녹기탄을 복건해주었지만 이 양국은 임나에 합하여진 것이 아니라(위 『일본서기』 계체 21조에 의하면 처음 의도는 이를 임나에 합하려는 것이었다) 사실상 신라의 지배하의 속국이 되는 것으로 낙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뒤이어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된다. 『일본서기』 23년조 4월 기사에 의하 면 임나왕 [61] 이 대정권을 방문하여 자신의 나라를 살려달라고 청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62]. 아마도 위 합의에서 복건된 양국이 신라의 사실상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논의가 되자 신라에 포위되게 된, 임나왕이 직접 대화정권에 항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 기사의 상호관계상 복건된 남가라보다 더 신라에 가까운 지역인 울산-부산 만이 임나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

여하간 위 기사에 이어지는 기사에 의하면,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따라 대화조정은 모야신에게 임나국의 이해를 존중하도록 지시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로부터 임나의 안 전을 보장하는 확약을 받으라는 일종의 재협상지시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모야신은 熊川(필 자는 울주군 웅촌면으로 본다 [63])에 이르러, 신라에 대하여 칙령을 들으라고 요구하는데, 신라는 이에 이사부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다다라 [64] 에 와서 대립한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깨지자 이사부는 그 일대 4개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모두 끌고 돌아간다. 이후 에도 임나국은 모야신과 임나왕 아리사등을 중심으로 웅촌면(『일본서기』 계체 24년 기사에 의하면 모야신의 본거지는 구사모라이다)-기장-부산지역에 명맥이 아직 유지된 것 같다. 이 기사는 자세히 볼 경우 임나국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또하나의 간접 증거를 보여준다. 이 기사를 지명을 중심으로 보면 먼저 모야신이 웅천에 가서 신라에 모종의 요구를 하고, 이에 이사부가 다다라에 군사를 이끌고 오자, 모야신이 다른 지역으로 피하였음에도 이사부는 다다라에서 3개월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만약 현재의 통설처럼 웅천이 창원 또는 마산이고 다다라가 부산 다대포라면 이 기사는 코메디같은 내용이 되고 만다. 근강모야신이 창원 또는 마산에서 불렀는데 이사부는 부산으로 가고 그럼에도 모야신은 도망하였다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필자의 비정처럼 웅천, 다다라 모두를 현 울산 웅촌면 지역으로 보면 기사가 합 리적으로 되살아남을 알 수 있다. 웅천, 다다라와 같은 지명이 한 곳에 나타나는 것이 우연만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

529년 복건 과정에서 임나측 아리사등과 대화측 모야신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신라-백제군대의 개입을 부르고 (아리사등 측이 신라군대를 부른다), 모야신은 대화조정으로 소환되다가 죽는다 [65].나중에 나오는 『일본서기』 계체 2년 4월조와 5년 3월조의 탁순국 [66] 상황을 보면, 이 이후 법흥왕 대의 어느 시점에 임나국은 망한 것으로 보인다 [67]. 이후 임나는 복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68].

532년 금관국의 왕은 신라에 귀부한다. 필자는 이 기사가 금관가야(남가라, 김해)의 항복을 말하는 기사라고 본다. 신라는 대화측 세력이 이 지역에서 소환되자 바로 김해지 역을 다시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69].

540년 안라(함안), 가야(고령), 卒麻, 散半奚 [70], 多羅, 斯二峙, 子他 등이 백제에 몰려가, 백제왕의 칙서를 들었다 [71]. 그간 백제와는 백제가 임나 4현(511년), 己汶, 滯沙 (512년) [72], 多沙津(528년) [73] 등의 가야 소국들을 영토화 하고 변한 지역 여기저기에 군령 성주를 두고 있어 그 관계가 소원하였음에도, 이들이 갑자기 단체로 백제왕에게 찾아간 것은 그만큼 신라의 위협이 컸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8년전에 남가라가 신라에 투항한 것 [74] 이나 536년 경의 신라 측 공격 [75] 이 가야임나 제국에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위 흠명 2년조 기사에는 백제 성왕이 과거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백제-가야 제국들간의 구원을 털고 신라에 대항하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다만, 가야 제국들간, 또 소국 내부적으로도 행동이 통일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에 붙어 살 길을 도모한 사람들과 백제를 업고 독립을 추구한 세력이 나뉜 것으로 보인다. 안라 등 일부는 나중에 백제의 강화에 위협을 느끼고 고구려를 끌어들여 살 길을 도모하기도 한 것 같다.

543년 백제성왕은 안라와 신라의 국경이 큰강(낙동강일듯함)을 끼고 있다고 말하고 이 강을 따라 6성을 짓고, 이에 대화측이 병사 3,000을 제공하고, 백제가 의복과 식량을 제 공하는 방법으로 신라를 막자는 안을 제시한다 [76]. 낙동강 좌안의 신라 5성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인데, 이 기사를 보면, 이 시점 신라-가야 제국 간의 경계가 낙동강 중류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547년 백제-대화간의 군사동맹이 체결된다 [77]. 이로서 백제 성왕의 주도하에 백제-신라간의 나제동맹에 더하여 백제-가야제국(540년), 백제-왜(547년)가 규합됨으로써 강력한 대 고구려 공동투쟁전선이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시기 백제는 대 고구려 전선에 승기를 잡아 한성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낙동강 서안 지역(대표 명사 임나지역)은 대체로 평화가 유지된다.

553년 경 백제-신라간의 동맹이 깨지고, 554년 겨울 12월경에 백제 성왕이 사망하자, 낙동강 서안 지역에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고 신라의 세력으로 하나씩 흡수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560년 신라는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여 낙동강 서안의 안라, 가야 등 10국을 멸하였다고 생각한다 [78].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기사는 소국 임나의 멸망을 말한 기사가 아니라 대표명사로 지칭되는 임나지역의 멸망을 말한 기사라고 본다 [79] [80].

VII. 가설의 결과 및 가설검증

이상에서 필자는 첫째, 임나라는 명칭은 경상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의미로 쓰인 경우와 임나국을 전제로 하여 쓰인 경우가 있고, 또 그중에는 외교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를 전제로 하여 쓰인 경우도 있다고 가정하였고, 둘째, 그러한 용례 가운데 소국 임나국으로 쓰인 기사들을 가지고 임나국의 위치를 비정해보면 울산을 중심으로 기장, 부산 동래 정도까지를 그 강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해 보았다. 본장에서는 이러한 가설의 결과가 기존의 이해 및 사료들과 어떻게 조화되는지 여부를 보면서 가설에 대한 검증작업을 일부 시도해본다. 가설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다.

1. 임나-신라와의 관계

가. 임나의 강역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필자의 이상과 같은 가설에 대하여 임나국의 강역이 너무 작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있다. 특히, 임나는 최초 일본 측의 남선경영설과 관련하여 주장되었던 것이므로 상당한 광역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임나 4현을 전라도 전체에 비정하거나 임나의 강역을 남한 일대에 비정하기도 한 견해들에 비하면 필자의 가설은 너무 협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광역 이미지를 낳은 주요한 두 기사인 임나 4현 [81] 은 종래 그 비정이 잘못된 것이었고, 임나 10국의 경우 명백히 대표명사로 사용된 것을 (고의 또는 실수로) 간과하고 10국 전체가 임나에 속하는 것으로 본 것이므로 이 광역이미지 자체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일본서기』에 있어서 임나가 대표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는 점만 수긍할 수 있다면 임나의 강역이 너무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82].

나. 임나가 신라에 너무 근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필자의 가설에 대하여는 울산이 경주와 너무 가깝지 않은가 또는 신라와 임나국이 너무 근접(양국간의 거리가 대략 100리쯤 되는 것 같다)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특히 『삼국사기』가 신라 위주로 기록되어 있다보니 신라의 확장기사만 있고 신라의 축소기사가 거의 없는 관계로 생긴, 커다란 초기신라 이미지에 의하면 울산은 지나치게 경주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신라측 텍스트(정확히는 신라정통의 정치적 입장에 있었던 김부식의 텍스트)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와 같은 이미지는 초기신라의 '거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 필자가 비정한 임나국 지역의 가장 북쪽인 중산동 일대는 분명 경주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지만 중산동 고분군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경주지역에 대하여 분명한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히려 4세기 이전에는 경주에 대하여 우위에 있었을 가능성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 『삼국사기』 초기 기록으로 돌아가 남해차차웅 때부터 500년 이전의 기간을 보면, 신라를 가장 많이 공격한 세력이 바로 왜이다 [83]. 주로 늦봄이나 초여름에 신라에 침입하고 신라는 이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84]. 필자는 바로 『삼국사기』의 왜 [85] 가 『일본서기』 등의 임나국이라고 본다 [86]. 그렇다면, 오히려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 신라-임나의 국경 문제

그렇다면 초기 신라와 임나국의 국경은 어디였을까의 문제에 대하여 간단히 본다. [87].

먼저 신라와의 북방 경계 중 동쪽부분을 보면 필자는 그 평상시 국경이 월성군 외 동읍 모화리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모화리의 바로 동쪽에는 삼태봉이 있고(628m) 그 자락에 관문성 유지가 남아 있다. 또, 모화리 지역에서 경주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신라의 외동읍 죽동리 지역 [88] 이 있고, 모화에서 울산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울산 북구 중산동 고분군 및 제철유적지가 나온다. 필자는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에 비추어 모화리 정도가 양국의 국경이라고 본다 [89].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5세기 초에 신라가 울산 태화강 북부 지역을 영위할 때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90].

다만, 신라 초기에 이 부근 국경에 한차례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사정이 『삼국사기』 「지리지」와 『일본서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삼국사기』 「지리지」 [91] 를 보면 "임관군(臨關郡)은 본래 모화(毛火郡) <모화(毛火)는 문화(蚊化)라고도썼다>이었다. 성덕왕이 [이 곳에] 성을 쌓아 일본적(日本賊)의 길을 막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경주에 합쳐져 속하였다. 영현이 둘이었다.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울주에 합쳐져 속하였다. 하곡현(河曲縣)<[곡(曲)은] 서(西)라고도 썼다.>은 파사왕 때 굴아화촌(屈阿火村)을 빼앗아 현(縣)을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 [고려]의 울주(蔚州)이다."라고 되어 있다.

일단 여기서 임관군은 현 월성군 외동면, 양남면 일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곳에 관문성이 있고, 모화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경주(월성군)에 합해졌다고 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에 속한 두 현이 있는데, 이 두 현지역은 울산 지역 중 외동에 접한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두 현이 고려시대에 울주로 편입되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동진현을 보면 그 이름 자체에서 동쪽 항구를 의미한다고 본다. 필자는 동진현은 울산 북구 농소 1,2동 강동동 일대가 아닐까 생각한다(태화강의 지류인 동강의 동편). 이 지역은 5세 기 초에 최초로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본다. 동진현은 율포현이었다고도 하는데, 박제상 설 화에 의하면 박제상이 왜국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탄 곳이 바로 율포이다 [92].

다음으로 하곡현이 문제이다. 위 기사에 보면 曲은 西라고 쓴다고 하므로 하서현, 즉 강 서쪽현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울산 북부에는 동강이 있는데, 동강의 서편은 울산 북 구 농서동, 울주군 범서면, 울산 중구 지역이 된다. 범서면의 서쪽에는 국수봉, 연화산, 무 학산 등의 고봉이 있어 그 서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위 기사에 의하면 이 지역을 굴아화 촌이라고도 했다는 것인데 현재지명으로는 범서면과 태화강을 끼고 마주보고 있는 땅이 울 주군 굴화리이다 [93].

이렇게 보면 임관군에 대한 『삼국사기』 「지리지」의 설명이 지형과 상황에 대략 맞게 된다. 다만 문제는 위 두현 중 하곡현 지역(동강 서안)에 신라가 파사왕때 진출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문제이다. 이 지역은 울산의 중심부로 필자가 임나의 핵심 중심지로 지목한 지역은 아니지만, 그 상호간의 교통을 불편하게 만드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리지의 내용을 일단 믿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는 신라의 입장에서 적은 것이므로 이 지역에 최초로 진출한 시점을 말한 것이지 그 이후 계속 신라의 영토였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확대는 기록하지만 신라의 후퇴 는 잘 기록하지 않으므로 박씨 신라 최강성기라고 할 파사왕때의 이 지역 진출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후 계속 이곳을 영위하였다고 보지는 않는 것이다.

여하간 일시적이라도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였다면 임나국 입장에서는 불편함 을 넘어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내용의 기사가 『일본서기』에 있다.

『일본서기』 「수인기」 2년조에 의하면 蘇那曷叱智가 비단 100필을 받아 귀국하는 기사가 있는데, 신라가 길을 막고 비단을 빼앗아 양국간의 원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94]. 더구나 그 이설에 보면 이 비단 100필은 소나갈질지가 자신의 郡府에 거두어 두었는 데 신라인이 이를 듣고 빼앗았고 이것이 양국 원망의 시초라는 것이다. 만약 '소나'가 소 땅, 소 군 정도의 의미로 갈질지의 출신을 말한 것이라면 아래에서 자세히 보는 것처럼 울산 중구 우정동의 牛岩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는바, 바로 그곳은 정확히 위 하곡현의 판도 내로 파사왕대의 신라 진출지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파사왕대에 신라는 동강의 서편 지역에 진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비단 100필 사건 등이 일어나 임나측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이후 임나의 반격으로 이 지역에서 후퇴하였다가 5세기 초경 다시 영위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다음으로, 북쪽 국경 중 서쪽 부분에 대하여 보면, 필자는 현 울주군 두서면, 두동면의 중북부는 신라에 속하고 그 남부는 임나의 땅이라고 본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158)조는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來聘)'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위에서 필자가 본 것처럼 『삼국사기』의 왜가 임나국이라면 죽령이 양국의 대략적인 국경일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특히 왜국과의 국경이 바다가 아니라 육지(고개)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성호씨는 고대에는 위 외동면 모화리 일대에 대나무가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외동면 모화리 지역을 죽령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달리 본다.

본래 현 울주군 두서면, 두동면 지역은 과거에 월성군 외남면이었다. 경주에서 형 산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오다보면 아미산, 천마산, 백운산, 연화산 등의 산들로 이루어진 산지를 만나게 된다. 이 지역은 경주-포항으로 흐르는 형산강과 언양-울산으로 흐르는 태화 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지역으로 경주와 언양을 가르는 자연적 경계가 된다. 경주에서 언양 으로 가기위해서는 형산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산지를 통과하여야 하는데 현재도 경부고속도 로와 35번 국도가 그러한 형태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 산지지역을 위 기사의 죽령으로 본 다. 실제로 그 산길의 중간에 서하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서하리에는 대골[죽동(竹洞)] 이라는 마을이 있고, 바로 그 옆에는 신라가 군사훈련을 하였다는 민간전승이 내려오는 마 병산(馬兵山, 509m) [95] 이 있으며, 당고개, 배고개 등의 여러 고개가 있다.

이 지역이 신라와 임나의 경계라는 근거는 또 있다. 박제상 설화에 의하면, 박제상의 부인이 왜국을 바라보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치술령이라는 곳이 있다 [96]. 그런데 치술령이라는 산은 외동읍과 두동면 사이에 있는 765m 높이의 산이다. 치술령의 꼭대기에는 현재도 망부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치술령에 올랐는가 이다. 경주 토함산은 해발 745m로 치술령 보다 겨우 20m 낮을 뿐이고, 더 동해에 가깝다. 바다 건너 왜국이 산에 오른다고 보일 리도 없지만 동해바다를 보고 원한을 곱씹었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토함산을 두고 굳이 치술령에 간 것은 이상하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왜국이 임나라고 해보면 이상하게 사리에 맞아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제상설화가 눌지왕대의 이야기라고 하면, 울산 북부가 신라의 강역이 된 다음이므로 박제상은 육로로 울산 강동동 지역까지 온 다음 배를 타고 임나의 고사동 지역으로 가서 망명을 가장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고대의 태화강 하구는 현재 보다 더 넓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육로로 직접 울산 남부로 가기는 곤란하다), 박제상의 부인과 자녀들은 국경의 고봉인 치술령에 올라 아직 임나땅인 언양읍 지역과 울산 남부를 내려다 보면서 원한을 다졌던 것이다.

여하간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 오른 것은 이곳이 신라-임나의 국경중 가장 높은 고봉으로 임나 지역을 내려다보기 위한 것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처럼 5세기 초경부터 울산 북부 지역은 신라의 강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400년경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임나는 그 즈음에 울산 북부지역을 상실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로 필자는 중산리 고분군에 나타나는 신라식 적석목곽분이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석목곽분의 상하한 연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으나, 신라의 중국화가 급속히 진행된 지증왕때 적석목곽분이 소멸되었다고 본다면 [97], 그 이전인 5세기에는 중산리 지역을 비롯한 울산 북부가 신라의 강역화가 되어 적석목곽분의 설치가 일정 시간동안 계속되었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다만 그 정확한 시점에 대하여는 적석목곽분의 상하한 및 그 편년에 대하여 학설이 어느 정도 귀일하고, 중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적석목곽분의 구조 및 부장품에 대한 정확한 내용이 알려짐을 기다려보아야 할 것 같다. 여하간 울산 북부에 대한 신라지배는 임나가 멸망한 6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2. 거도설화와 임나국의 강역

울산을 임나로 보기 위해서는 거도설화와의 상치관계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거도 설화를 본다 [98].

"거도(居道)는 그의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국경의 이웃에 끼어 있어서(介居) 자못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그 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張吐)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유희 놀이를 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馬技)'라 불렀다. [군사를 동원하였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에 [거도는] 병마를 출동하여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

이 기사는 종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다. 우선 거도의 활동시대를 탈해왕때라고 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견해가 많았다. 초기 신라가 대외활동을 시작한 것이 파사왕 정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동래(거칠산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이 의문이라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내용이 「신라본기」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지리지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후대인 파사왕대에 울산 일부로 진출한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근거로 쓰이거나, 탈해왕대 우시산국, 거칠산국 병합기사를 경주세력의 대외진출이 아니라 반대로 탈해집단의 사로(경주)지역 진출과정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이형우, 2000).

또 이 기사의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도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는바, 거칠산국에 대하여는 동래일대라는 점이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우시산국의 위치에 대하여는 울산설(이병도, 김철준)과 울진설, 영해설(신형식)으로 나뉘어 있고, 울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우시산과 울산이 동음이라는 데서 구체적인 위치 지적이 없어 단지 울산시로 비정하는 경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만약 이 기사가 탈해때의 기사라면 이미 탈해때부터 신라는 부산 동래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면 필자의 임나=울산설은 물론이고 임나=부산설도 성립이 불가능하고, 임나=김해설도 존립근거가 희미해진다. 따라서 이 기사를 조심히 잘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사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이사부전」을 본다 [99].

"이사부(異斯夫)<혹은 태종(苔宗)이라고도 하였다>는 성이 김씨요, 나물왕의 4대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연해 국경지역의 지방관이 되었고, 거도(居道)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戱)로써 가야국(加耶國)<[가야(加耶)는] 또는 가라(加羅)라고도 하였다.>을 속여 취하였다 (밑줄 필자).

[지증왕] 13년 임진(512)에 [이사부는] 아슬라주(阿瑟羅州)[현재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현재의 경북 울릉도]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력으로는 항복받기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곧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550), 즉 대보(大寶)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하였다. 왕이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취하여 증축하고 갑사(甲士)를 머물게 하여 지켰다. 이때 고구려에서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위 이사부는 지증-법흥-진흥 3대에 걸쳐 공을 세워 신라의 통일초석을 닦은 영웅이다. 그런데 이사부전에도 위 거도의 전법인 마기와 유사한 마희가 나온다. 이 때문에 거도전은 더욱 의심을 받아 왔다. 이사부의 기사를 둘로 나누어 분식한 기사라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이사부전을 유심히 보자. 이사부전의 문장구조를 보면, 제일 먼저 이사부의 계보를 밝히고, 그 다음 그 공적 중 대표적인 사항을 요약(최초의 지방관 역임, 가야국 병합)한 후, 지방관인 아슬라주 군주가 되어 한 행적(우산국 정복)을 상세히 적고, 마희로 가야국을 병합한 자세한 내용은 없이 바로 진흥왕때 행적으로 넘어가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아도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의 3대에 걸친 이사부의 생애 중 지증왕대와 진흥왕대만 있고 왕성한 활동을 하였을 20년이 넘는 법흥왕때의 행적이 없다 [100].

여기서 필자는, 가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거도의 행적은 이사부의 법흥왕 시절 행적을 분식한 기사라는 추정을 해본다. 거도는 가공의 인물이거나 아니면 2세기 후반경 위 죽령 개척시 두서, 두동면 지역 정벌에 공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그때 사용한 전략을 이사부가 답습한 것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가 그러한 분식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필자는 있다고 본다. 우선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임나의 존재를 숨기는 방향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임나의 강역인 울산-동래일대를 신라 초부터 신라 땅이라고 해버림으로써 임나 기사를 봉쇄할 수 있고, 또, 『일본서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제외교문제화한 임나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임나국 땅이 본래부터 신라 땅이었다는 정치적 명분을 선전하기 위하여 사서 편찬시 분식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간 우시산국 및 거칠산국의 정벌을 법흥왕때 이사부의 행적으로 본다면 위에서 『일본서기』 분석을 통하여 필자가 임나의 멸망시점으로 보았던 법흥왕대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럼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의 위치는 어떠한가. 선학들의 비정대로 거칠산국의 위치는 부산 동래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참고로 이 지역의 지형을 자세히 보면 황령산 주위의 비교적 낮은 지역을 서쪽에서부터 엄광산, 백양산, 상학산으로 이어지는 산들이 감싸고 있고 그에 잇달아 북쪽에 금정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다시 동쪽으로 이어져 공덕산, 개좌산, 장산이 동쪽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 물론 남쪽은 바다이고 수영강이 흘러 물도 부족하지 않다.

문제는 우시산국이다. 거칠산국이 동래인 이상 군대의 이동방향을 고려하면 우시산국은 울산 어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경주 북쪽인 울진이나 영해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울산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울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거의 자세한 위치를 말하지 않고 있다 [101].

필자는 우시산국의 우시는 거칠산국의 거칠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유어의 음차라고 생각하고 우+사이시옷+산이라고 생각한다. 즉, 웃산, 윗산이며, 이는 필자가 위에서 상, 중, 하산이 임나라고 말했던 그 상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럼 울산 어느 지역이 상산(웃산)이 될 수 있는가 보자. 일단 울산 지역중 법흥왕대까지 신라의 강역이 아니고, 하산 지역인 고자동과 그 배후지역이 아니며, 뒤에서 보는 유물이 다수 나오는 지역 중의 하나여야 할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곳은 언양읍 지역과 웅촌면 지역인데, 웅촌면 지역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일본서기』에 의하면 하치리현(하산지역)의 별읍 [102] 이라고 하므로, 이라고 하므로, 결국 언양읍 지역이 상산 지역일 수밖에 없다. 종래 언양지역을 굴아화촌이라고 보아 왔으므로 이를 우시산 국와 연결시키지 못하였으나, 위에서 본 것처럼 굴아화촌은 언양보다 더 동쪽, 동강 서안의 평야지대를 말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그도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일설에 의하면 웅촌면 지역이 신라시대에 于火懸이었으므로 우시산국을 비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화는 우불이고, 우불은 '윗벌', 즉, 윗들판의 의미이므로 우시산국의 '윗산'과는 다르다.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모야신이 웅촌 지역에 상산, 하산 지역을 다스리는 치소를 두고 다스렸던 상황상 일부 혼선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고 이사부의 우시산국 및 거칠산국 정벌 기사를 다시 정리하면, 당시는 법흥왕때로 위에서 본 것처럼 529년 경이 될 것이다. 당시 대화조정에서 파견된 모야신과 임나 측 토착 지배자 아리사등 간에 불화가 생겨 각 본거지에서 분거한다. 모야신의 본거지는 웅촌면 지역이고 거기서 언양과 울산 남부를 지배하며, 이라사등의 본거지는 동래이고 거기서 기장까지 관할한다. 이러한 상황을 신라측 입장에서 보면,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03]. 이때 아리사등은 모야신의 소환을 대화에 요청함과 동시에 신라, 백제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이러한 때를 틈타 신라는 이사부가 우시산국으로 점령하고, 나아가 거칠산국을 병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04].

3. 울산 지역의 유물 유적

울산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의 유물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게다가 그 연대나 규모 가 경주보다 앞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5].

일본 고분과의 관련성이 언급되는 유명한 중산동 고분이 이 판 도내에 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다. 위 신문기사에 의하면 최근에는 중산동 고분군에서 350m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삼국시대에 달천광산에서 캐낸 철을 제련하는 장소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가 임나의 신라와의 북쪽 접경 지역이라고 판단하는 중산동 지역에서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면 울산 효문동 지역이 있다. 효문동에는 효문동 고분군이라는 고분군이 있는데 1983년 5월 19일, 이 고분에서 밑둥근 항아리 4점과 굽 높은 잔 1점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시대에 대하여는 삼국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신라 양식인지 김해양식인지에 대하여도 명확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효문동 지역에는 효문산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울산 우정동(牛亭洞) 지역은 태화강 북안(北岸)의 평야지대인데 소처럼 생긴 바위인 우암(牛岩)이 있었다고 하고, 울산읍지에 의하면, 서낭당이 고을 서쪽 3리의 우암에 있었는데, 이 서낭신은 계변천신(戒邊天神)으로, 수복(壽福)을 주는 울산의 수호신 구실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혹 『일본서기』 숭신 65년조의 蘇那曷叱智의 소나가 소(牛)땅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면, 그곳은 이 우암동 일대의 벌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본서기』 수인기에 있는 황우전설과도 관련시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필자가 임나항구 지역으로 지목한 고사동-용잠동 일대는 이미 대규모 공단화되어 옛 해안선이 변경되었을 뿐 아니라, 유물유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만 그 배후 읍락으로 볼 수 있을 만한 지역에 많은 유물 유적이 남아 있다.

울산 남구 고사동의 남서방향에 삼광리 지역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는 삼광리고분군이 있었고(현재 과수원으로 개간) 삼국 시대 토기 조각이 출토된다고 한다. 삼광리고분군은 과거에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던 것 같은데, 필자로서는 그 내용이나 결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다(발굴보고서 등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 발굴을 참관한 것으로 보이는 김원룡의 증언만을 제시해본다 (김원룡 1999).

"울주군 온양면 삼광리의 석곽묘군은 김해토기는 아니나 회백색의 가장 고식이라고 생각되는 토기들을 내고 있어 부장품[껴묻거리]으로 보나 묘제자체로 보나 원삼국시대 [106] 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107], 불행히도 발굴보고서는 나오지 않고 관계자료조차도 행방불명이 되어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발굴을 잠깐 구경한 기억에 의하면 석곽들은 조그만 구릉의 경사면에 촘촘히 군집한 작은 수혈식 석곽묘로서 네벽을 냇돌로 쌓았고 바닥에는 돌을 깔고 있었으며, 한쪽바닥에는 석열(石列)로서 부장품부처럼 따로 구획하고 있었다. 고분에는 원래 판석으로 된 뚜껑이 있었던 모양이나, 석곽의 밀집도로 보아 봉토는 없거나 있어도 아주 낮은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이상과 같은 김원룡의 판단을 신뢰한다면, 나중에 경주 지역을 제외한 전 경상도 지역의 지배묘제가 된 수혈식 석곽묘의 가장 원시적 형태가 울주군 삼광리 고분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108], 이러한 전파 형태를 인정할 수 있다면, 소국 임나국의 명칭 이 경상도 전체의 대표명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는 필자의 판단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울산 남구 고사동 지역의 서쪽에는 울산 남구 두왕동이 있고 두왕천을 사이에 끼고, 동서의 양쪽 구릉지대에 수십 기의 고분군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개간하여 형태를 찾기 어렵다. 또한 두왕동(옛이름 島王洞)에는 이곳에 아버지 묘를 쓴 사람이 대마도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對馬島主嶝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일본과의 모종의 관계가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두왕동의 바로 북쪽(태화강 남쪽)에는 울산 남구 신정동이 있는데, 그곳에는 신정동 고 분군이 있다. 신정동 고분에 대하여는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 有光敎一이 발굴을 했다고 하 는데, 그 결과를 담고 있는 문헌이 있는지 필자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한편, 부근의 주거 지에 대한 발굴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109].

삼광리 지역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온양면 운화리가 있는데 대운산 동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그 대운산 기슭에는 지름이 약 13m가 되는 고분 2기가 있고, 그 중 1기는 일제 때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 1964년 5월 14일 목 긴 병, 술잔, 토기 사발 등이 출토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자가 하치호리 현의 별읍 구마나리 또는 구사모라 지역으로 본 웅촌면 지역에는 필자가 다다라로 지목한 대대리가 있는데, 신라시대부터의 집터였다고 전해진다. 대대리에는 상대동(上垈洞), 중대동, 하대동 등의 마을이 있다. 또한 대대리에는 대대리 고분(大垈里 古墳)군이 있는데, 저리 뒤 언덕배기 일대에는 수십 기(基)의 고분들이 있어 여기에서 각종 토기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대대리 고분군, 특히 대대리 상대고분은 지름이 15m가 넘는 대형고분군으로 그 성격 규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1972년에 발견된 유개고배(有蓋高杯: 뚜껑이 있는 굽 높은 술잔) 1점은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대대리의 북서쪽인 검단리 지역은 웅촌면 지역의 중심지로 판단되는데, 그 곳에는 일본 야요이 시기 특유의 것으로 인정되었던 환호시설이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검단리 유적이 있다. 1990년 2-4월에 실시된 부산대학교 박물관조사팀의 발굴조사 결과 환호 1기(基), 환호 안쪽에서 집터 93기, 수혈(竪穴) 3기, 가마터[窯址] 2기, 고인돌[支石墓] 3기 등의 중요유적과 석촉, 돌칼 등 49점의 석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등 422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이 BC 4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전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환호의 둘레 길이는 300m, 호의 너비 50-200cm, 깊이 20-90cm, 호 단면의 모습은 V자형이다. 필자가 보는 임나국의 시기와는 무관할 수 있으나 이 지역이 본래부터 일본과 문화적 동질성이 큰 지역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110].

필자가 상치리 지역으로 생각하는 언양읍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울산과 독립한 행정단위였을 정도의 세력이 있는 지역으로 그 동부리 북쪽에는 언양읍성터가 남아 있다. 언양읍성의 내력을 살펴보면, 본래 삼국시대의 토성이던 것을 조선 문종 원년(1451)에 석성으로 기공하여 연산군 6년(1500)에 완성하였고, 임난후 광해군 때 중수하였다고 한다. 평지성으로 본래 토성이었고, 성둘래에 호가 있었던 것을 후에 토성을 헐어 호를 매움으로써 논으로 되 다고 전해진다. 또한 영취산 꼭대기에 있는 단조성은 언양읍성의 산성역할을 하였을 수도 있다. 그 이외에도 언양지역의 서쪽 영남 알프스 지역에는 정족산성, 문수산성, 고헌산성 등 여러 산성들이 산재하고 있다.

읍성이 있는 동부리 일대지역은 고대 유적이 많은데, 읍성의 서쪽에는 높이가 3m, 너비가 4㎡인 대형 언양지석묘 [111] (천연념물 제25호)이 자리잡고 있고, 일제 시대에 발굴되어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부리 고분유적지도 있었다고 한다. 읍성터의 서북 쪽에는 다개리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에는 산성이 있었다고 하며, 20여기의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다개리 고분군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개리 고분군은 일제시대에 도굴당하여 파괴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사타지역으로 보았던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청강리 일대에는 70여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진 청강리 고분군 [112] 이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4-6세기 경의 수혈식 석곽묘(21호분 등)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가적인 발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대라리의 북쪽인 교리에는 고려시대 읍성인 현 읍성과 다른 고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기장향교 뒷편 야산에 있는 토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古邑城 在今治 東北五里 土築周三千二百八尺"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가 모루지역으로 보았던 부산 초읍동-모라동 지역에서 북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복천동 고분군이 나오고 조금 더 북동으로 가면 오륜동 고분군이 나온다. 오륜동 고분군에 대하여는 초기 수혈식 석곽분이라는 점은 위에서 본 바와 같고, 복천동 고분군은 토광목곽분이 수혈식 석곽분으로 대체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특징적으로 갑옷·투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갑옷·투구 이외에도 말갑옷[馬甲], 말머리가리개[馬胄] 등 철로 만든 무기가 상당수 출토되어서 당시 말을 이용하여 전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13].

이상에서 필자가 임나의 강역으로 본 울산-부산 지역의 주요한 유적들을 간단히 보았는데, 이 좁은 지역 내에 대일본관련 유적이 많이 나타나고, 단순한 신라의 지방 세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크거나 집중도가 높은 유적들이 많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임나국을 울산으로 비정할 때 이러한 유적의 통일적이고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4. 계림의 서남 문제

『일본서기』 숭신 65년 추 7월조에는 임나의 묘사로서 계림의 서남(鷄林之西南)이라는 기사가 있다. 과연 임나=울산설이 그와 같은 설명에 부합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쉽게 생각하면 울산은 경주의 남쪽 내지는 동남쪽이므로 위 기사에 맞지 않는 듯도 보인다. 종래 울산을 임나의 후보지로 생각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점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러나 경주와 울산처럼 가까운 거리의 방위는 양쪽의 기준점이 약간만 변화하여도 방위가 달라진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 2가지 가정을 제시해본다.

첫째로는 기사의 임나측 기준이 상치리=언양지역을 기준으로 한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상치리(언양)가 임나에서 중요한 부분이므로 이렇게 볼 여지가 없지 않다. 만약 이렇게 보면 언양은 경주의 서남이므로 위 기사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가정이 가능한가. 이러한 가정은 당대의 도로망과 관련하여 그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다고 보는데 당대의 도로망을 현재 알 수 없으므로 정확한 검증은 어렵다. 다만, 현재의 경주-울산간 도로망과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현재 경주에서 울산 지역으로 오는 길은 첫째길로 경주-외동-모화-중산동-태화강 북안에 이르는 길이 있고, 현재 이 길로 7번 국도와 동해남부선이 지난다. 이에 비하여 둘째길로 경주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와 울산 두서면 지역을 지나 언양읍까지 계속 서남진하는 길이 있고 현재는 경부고속도로와 35번 국도가 지나간다. 첫째길의 경우 울산 북부지역까지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나 바다처럼 넓은 태화강 하구를 만나므로 배를 타지 않고는 임나항구로 본 고사동 일대로 접근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반면, 둘째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달라왕대에 개통된 죽령을 지나는 길로 언양읍성 지역에 쉽게 접 근할 수 있고 거기서 태화강을 따라 내려가면 쉽게 임나항구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요지역에 대한 접근성이나 사서에 나타난 죽령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경주-울산 지역간의 주도로는 경주-언양간 도로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임나는 계림의 서남이라는 묘사도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가정은 기사의 신라측 기준이 경주지역이 아닌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경주 지역은 상당히 집중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왔는바,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국가수준의 유물이 드물다. 경주지역에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르게 보아야 4세기이고, 그 이전의 석씨 신라와 연결시킬만한 유물 유적이 적다는 것이다. 만약 벌휴부터의 석씨 신라시대가 김씨 신라와 다른 왕조이고 다만 역사 편찬시 포함하여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석씨 신라시대의 중심지도 경주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가정해보는 것이다. 만약 석씨 세력이 탈해를 성인/시조로 삼는 일정한 집단이고 그들의 출현이 대략 2세기 후반이라고 본다면 [114], 이 집단의 성격은 어떠할 것인지 본다. 우선 탈해는 최초 바닷가에서 출현하였다. 그리고 사서의 묘사를 보면 삶의 터전이 바다이다. 그런데, 경주에서 동쪽 바다가까지 가려면 100리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경주의 동쪽에는 해발 745m의 토함산이 길을 커다랗게 막고 있다. 과연 석씨 신라인들이 경주를 수도로 선택하였을까(이곳을 점령하여 지배하였을 수는 있지만) 의문이 드는 것이다. 훗날 탈해는 김씨신라인들에게 경주의 東악신으로 추앙되는데, 경주에 자리 잡은 김씨신라인에게 탈해는 동쪽사람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2세기 석씨 계림의 위치가 현 경주가 아닐 수 있으며 그들의 중심지는 오히려 토함산의 동쪽 바다에 가까운 땅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에서 울산을 보면 그냥 서남으로 위 기사의 내용에 부합하게 된다 [115].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임나는 계림의 서남이라는 문제는 울산=임나설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5. 백제와의 거리 문제

필자의 임나=울산설에 대하여 품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문은 백제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특히 임나를 호남 어디로 보는 견해들이 문제 삼을 수 있겠다. 이 의문의 논거는 『일본서기』 계체 6년조에 있는 임나 4현을 백제에 주는 이유로 치唎國守가 대화조정에 주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 사현은 백제와 가깝게 이웃해있고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조석으로 통행하기 쉽고 닭과 개의 주인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한나라로 만들면 보전의 책이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필자)"라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임나 4현은 백제와 매우 가깝다고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임나를 울산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일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 을 수 있는 것이다 [116].

그러나 이는 임나 지역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에서 오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가야 지역에는 군데군데 백제가 성을 쌓고 군령성주를 두고 있었는데 임나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위 기사는 바로 그러한 백제 지역과 임나국 지역이 뒤섞여 있으므로 백제랑 합하 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이지 백제 본국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대체 백제 본국과의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위의 닭과 개의 주인을 구별할 수 없고 조석으로 통행하기 쉽다는 표현이 성립할 수 있는가. 이는 옆마을에 대한 표현으로 백제인들이 사는 읍현과 임나읍현이 서로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과연 필자의 이와 같은 이해에는 근거가 있는가 보자. 임나가 백제에 귀속되기 직전의 『일본서기』 계체 3년조를 보자. 이때 백제는 임나의 일본 현읍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지 3, 4대 되는 자를 찾아서 백제에 옮겨 호적에 올렸다고 되어 있다. 이 기사 중의 임나에 있는 일본 현읍(在任那日本縣邑)부분을 보면 임나의 현읍이라고 하지 않고 임나의 일본현읍(본래는 왜현읍이었을 것이다)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임나에 백제 현읍이 있었을 것을 추측하게 하는 기사이다. 즉, 위 기사는 임나에 있는 백제 현읍에서 일본 현읍으로 도망한 자 등을 색출하여 호적을 정리하게 하였다는 기사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위 기사 중 '백제에 옮겨'라는 말은 백제 본국으로 옮겼다기보다는 임나에 있는 백제 현읍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 보다 이른 시기의 기사인 『일본서기』 현종 3년조 기사를 보자.

"이해 紀生磐宿 가 임나에 있다가 양쪽에 걸쳐 고구려와도 통교하였다.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하여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 일컬었다. 임나의 左魯, 那奇他甲背 들의 계략을 써서, 백제의 適莫爾解를 爾林에서 죽였다. 帶山城을 쌓고 東道를 지키니 식량을 운반하는 항구가 끊겨 군사를 기아에 빠지게 하였다. 백제왕은 대노하여 令軍 古爾解, 內頭 莫古解 들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帶山을 쳤다. 이에 生磐宿 는 진군하여 요격하였다. (중략) 일이 안될 것을 알고 임나에서 돌아왔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左魯, 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위 기사에도 임나 지역 내의 백제 군대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백제와 임나가 뒤섞여 있다는 필자의 추측이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위 기사에서는 백제군의 식량은 항구를 통하여 도착하고, 그 항구는 동쪽에 있다는 사실(동도를 지켜서 항구를 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임나의 모습은 울산만이 적합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동쪽에 항구가 있으려면 동해안이어야 한다. 또 대마도처럼 큰 섬이라면 어느 한쪽 방향을 봉쇄한다고 해상보급을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7].).

VIII. 맺음말

필자가 생각하는 이글의 의의로 첫째, 임나관련 기사 및 기타 자료를 나누어 보자는 제안을 해본 점을 들 수 있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임나의 성격과 위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을 제시한 바 있으나, 이 모든 견해가 사실 그러한 여러 가지 기사 및 자료의 일부만을 강조하며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임나관련 기사 및 자료가 그 스스로 상호 모순과 저촉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기사 및 자료를 임나국 기사, 대표명사로 사용된 기사, 임나일본부 기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보고, 적어도 임나국 기사로 분류한 범위 내에서는 상호 모순을 일으키지 않게 설명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분류 자체가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절대적인 증거는 제출할 수 없으나, 임나관련 기사 및 자료를 보는 하나의 관점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위해본다. 둘째의 의의는 임나국의 위치를 울산에 비정해 본 것이다. 이는 어느 하나의 결정적 증거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간접증거를 종합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북으로 바다를 접한 한반도 내의 매우 드문 지역이라는 점, 한반도의 동해 [118]안의 항구여야 한다는 점, 임나 관련 지명들을 울산으로도 비정 [119] 할 수 있다는 점, 울산에 이른 시기의 유물들이 많이 나 오고 일본과의 연관성도 있어 보인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본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대하여 필자 스스로도 완전한 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 제목가체를 '가설'이라고 하였다. 보기에 따라 임나를 한반도에 위치시킨 것을 지목하여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에 사로잡혔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임나의 강역을 좁혔다고 국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임나문제에 관한한 이제 한일 양국이 '모 아니면 도'식의 극한적 대립설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임나의 존재감에 대하여 인정하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역사발전의 전반적인 추세에 부합하는 합리적 임나설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감히 필자가 그러한 시도를 해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본고는 필자 나름으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오래 생각하고 써본 글이다. 필자의 의도에 대하여 오해없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1 먼저 본고의 내용이 가설임을 분명히 밝힌다. 불완전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고대사부분에서 모든 설이 다소간 가설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이글은 필자의 역량부족으로 인하여 가설적 성격이 강하다. 양해를 구한다.
2 일본이라는 이름이 후대에 사용된 것이 명백한 이상 이러한 실체가 있었다면 그 명칭은 다른 것이었을 것이고 이를 후대의 사가들이 일본부로 개칭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이에 관한 자세한 논증은 별도의 연구대상이라 할 것이므로 일단 필자의 결론만 제시한다. 다만 비신라권=가야로 보면, 임나를 부정하게 되고. 비신라권=임나로 보면 임나=가야가 돼서 결국 남선 경영론이 된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비신라권을 가야권과 임나권으로 나누어 보면 한중일 기사 모두를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4 물론 임나가 이 지역의 대표명사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임나가 한때 이 지역을 대표할 만큼 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이라는 명칭이 부산-경남지역을 대표할 수는 있지만, 예를 들어 사천이나, 창녕이 이 지역을 대표할 수는 없는 이치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고의 범위를 넘으므로 뒤에서 간단히 언급한다.
5 기타 일본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윤내현(1998), pp. 454-465 참조.
6 이 부분 원문은 다음과 같다. 及太宗大王卽位 唐使者至 傳詔書 其中有難讀處 王召問之 在王前 一見說釋無疑滯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對曰 “臣本任那加良人 名牛頭” 王曰 “見卿頭骨 可稱强首先生” 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 文工而意盡 王益奇之 不稱名 言任生而已
7 강수전에 "强首 中原京沙梁人也"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근거로 임나국의 위치를 비정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임나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의 기사로 보아야 하므로 강수의 출생지가 중원경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이 임나국의 위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대에 피점령국민을 개척이 필요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은 흔한 경우로 신라는 임나인들을 중원경 개발을 이유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후기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에는 충주를 "본래 임나국이었다"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위와 같은 이주에 따른 혼선의 결과라고 본다.
8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大師 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필자는 위 원문의 其를 '신김씨'를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뒤 부분을 신김씨는 임나 왕족 초발성 파(지)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전주이씨 모모군파와 같은 구조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김씨는 임나왕족 중에서도 초발성(聖은 왕, 군과 통한다고 본다)의 파(지)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필자의 생각이나, 아니더라도 본고의 논지전개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때 초발은 지명이라고 보고 김성호씨는 이를 부산 초읍동으로 본다 (김성호,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푸른숲). 임나국이 울산 남구 태화강 하구에서 시작하였다고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도 한때 부산 중북부까지 진출하였다고 보므로(거리도 멀지 않다) 받아들일 수 있는 비정이라고 본다. 초읍동에는 古城址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위 원문의 흥무대왕은 김유신의 시호이다. 그리고 위 문장에 의하면 김유신도 임나왕족 초발성지인데, 김유신이 심라에 항복한 금관국 구형왕의 증손이라는 계보에 비추어 후술하는 임나=금관국=김해설의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今西龍, 「가라강역고」, 『조선고사의 연구』, 국서간행회, 김성호 전게서에서 재인용).
9 이 글자는 후술하는 것처럼 왕건군의 해독을 따랐다.
10 김성호씨는 이 종발성도 초읍동에 비정한다. 초발과 종발이 통한다는 것이다.
11 『일본서기』 숭신-수인대의 기사를 사료가치가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 기사를 무시한다.
12 이외에도 중국 측 사료인 『한원』 권3 「신라전」에 언급된 지리지에 의하면 가라와 임나를 병칭하고 있는 바, 이는 임나를 가야와 동등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일본 측 사료인 『신찬성씨록』 권 30 「미정잡성조」도 '임나공은 임나국주의 후예'라고 하여 임나국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3 임나의 위치에 관하여는 백인 백설의 상황이므로 필자가 보기에 의미가 있거나 장점이 많은 견해, 유명한 견해 등을 골라 보았다. 또한 제설 가운데에는 임나를 국가로 보지 아니하는 입장에서 위치를 비정한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구별하지 아니하였다.
14 이 묘사는 『일본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임나는 '筑紫國에서 2,000여리이고, 북쪽은 바다로 막힌,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물론 숭신기를 사료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고령=임나설을 취하더라도 문제가 없게 된다.
15 대표적으로 이병도(1976)
16 이러한 주장 이외에도 김해의 옛 지명이 主浦, 臨海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는 任那와 같은 어사라는 점을 근거로 하는 주장도 있다 (鮎具之進, 雜, 1937).
17 이 부분은 필자가 본고의 가설을 세우게 된 동기가 되는 부분이므로 좀 상세히 보고자 한다.
18 福澤仁之, 벼농사의 확대와 기후변동, 계간고고학(1996), (이시와타리 신이치로, 2002에서 재인용). (이시와타리 신이치로, 2002에서 재인용). 필자로서는 이 연구의 당부를 검증할 능력은 없다. 다만 이 연구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해수변의 변동이 범세 계적 현상이므로 우리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19 필자가 알기로 이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알고 있다.
20 원문에 달린 주에 의하면 '望山島 京南島嶼也'고 되어 있다.
21 원문에는 '忽自海之西南隅.. (중략 필자) ... 而指乎北'라고 되어 있다.
22 이 부분을 임나=김해설에 입각하여 구야한국의 북쪽 언덕에 도착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원문의 '到其北岸狗耶韓國'에서 其를 빼고 구야한국을 북안 앞으로 옮겨 적거나 其가 뒤에 오는 구야한국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문법상 어색하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해로)의 북쪽 언덕에 있는 구야한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한편, 이 기사가 묘사하고 있는 구야한국 해안 근처에 높은 언덕이 있는 상황과 『삼국유사』에서 허왕후가 쉬었던 높은 언덕(高嶠)의 상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3 대표적으로 김성호 2000
24 이 견해는 구야한국의 위치를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 『삼국지』의 기사를 필자와 달리 해석하고 있다.
25 김석형,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 역사과학(1963)
26 의부가라의 의미를 분석한 견해는 위에서 이미 보았고, 임나의 의미에 대하여도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님의 나라, 임금의 나라 정도의 의미로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임나라는 이름으로는 위치를 비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의부가라를 의붓가라로 보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것만으로는 위치를 비정할 수 없는 보통명사적인 것으로 본다.
27 이처럼 임나가 세부분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같은 생각으로 김성호, 김상 참고.
28 하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거도가 점령한 나라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2개이다. 3개로 보는 근거를 알 수가 없다.
29 필자가 보기에 2-3세기의 한반도 남부의 상황과 관련하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한전의 충돌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통상 그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를 전적으로 믿고 다른 하나를 전적으로 믿지 아니하는 방법이 채택되어 왔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도 그러한 충돌의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만을 믿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방법은 득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양 사서의 입체적 읽기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를 위하여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대한 기존의 독법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0 이에 비하여 반면 왜지역은 비미호와의 직접 교통으로 직접 얻은 정보가 따로 있었다고 본다. 정보의 원천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의 나라를 변진조와 왜조에 중복 기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31 모든 사서가 그렇듯 진수의 『삼국지』도 이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진수의 주관적 입장이 반영되어 왜곡된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진수의 입장에서는 한 나라의 구성부분을 쪼개어 별개의 나라처럼 기재할 충분한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32 종래 변진 24국의 비정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으나, 본고에서는 3개의 미동국에 대한 기존의 비정을 일단 무시하고 서술한다. 필자는 언어적 방법에 의한 지명고라는 것이 논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근거중의 하나로 쓰이는 것은 수긍할 수 있으나, 언어적 방법에 의한 지명고 결과가 유일한 근거라면 그 것만으로 주장이 '입증'된 것으로 볼 수 없고 그 주장은 여전히 가능성의 상태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한 점에서 본고 자체가 가능성, 가설일 뿐이다.
33 이하 고지도는 www.ulsantour.com에 있는 울산 고지도에서 인용함.
34 미리미동국과 난미리미동국의 공통 의미소인 미리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으나, 필자는 산, 언덕, 고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허나, 산, 언덕, 고개를 의미하는 지명은 현재 너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어느 지역을 비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후술하는 치唎의 해석과 서로 통한다는 사실만 일단 지적해둔다.
35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문연구, 1998
36 이 부분 원문은 '安羅人戌兵 新[羅]城鹽城'이다.
37 이에 관한 연구는 본고의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면 차후에 논할 문제라고 생각하나, 여기서는 본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 필자의 생각만을 간단히 정리한다.
38 임나국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나, 필자는 신라와 임나의 최초 경계는 신라측 남단이 월성군 외동읍 모화이고, 임나측 북단이 울산 중산동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39 동일한 내용이 흠명 원년조에도 계체천황때의 일을 회상하는 형태로 기재되어 있다.
40 『일본서기』 「웅략기」 21년조에는 임나국 하치호리(下치呼唎)현이 나온다. 下치唎현과 같다고 본다.
41 이 기사 중 사현을 백제에 주어야 하는 이유와 관련하여서는 별도로 후술한다.
42 필자는 '치唎'를 '치리'로 읽는 것이 옳은지 '다리'로 읽는 것이 옳은지 의문스럽다. 본래 다리인 것을 '음차'하였음을 명백히 표시하기 위하여 다리(多利)에 모두 '口'자를 첨부해 놓은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리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임나관련 연구들 가운데에는 다리로 읽은 것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어느 쪽으로 읽던 필자의 생각에는 같은 결론을 가져오는 것 같다.
43 '達'이 산이라는 의미라는 견해로는 견해로는 정연규, 2002, pp. 128이 있다.
44 사실 경주의 바로 턱밑인 울산 북구 중산동 지역에서 이러한 고분고총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초기 신라의 강역을 넓게 잡고 있는 일부 견해의 타당성을 상당히 의문스럽게 한다.
45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찰갑과 달리 판갑이라는 사실 자체도 음미할 만 하다. 더욱 이러한 종장판갑이 일본 판갑의 고식에 해당한다는 점도 음미할 만 하다.
46 그 최초 발생시기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여러 견해가 나뉘어 있다. 대표적으로 4세기 전반(최병현, 신라고분연구, 일지사), 350년 전후(김원룡, 신라토기, 한국미술 1, 열화당) 또는 5세기 이후(대표적으로 신경철) 이라는 견해들이 있다.
47 한편, 고사기에 보면 중애천황 사망기사에서 신공에게 신탁을 내리는 신이 天照大神과 上, 中 底筒男의 대신이다. 이 上, 中, 底筒男의 대신은 『일본서기』 신대기에 그 정체가 나와 있는데 천조대신을 낳은 伊 諾尊이 천조대신과 함께 낳은 8명의 신(천조대신 포함 9신) 중의 3명의 신이다(다만 여기서는 上筒男 대신에 表筒男으로 되어 있다). 그 수많은 일본서기의 신중 천조대신과 함께 태어난 3筒男의 大神의 각별함을 생각해 보면 일본천황가의 임나에 대한 각별함과 상사성이 예사롭지 않다고 본다. 혹 上, 中 底筒男이 三間名과 통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筒=洞=間, 男=王=國=名).
48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춘3월조에 보면 백제왕은 下치唎國守에게 "조공하는 사람들이 항상 섬의 돌출부를 피할때마다(海中의 島曲의 崎岸을 말한다) 매양 풍파에 시달린다. 이로 인하여 가지고 가는 것을 적시고 망가지게 한다"라고 불평한다. 여기서 첫째, 임나 4현 중 下치唎가 항구를 가지고 있는 바다가라는 점을 알 수 있고, 둘째, 下 唎 앞바다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필자의 가설에 의하면 下 唎가 고사동 지역이라는 것이고, 도 3에 보면 그 입구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9 위에서 진경선사 탑비의 "草拔"이 초벌이고 벌은 읍과 통하므로 초읍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50 신공의 이름이 氣長足姬이다.
51 이 임례국을 소국 임나국의 이명 중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연규(2002) pp. 287 참조. 본래 소국의 명칭이었던 임나가 대표명사로 쓰이게 되면서 대표명사와 국가명칭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특별한 경우에는 국가의 명칭으로 다른 이름을 써야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면 더욱 앞의 '總言 任那'를 대표명사로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52 이 가야가 김해를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 가야가 김해라고 하더라도 필자의 논지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 경우 562년에는 김해, 안라를 점령하고(『일본서기』), 고령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된다(『삼국사기 』 진흥왕 23년조)
53 이를 근거로 임나국이 고령 대가야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54 이하 연도에 있어서는 필자가 『삼국사기』, 『일본서기』를 비교하여 적었다. 같은 내용이 1, 2년 차이가 있는 경우 필자의 판단으로 적은 것이므로 완전히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다만 순서를 바꾸거나 연도를 크게 임의로 옮긴 것은 없다.
55 『삼국사기』 지증왕 5년(504년) "5년 가을 9월에 인부를 징발하여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 12성을 쌓았다." 이 시점에 신라가 외부로 영토를 확장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56 『일본서기』 계체 3년조 참조.
57 『일본서기』 계체 6년 동 12월조 참조. 한편 이 기사에 의하면 치唎國守는 임나를 백제에 합하는 것이 당장의 방어는 되나 나중에는 그것도 해결책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신라에 근접하여 방어가 어려운 사정을 반영 한다고 본다. 그 예측대로 그 후 10여 년 동안은 문제가 없었으나 결국 망하고 말았다.
58 『삼국사기』 법흥왕 9년조 참고.
59 『삼국사기』 법흥 11년조에 의하면 "11년(524)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고 되어 있다. 이 지역 점령이 꼭 524년이 아닐 수도 있다. 이때 왕이 돌아보았다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524년 즈음에(그리고 그 시점 이전에) 공취한 땅임은 분명하다.
60 『일본서기』 계체 21년 하 6월조 참조.
61 이때의 임나왕은 소국 임나국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본다.
62 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4월 임오삭 무자, 임나왕인 己能末多干岐(본문주. 아마도 阿利斯等 일 것이다)가 내조하였다. 大伴大連金村에 "해외의 여러 나라는 응신천황이 관가를 둔 이래 본국을 버리지 않고 그 땅을 봉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지금 신라가 원래의 봉지의 경계를 벗어나서 자주 국경을 넘어 내침한다. 천황에 주하여 신의 나라를 구조하여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大伴大連이 그대로 주하였다."
63 문 주에는 '一書에 임나의 久斯牟羅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웅천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정이 있으나, 필자는 울주군 웅촌면, 웅상면 지역이라고 본다. 『일본서기』 웅략기 21년 3월조에 '久麻那利는 任那國의 하치호리현(下치呼唎縣)의 별읍(別邑)이다'라고 한 그 웅촌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주의 久는 久麻의 줄임이고 斯는 사시시옷 모라는 마을이라는 뜻이므로 그대로 웅촌=구마나리=구사모라가 된다고 본다. 웅촌면은 필자가 하치호리로 지목한 울산 고사동, 온산-온양면과도 가깝다. 또, 지도를 보면 김해 지역에서 양산을 거쳐 산을 넘으면 바로 웅촌면이 된다. 가야 지역에 있던 모야신이 재협상을 위하여 임나국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본다.
64 종래 이 다다라에 대하여는 부산 다대포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울산 웅촌면 대대리(大垈里)라고 생각한다. 『일본서기』 기사 문장 자체로 보더라도 모야신이 웅천에서 신라를 부르자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오고 이에 모야신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음에도 이사부가 3개월간 다다라에서 기다렸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多多羅는 웅천 지역의 들판이 되어야 한다. 필자의 비정에 의하면 다 맞아 떨어진다. 우연의 일치로 웅천과 다다라를 모두 만족시킬 수도 있지만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잦은 것 같다. 한편 웅촌면 대대리에는 수십기의 고분군이 있고, 삼국시대의 것으로 전해져온다.
65 한편, 이때 귀환하던 신라군은 가야지역 5성을 빼앗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 5성은 『일본서기』 흠명 5년 11월 기사에서 백제 성왕이 5성에 대응하는 낙동강 서안의 6성을 건설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등 전제적인 사정에 비추어 창녕지방의 5성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이렇게 되면 구례산은 창녕에 있는 화왕산-화왕산에는 삼국시대 산성인 화왕산성이 있고, 산서면에서는 진흥왕의 척경비가 발견되었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신라가 낙동강 동안 전체를 차지하고 서안은 대가야(대가야는 신라와 혼인관계), 안라 등 소국이 병존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백제 성왕이 죽게 되자 신라는 562년 성왕의 공백을 틈타 낙동강 서안 10국을 모두 멸한 것이고, 이것이 흠명기의 임나 타멸기사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66 필자는 탁순국을 소국 임나국의 이명, 특히 백제측에서 칭하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는 본고에서 자세히 다루지 아니하나, 탁순에 대한 기존의 비정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많은 의문이 저절로 해결되는 장점이 있다.
67 필자는 이 529년 경에 신라의 임나 정복기사가 와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필자는 『삼국사기』 열전 거도전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 문제는 뒤에 따로 설명한다.
68 흠명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국제외교기관으로 보는 최근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이 이후 나오는 (임나)일본부 안라 등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대화측의 臣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에 이런 독립 국제외교기구는 왜 존재한 것인가. 대화정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였다는 추상적인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망한 임나국의 복건, 이것이 일본부의 존재명분이자 이유가 아니었을까.
69 『삼국사기』 법흥왕 19년(532)조에 의하면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고 되어 있는바, 이를 통설처럼 김해 남가라의 귀부로 보아 525년 복건된 남가라의 신라귀속으로 본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하여는 몇몇 논자가 왕의 아들의 이름들이 다르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금관가야 항복기사로 볼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점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을 삼간다. 다만, 남가라 항복 기사상의 왕자들의 이름은 김유신의 혈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변조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는 필자도 무게를 두고 있다.
70 『일본서기』 흠명 23년조의 '山半下'와 같은 나라일 것이다.
71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조 참고.
72 『일본서기』 계체 7년 11월조 참고.
73 『일본서기』 계체 23년 3월조 참고.
74 위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조 기사에 백제와 가야제국이 합하여 신라에 맞서는 경우,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 화를 입을 우려가 있는 나라로 탁순국, 녹기탄, 가라를 들고 있다. 필자는 가라는 고령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신라의 판도가 이미 대구, 상주, 김천, 성주를 지배하고 있어 고령은 북쪽과 동쪽이 신라에 접하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걱정에 이유가 있다고 본다. 또 록기탄은 위에서 본 것처럼 남가라와 함께 신라의 침입을 받았던 점에 비추어 김해 옆의 창원이라고 보고 그렇다면 김해가 신라의 영토가 된 이상 당연히 화를 입을 걱정을 하여야 한다고 본다. 탁순에 대하여는 대구라는 설이 많은데, 이 시기 대구는 이미 신라의 강역이므로 부당한 비정이다. 창원이라는 비정도 있는데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럼 록기탄과 이중으로 비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필자는 탁순을 울산-부산 지역(이렇게 보면 탁순은 신라에 포위 당한 상태가 되고 신라의 침입을 받을까 걱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탁순이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즉 임나국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백제 측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같은 기사 중 탁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529년 임나국에서 모야신과 아리사등이 분열한 사실을 연상시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임나=탁순이 아닐까 강한 의심이 든다. 이렇게 볼 경우 신공기의 합리적 해석이 가능해지는 장점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75 『일본서기』 선화 2년조 참조.
76 『일본서기』 흠명 5년 11월조 참고
77 『일본서기』 흠명 8년조, 9년조 참고.
78 『일본서기』 흠명 23년조에는 562년 임나 타멸 기사를 싣고는 '一書에 의하면 21년이라고 한다.'라는 문 주를 달아 놓았다. 필자는 이 기사와 『삼국사기』 진흥왕 23년조(562)의 기사에 이사부와 사다함이 가야의 반란을 토멸하였다는 내용을 종합하여 560년에 점령당하고, 562년에 반란을 일으키나 토멸된 것으로 보았다.
79 『일본서기』에는 이 이후에도 임나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필자는 이 기사들은 대표명사 임나 또는 소국 임나의 복건을 위한 일종의 부흥운동 이야기라고 보고 있다. 일본부는 나오지 않는데 대화정권이 이전과 달리 이 지역에 구체적인 본거지가 없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민달천황때에는 주로 신라에 외교적 복건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고, 승준천황때에 어느 정도 신라의 양해 하에 작은 거점이 마련된 듯하나(승준4년 8월조, 추고 8년 2월조, 추고 18년 7월조, 추고 31년 7월조 참고), 그나마 추고 31년에 완전히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80 필자가 이 기사를 임나국의 멸망기사로 보지 않으면서도 여기까지의 기사를 검토한 것은 신라의 팽창과정을 정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임나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핀 기사들을 보면 이미 530년대에 신라의 강역은 낙동강 중상류 동안과 김해-창원까지 미친 것 같다. 이는 신라측 기사도 아니고 일본 측 기사이니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임나를 김해 또는 부산에 비정하는 설까지 562년에 임나가 망한 것으로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기사를 임나국 멸망기사로 보려면 적어도 임나의 위치를 낙동 서안에 두어야 할 것이고(고령설 또는 함안설 처럼), 낙동강의 동안이나 김해에 두려면 이 기사를 임나 멸망기사로 보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81 필자가 보기에 『일본서기』에 사용된 현의 용례상 4현이라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맞는다고 생각한다.
82 논자 가운데에는 임나가 소국이라는 근거로 『일본서기』 추고 31년조의 '任那小國'을 그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사는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임나국 복건추진 과정에 있었던 임나에 관한 이야기로 볼 여지가 있으므로 이 기사만으로 임나가 소국이라는 점이 분명히 밝혀졌다고 할 수는 없다.
83 김성호 2000 pp. 290 이하에 의하면 158-500년 사이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왜침기사는 총 33건이고 그중 『일본서기』와 대응관계가 있는 것은 4건뿐이고, 29건은 대화정권과 무관한 자칭 왜침에 불과하다고 한다.
84 김상 2002 pp. 138-139면에는 와 같은 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왜는 신라의 가장 큰 적국이다. 시종일관 신라를 괴롭힌다.
2. 왜는 신라의 남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나라이다.
3. 병력의 규모를 볼 때 고구려나 백제같이 수만명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당시의 중국 사서에 기록을 남길 정도의 대국은 아니며 신라와 비슷한 규모의 작은 국가이다. 필자는 이러한 평가를 대체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85 『삼국사기』의 왜를 임나로 본다고 하여 임나국과 대화정권 사이에 어떤 혈연적 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본고에서 인종적 문제는 완전히 논외로 하였다.
86 신라와 임나(왜)간의 세력균형에 대하여 필자는 포상팔국전쟁기, 안야-신라 우위기, 백제-왜용병 체계 성립에 따른 임나우위기(400년까지), 광개토왕 전쟁기, 임나의 공세적 우위기(500년경까지), 신라우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87 필자는 2세기부터 3세기말경 박, 석씨 신라와 임나의 국경이 고정되어 있었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신라-왜간의 치열한 분쟁을 고려해보면 임나가 경주계로 진출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신라가 울산 북부의 몇몇 성읍을 일시적으로 점령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다만 필자가 제시하는 것은 보통의 국경선을 상정해보는 것이다.
88 이곳 죽동리에서는 청동기일괄유물[慶州竹東里出土靑銅器一括]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89 후술하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모화에 임관성을 지어 왜적을 막았다고 한다. 신라인들의 생각에 왜와의 국경 관문이 모화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90 필자는 5세기 초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위하게 된 것이 그 이후 신라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역의 달천철광산을 신라가 소유한 것이 계기라고 보는 것이다.
91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신라/양주/임관군조. 臨關郡 本毛火一作蚊化郡 聖德王築城 以遮日本賊路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領縣二 東津縣 本栗浦縣 景德王改 名 今合屬蔚州 河曲一作西縣 婆娑王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92 『삼국유사』 「기이」 상 내물왕 김제상 편. 옛 강동면 구류리 부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는 5세기 초인 눌지왕때에는 울산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신라측 영토로 바뀌었다는 필자의 견해와 일치하는 결론을 가져온다.
93 그런데 굴아화촌을 언양읍지역에 비정하는 견해들이 많다. 그 근거를 정확히 알 수 없는바, 언양읍 지역은 본래 울주와 구별되는 지역이고{언양은 본래 양산에 속하다가 고려 8대 현종(1018년) 울주에 속하게 되었으나, 100여년 후인 인종 21년(1143년)에 다시 독립하여 언양현이 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편찬된 인종 23년(1145년)에는 울주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원문의 '현재 울주'라는 설명에 의하면 구아화촌을 언양 지역으로 보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임관군의 중심이라 할 외동읍 모화지역에서 너무 멀다(외동과 언양사이에는 두서면, 두동면 지역이 끼어 있다). 만약 임관군이 언양읍 지역까지 관할하였다면 임관군은 월성군 외동읍, 양남면, 울산 북구 전체, 중구 일부, 울주군 범서면 일대 뿐 아니라, 울주군 두서, 두동면 전부와 언양읍의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까지 관할하였다는 것인데,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후술하는 것처럼 필자는 우시산국을 언양읍 지역에 비정한다.
94 과연 이 『일본서기』 「수인기」의 기사가 파사왕때인 2세기 초의 일로 볼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추가적인 연구 문제이다. 『일본서기』의 기년체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논외로 하며, 필자는 2주갑인상론을 무조건 적용하는데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 밝힌다. 참고로 김성호 2000 pp. 308은 수인 원년을 120년으로, 김상 2002 pp. 180은 117년으로 보고 있다.
95 이러한 전승은 후술하는 거도 설화를 연상하게 한다.
96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고 이로 인하여 치술신모가 되었다고 하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박제상의 부인 이름이 치술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이 치술령이 되었다는 것이다(김태식 2002, pp.76 참고). 어떻듯 현재 지명이 치술령인 산에서 박제상의 처가 왜국을 바라보았다는 점은 같을 것이다.
97 최병현 1992, pp. 373은 520년 경을 그 하한으로 보았고, 마지막 적석목곽분을 지증왕릉으로 보았다.
98 『삼국사기』 권44. 열전4. 「거도전」
99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이사부전」
100 위에서 본 것처럼 『일본서기』 계체 23년조에는 법흥왕때인 528년경 임나문제에 개입하기 위하여 이사부가 군대를 지휘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법흥왕대의 기사가 전혀 없는 것이다.
101 김성호, 전게서, 287면은 태화강 북안의 염포지역을 우시산국으로 보는 듯한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102 『일본서기』 웅략 21년 3월조.
103 위에서 본 것처럼 이때 신라는 거의 임나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거도전에 우시산국, 거칠산국이 국경에 끼어 있었다(介居)는 표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04 거칠부의 이름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아버지인 이사부가 거칠산국을 정복한 것에서 따온 이름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105 동아일보(울산 정재락기자)는 2002년 12월 23일“울산, 땅만 파면 문화재”라는 제목하에 울산지역에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있다고 보도하였다. 대략의 내용을 보면, "울산지역 매장 문화재에 대해 창원대 박물관은 1997년 조사에서 300여 곳이라고 밝혔으나 울산문화재연구원은 최근 500∼1000곳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였다고 하면서, 울산발전연구원 장정남(張正男) 문화재 센터장의 발언을 인용하여 "경주는 AD 300∼700년 사이의 문화재가 발굴되는데 비해 울산은 이보다 앞선 기원전∼AD 400년 사이의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고 국내 매장 문화재의‘보고(寶庫)’인 울산의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철저한 문화재 발굴조사가 불가피하다"보도하고 있다. 기사가 사실이라면 신라의 지방세력이라고 보아온 울산에서 경주보다 앞선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06 김원룡은 기원 전후부터 약 200-300년간을 원삼국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김원룡 1999, pp. 87 참조). 따라서 김원룡이 삼광리 고분을 원삼국시대의 고분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이 고분군이 늦어도 3세기 대의 고분이라는 말이다.
107 김원룡은 이 삼광리 고분군을 원삼국시대의 고분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김원룡은 다른 석곽 군집묘군(동래 오륜대 고분군 등)에 대하여는 그 고분군 중 일부 석곽묘는 원삼국시대(3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지만(김원룡 1999, pp. 89-90), 석곽묘군 가운데서 유일하게 삼광리고분군만은 원삼국시대의 고분이라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김원룡은 낙동강 동쪽지역 삼국시대(4세기 이후)의 석곽묘군 중 가장 고식의 것으로 동래 오륜대 고분군(오륜대고분군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여 수혈식 돌덧널무덤 29기, 독무덤 1기, 고인돌 1기를 발굴하였다. 또한 오륜대 고분군이 위치한 부산 오륜동은 필자가 확대된 시기의 임나 강역으로 지목한 범위 내에 있다)을 지목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이 오륜동 석곽묘는 그 구조나 모여 있는 모습이 울주군 삼광리 고분군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였다(김원룡 1999, pp. 145). 삼광리 고분군과 오륜대 고분군 간의 계승관계를 인정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08 삼광리 고분군의 석곽묘 양식의 기원에 대하여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북방의 석곽묘제를 계승한 것으로 판단되는 대전 괴정동 석곽분의 영향일 수도 있고, 울산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지석묘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109 이 발굴조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유적 위치 :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 산23-2번지 일원
2. 조사 시점 : 2001년 5월 16일 부터
3. 조사 면적 : 약 4600평
4. 조사 기관 : 울산문화재연구원(단장 이겸주)
110 울산 지역에는 검단리 유적이외에도 환호시설이 갖추어진 주거지가 속속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재)영남문화재연구원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천상리 527-1번지 일원에 대하여 실시한 천상리 취락유적 발굴 조사에서도 환호시설이 발견되었고, 울산문화재연구원이 실시한 범서-울산간 도로 확장, 포장공사 구간내 울 산 사연리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5세기 경의 2중 환호시설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1 지석묘는 본고의 임나의 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석곽묘가 지석묘나 석관묘에서 유래되었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임나선행문화로 볼 여지가 있다.
112 그 북쪽에는 좌천리 고분군 100기가, 서쪽에 바로 접한 지역에는 철마 고촌리 고분군 100기가 존재하고 있다. 다만 도굴들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나, 이른 시기의 수혈식 석곽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113 정식 조사가 없고 도굴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연산동 고분군(蓮山洞古墳群)도 같은 식의 수혈식 석곽묘인 것으로 보인다.
114 『삼국사기』에는 석탈해가 유리왕 다음의 왕으로 되어 있지만 이로 인하여 세계나 왕위 계승상 매우 부자연스러워지므로 탈해는 아달라 후반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연구는 본고의 범위를 넘으므로 여기서는 더 살피지 않는다.
115 물론 이러한 주장은 순전히 가정이고 토함산 동쪽에 대한 발굴로 그에 상응하는 유물이 나올때에만 존립근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16 이러한 의문은 임나 김해설이나 부산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117 『일본서기』 흠명 원년 9월조에 의하면 임나를 백제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적은 군사로는 신라를 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경주를 적은 군사로 습격할 수 있는 지역은 울산 정도의 지역이라야 적당한 것이 아닌가 한다.
118 위에서 본 『일본서기』 현종 3년 조.
119 언어적 방법에 의한 지명 비정은 방법론상 불완전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만 다른 증거와 더불어 하나의 간접증거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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