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한전」의 진왕 및 월지국의 성격에 대한 재고

Reconsideration on the Characteristics of Jinwang(辰王) and Woljiguk(月支國) in Sangouzhi(三國志)

신동훈 (Shin, Dong Hoon)
서울대학교

요약

최근의 풍납토성 발굴은 3세기 이전에 한강유역에서 강고한 정치적 중심지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이 확인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경우, 삼국지 한전을 중심으로 한 3세기 이전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인식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지하는 대로,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당시의 상황이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풍납토성과 같은 정치체의 존재가능성은 삼국지에 대한 사료적 가치의 신빙성에 있어서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고에서는 최근에 발견된 풍납토성의 존재는 3세기 이전의 한강유역에서의 강고한 정치체의 성립을 상징한다는 보고가 정설로 굳어질 경우에 삼국지 한전은 사료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분석을 시행한 결과,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지역의 문화권은 초기에는 북방으로부터 이동해 온 외래계와 토착계의 결합으로 파생되었지만 그 안에는 마한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백제로 상징되는 세력이 혼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기존의 사료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거칠 경우 삼국지 한전에서 편린으로만 전해지는 진왕의 한반도 남부지역에서의 패자로서의 존재는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삼국지 한전에 나와있는 삼한의 맹주로서 의 진왕에 대한 해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행하게 되면, 풍납토성의 발굴과 관련하여 많은 암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납토성은 후대에 이르면 백제국가의 왕성으로서 기능했던 시기도 존재했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 토성의 주체가 시기를 두고 교체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보며, 이는 진왕으로부터 백제로의 패권의 교체를 의미한다고도 불 수 있겠다. 다만, 진왕에 대응될 수 있는 유적이 다른 지역에서 향후 확인되거나 풍납토성의 발굴결과 이른 시기부터 백제와 연관되어 성립되었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면 졸고의 논리는 자연히 폐기될 수 밖에 없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신뢰성은 당연히 제고(提高)되어야 할 것이다.

주제어

삼국지 한전, 월지국, 진왕

목차

  I.   머리말
  II.  풍납토성과 금강유역 세형동검문화에 대한 해석
       1. 풍납토성 발굴의 의미
       2. 금강을 중심으로 한 세형동검문화의 해석
  III. 삼국지 한전의 재해석
       1. 준왕의 남천지
       2. 삼국지한전 기사에 대한 몇 가지 재고
       3. 후대의 역사전개에서 본 진왕과 교통로의 의미
  IV.  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삼국지 한전에 의하면 3세기의 한반도 남부지역은 수십 개의 소국[1]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진왕"이라고 불리는 이들 소국들을 통할하는 왕의 존재와 그 왕의 치도인 "목지국"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어 단순한 소국의 난립상태는 아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삼국지에 의하면 진변한 지역의 소수의 소국을 제외하면 한반도 남부지역의 여러 소국들은 모두 진왕의 통제 하에 있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물론, 진왕의 통치는 후대의 신라, 백제에서 볼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진왕이라는 최상위의 권력자가 한반도 남부지역에 존재하여 여러 소국들을 통할한다고 보는 관점은 신라와 백제의 존재를 이른 시기부터 부각시킨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삼국사기가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 남부가 통합이 진전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삼국지의 경우는 이와는 다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 국지와 삼국사기 양 사서간의 신뢰성 문제를 파생시키게 되었는데 [2], 삼국지의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삼국사기와는 다르지만 정치적 통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삼국지와 후한서를 문맥 그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3세기 한반도 남부지역이 정치적 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임을 유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3] 그 통합의 정도와 범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은 채 소국의 병립이라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국고대사에서 삼국이라는 사회가 보여준 후대의 사회통합의 정도는 이전시기와는 일획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삼국시대의 사회에 있어서 강고한 정치적 통합체의 존재 가능성을 단순히 삼국지의 기술만으로 부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는 풍납토성이 발견되어 그 축조시기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종래 의 통설과는 달리 일부에서는 풍납토성의 축조시기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제기 하여 풍납토성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시대에 이미 존속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4] 현재까지 이에 대한 정확한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3세기 이전의 한반도 남부지역의 상황에 대해 기존의 설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을 바탕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 고 있는 반면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많은 논리상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도 역시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어서 [5] 풍납토성의 발굴로 백제의 건국연대가 올라간다 해도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전면적 신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풍납토성의 초축 시기가 3세기 이전, 서기원년을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경우에 일반적인 인식대로 삼국지 동이전의 사료적 가치가 완전히 상실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동안 삼국지가 동시기의 사실을 기록한 사서이자 민족지적인 구체성을 가진 사료로서 이용되어져 왔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 3세기 이전의 한반도남부지역의 상황을 고찰함에 있어 사료의 신뢰성을 삼국사기보다 하위에 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풍납토성의 발굴로 3세기 이전에 이미 강고한 정치체가 한강유역에 존재 했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 시기에 대한 제반 학 설을 재검토 해보고자 한다.

II. 풍납토성과 금강유역 세형동검문화에 대한 해석

1. 풍납토성 발굴의 의미

풍납토성은 종전까지의 원삼국시대에 대한 인식을 뒤엎고 3세기 이전 이미 강고한 정치체가 한강유역에 출현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되어 앞으로의 발굴결과에 따라 한국고대사의 기본 틀을 크게 뒤바꿀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러나 이 토성의 성격과 절대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된 의견이 도출되지 못하고 많은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우선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한 기존의 한강유역의 상황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박순발 (2002)에 의하면 풍납토성은 위례성을 구성하는 대성(大城)에 해당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주변의 석촌동 고분 주위에서 발견된 동진청자의 경우 및 발굴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풍납토성의 축조가 몽촌토성보다 빠르지 않은 3세기 중, 후엽을 상한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7]. 이에 반하여 발굴을 담당한 신희권 (2002)에 의하면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을 분석하면 주변의 다른 유적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위상이 확인되며 가장 이른 삼중환호까지 염두에 두고 계산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의 연대와 대체로 근사하다고 한다. 특히 토성의 축조연대는 토성절개조사를 근거로 서기 2세기이전에 축조가 개시되어 늦어도 3세기 전후에는 축조가 완료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기왕의 몽촌토성은 군사적 목적으로 서기 3세기 중, 후반 경 새로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8]. 한편, 풍납토성 내부 발굴조사에서는 평면형태 6각형의 대형 수혈주거지가 대규모로 정연하게 발굴되었는데(신희권, 2002) 이는 풍납토성과 관련된 정치적 집단의 성격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최근 한강유역 전역과 임진, 한탄강유역에서 계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이러한 양식의 주거지는 철기시대이래 한강유역과 동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독특하게 발달한 '呂字形' 또는 '凸字形' 주거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신희권, 2002).

이 여자형 주거지와 중도식무문토기=풍납동식무문토기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에 넓게 분포하는 양상이 확인되고 있는데 [9] 이 문화가 풍납토성의 축조집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 이흥종(1996)에 의하면 한강유역의 주거지는 크게 두 계통, 즉 재지계와 외래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중 재지계의 경우, 방형계 주거 지가 이에 해당하며 원형계의 경우, 와질토기를 공반하면 외래계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특 이한 것은 이 와질토기를 공반한 원형주거지의 경우, 부뚜막을 가지고 있는데 부뚜막이 한 강이남에서 확인되는 것은 처음으로서 그 기원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형태의 부뚜막이 중국 의 서부 내륙지역이나 북방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요녕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과의 관 련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여자형 주거지의 경우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이 지역의 재지계 주거지에 연원이 닿는다고 한다.

풍납토성의 경우, 연대가 이른 유물일수록 재지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경향은 토기에서도 드러난다. 보고에 의하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층위에서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에 타날문토기의 기술유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경향을 확인하고 이 시 기를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경으로 편년하였다. 그런데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경우, 상한을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 보고 있는 의견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한강유역의 재지계 토 기로 분류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이홍종, 1999) [10]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 의 문화는 초기에는 재지계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던 바탕 위에 외래계 문화와의 활발한 교류와 혼입이 예상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이홍종(1999)의 주장처럼 이 지역에 타날문 토기의 기법이 유입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기원전 2세기대의 고조선의 변천과 연관을 지을 수 있다면, 풍납토성이 위치한 지역에 삼중환호가 들어서게 된 [11] 변혁은 고조선의 변천 과 이에 연관된 세력의 남하와 관련을 지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위와 같은 보고를 간추려 보면 풍납토성의 주체는 (가) 풍납동식 무문토기 (중도식 무문토기) 혹은 와질토기 의 사용자 (나) 여자형 주거지를 쓴 사람들 (다) 철기문화의 본격적 보급과 관련이 있는 집단으로 간추려 볼 수 있겠다.

한강유역에서 최근 발굴된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지만 발굴자 측의 보고에 의하면 서기 원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축조되어진 원삼국시대 최대급 토성이라고 하므로 삼국지 한 전의 세계와 존속연대의 상당부분이 겹친다고 할 수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둘레가 4킬로에 달하는 이 성의 주인공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해명은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그려낸 3세기 이전의 한반도 남부사회의 상황을 해명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풍납토성의 축조연대에 대한 논의는 발굴결과가 축적될수록 해결될 가능 성이 높아지겠지만, 풍납토성이 3세기 이전에 이미 축조가 완료되었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 실로 판명될 경우, 삼국지 한전을 취신(取信) 하는 입장의 경우, 마한의 중심지를 한강유역 의 풍납토성에서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삼국지 한전의 사료적 가치를 상당히 낮게 평가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2].

2. 금강을 중심으로 한 세형동검문화의 해석

최근 마한의 역년을 청동기시대까지 끌어올려, 청동기시대부터 5말6초의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흐름 하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최성락, 2001). 이러한 시도는 물론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적어도 금강 및 영산강지역은 청동기시대 이 래 상호 밀접한 선후계승관계를 보여주면서 후대까지 이어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마한의 영역을, 금강을 중심으로 영산강유역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상정할 경우에는 굳이 단절 적인 전통의 "마한"의 출현을 상정할만한 이유가 없고 마한의 연원은 자연스럽게 세형동검기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까지도 소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박대재 (2002)는 기원전의 진국과 삼국지의 진왕을 모두 금강유역에 위치시키고, 진왕은 마한왕과 다른 존재로서, 금강유역에 국한된 세력을 가진 권력자로 이해하였다. 이에 의하면, 한강유역에서는 기원전의 진국에 비정할 만한 문물자료는 보이지 않으며(박순발, 1998) 진국의 위치를 금강유역에 비정한 기존의 입장은 기원전 2세기 무렵 남한지역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에 착안했던 것인데 근래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이 지역 세형동검문화의 양상이 주조철부, 철착을 공반하는 등 이미 철기문화의 세례를 상당히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어 이 지역에 마한의 중심지를 위치시키는 종래의 시도가 입증되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13]. 그는 또한 금강유역의 전한경[14]과 후한경[15]이 각각 기원전의 진국과 삼국지의 진왕과 관련이 있는 유물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한과 중국 군현의 공식경로인 조공무역을 통해 유입된 일종의 위세품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6].

그러나 세형동검문화에 공반된 철기유물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하 는 점에는 약간의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 특히 청천강이남지역 에서 세형동검문화가 번영하던 시기에 청천강이북지역에서는 이른바 연화보-세죽리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두 문화는 청천강을 경계로 명확히 구분된 문화적 양 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세형동검문화가 단순한 청동기 문화가 아니며 이 시기에 이미 철 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세형동검문화가 존속했던 시기를 초기철기시대라는 명칭 으로 도 부르는 것이지만, 세형동검문화에 부장된 철기와 청천강이북지역의 철기문화의 양 상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인다. 즉, 금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철 기는 주조철부, 철착 등의 극히 제한적인 철기에 국한되어 있는데 반하여 청천강이북지역은 이와 뚜렷이 구분되는 전면적인 철기문화의 도입양상을 보여주어 [17] 철기문화의 양상은 단 순히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가의 문제와는 다른 일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기원 후에 이르면, 금강유역의 철기문화의 양상은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 특히 경상도지역에 비교하여 결코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이는 한반도가 철기문화에 진입함에 있어 계통이 다른 형태의 철기문화가 유입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결국 진왕의 존재가 기술된 삼국지는 서기 3세기를 전후한 한반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3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금강유역이 삼국지에 기술된 대로 삼한 전역을 통할하는 세력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 정도의 우세한 발굴보고가 뒷받침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18] 이 지역의 정치적 지배자가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 명목상이나마 종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지적하자면 삼국지에는 마한은 준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종래의 통설에 의하면 대동강유역에 고조선이 존 재했으며 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축출되어 한반도 남부로 이동, 금강유 역에 자리 잡고 있던 한의 맹주가 되어 "한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19]. 이 시각은 대동강 유역에 준왕=위만=낙랑군이 연쇄적으로 설치되었다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금강유역에 목지국=월지국이 존재했다는 종래의 통설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 특히 대동강유역과 금강유역은 양자 모두 한반도 유수의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로서 준왕세력을 세형동검문화와 결부시킬 경우, 무리 없이 해석할 여지도 많다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금강을 중심으로 한 세형동검문화와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를 준왕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매개로 연결시키고 있는 현재의 동향은 최근까지 보고 된 고고학적 유물의 양상을 볼 때, 과연 어느 정도로 잘 부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금강유역과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는 병렬적인 것으로서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가지고 성립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21]. 즉, 금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유형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인 괴정동 유형은 대동강유역과 직접 그 문화적 연원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요하유역의 정가와자 유형과 더 긴밀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육로 보다는 해로를 통해 한반도 남부지역에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문화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岡內三眞, 1983; 이청규, 1991; 1997) [22]. 이러한 점은 같은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가 대동강과 금강유역에 존재한다는 점을 근거로 대동강과 금강유역이 각각 준왕 남천이전의 조선과 준왕이 남천한 한(韓)사회에 해당한다는 그간의 해석이 고고학적으로 잘 뒷받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게다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일부학자들에 의해 준왕의 남천과 연관된 유물로 간주되어 오던 완주 상림리 출토 중국계 동검들은 당초 생각처럼 북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바 다 건너 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동검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혜죽, 왕청, 2002). 이러한 고고학적 보고들 역시 금강유역의 유물의 양상이 준왕의 남천을 상정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준왕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어떤 문화를 누리고 있던 집단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고조선과 한의 위치를 비정하는 열쇠이기도 하며 반대의 경우도 역시 성립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고조선의 남천과 관련하여서는 필자는 금강유역보다도 한강유역을 지목해 볼만한 근거를 최근의 발굴양상을 통해 지적해 본다. 우선 금강유역은 우리나라에서 세형동검문화가 가장 빨리 시작된 지역의 하나로서 청동기 전기이래 남부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입지는 청동기후기에 이르기까지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고 보겠지만, 이러한 형세는 세형동검단계 까지도 뚜렷한 정치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한강유역에(권오영, 1986) 기원을 전후하여 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중도식문화로 상징되는 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하면 한강유역에서는 전형적인 세형동검문화가 그리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토광묘의 존재도 뚜렷하지 않고 낙동강유역과 같이 많은 수의 세형동검과 철기가 부장되는 양상도 찾아볼 수 없어서 무문토기-지석묘단계에서 대규모적인 세형동검문화의 유입을 거치지 않고, 그 다음 시기인 김해식 토기-철기문화단계로 바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는 한강유역에서 풍납토성이라는 일대 대도시가 건설되는 기원전 1세기-기원1세기의 시기에 이 지역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의미와도 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삼국지 동이전에 삼한지역의 소국들 중 상당수가 진왕의 기미를 받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마한 역시 당시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발달된 철기문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던 집단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지역을 우선적으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야한 다. 한 편, 최근 한강유역의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고조선계 유이민의 남하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이흥종, 2000) 서기원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이 지역의 변천의 최종적인 결과가 풍납토성의 축조이며 이 세력이 삼국지가 기술한 서기 3세기 이전의 한반도 최대의 정치적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아울러 감안해 본다면, 준왕의 남천지는 금강유역이 아니라 한강유역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한강유역의 문화적 동향이 기원전 1세기의 대동강유역의 문화적 패턴과 어떤 연동성을 쉽게 찾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준왕의 원거지는 한반도 외곽 즉, 청천강 이북 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다. 이는 우선 한강유역의 외래계 토기인 타날문토기를 비롯한 유물의 조합이 그 연원을 대동강유역으로 보기 쉽지 않다는 점에 기인하는데 [23]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의 또 다른 기회를 기약해야겠지만, 준왕과 진왕집단을 한강유역으로 비정할 경우, 그 선행형을 대동강유역보다는 오히려 청천강이북의 연화보=세죽리문화권의 어느 지역에서 찾 아야 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24].

결국, 종전의 인식과는 달리 삼국지 한전에서 보이는 "마한"이라는 사회는 재지적 세형동검문화의 성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철기문화의 유입과 함께 한반도 내부의 상황이 일변하면서 비로소 성립한 사회로 보는 것인데, 부연하자면 토착민과 북방에서 남하한 사람들 사이의 융합으로 말미암은 제3의 문화가 성립함으로써 비로소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한강유역의 철기문화의 발전 및 풍납토성의 축조에서 보여주는 양상과도 부합한다고 본다 [25]. 현재까지는 한강유역에서 종전에 백제계라고 간주했던 유물들이 확연히 확인되는 시기(풍납3기=몽촌1기) 이전의 양상에 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 루어져 있지 않으므로 후일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억측을 허락해 준다면, 종래의 생각과 같이 "마한"과 "백제"가 선주민과 이주민의 관계는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백제와 마한은 거의 유사한 한강유역의 문화권속의 집단으로서 서로 경합하면서 성장해 갔기 때문에 종전의 인식과는 달리, 문화적으로 양자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집단 속의 구성원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6]. 즉, 한강유역의 외래계토기를 준왕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나, 백제의 건국세력이나 모두 청천강이북의 연화보-세죽리 문화권에서 출발했다고 본다면, 문화적으로 상호간에 구별이 상당히 어려웠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백제는 삼국지 한전에는 진왕과는 분리된 존재로 나오지만, 삼국지 한전의 국명의 기재 순으로 볼 때 매우 지근한 거리에 병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볼 때 통설과 같이 백제와 마한은 이질적인 문화에 기반을 둔 집단이 아니라 거의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원 전후하여 한강으로 남하해온 집단 안에는 준왕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백제로 상징되는 세력이 모두 혼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들의 남하에 의해 한강유역의 토착 청동기인들과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철기문화의 압도적 우세에 의해 한반도 남부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이들 세력이 한강유역의 풍납토성, 문헌적으로는 "진왕"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2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풍납토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기의 한강 유역의 문화는 토착적인 문화와 외래적인 문화의 결합으로 제3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양 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28] 이 외래문화의 주체가 백제건국세력이라고 보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입장 중의 하나이지만,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한 세력이 백제 하나만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마한이란 한강유 역의 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에서 성장해 나온 집단과 금강유역을 위시한 재지적 세형동검 문화권에서 성장한 문화권을 하나로 묶은 집단이라고까지 추정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III. 삼국지 한전의 재해석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까지 고고학적 보고를 종합해 보면, 삼국지가 씌어졌던 3세기경 이미 한강유역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절대 우위에 있는 풍납토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됨으로 인하여 기존의 삼국지에 기반 하여 구축한 동 시기의 한반도 남단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재검토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설대로 금강유역에 삼국지 및 후한서 한전에 기술되어 있는 "삼한의 최고수장"인 진왕의 중심지를 위치시킬 경우, 삼국지의 신빙성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풍납토성의 발굴 과정에서 나온 기초적인 자료에서는 풍납토성이 이른 시기로 갈수록 재지적인 성격의 문화가 강하게 확인되며 풍납토성이 기반한 문화가 이 지역의 재지적 문화와 외래적인 문화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한강유역의 철기문화이라고 생각되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삼국지 한전에 등장하는 "진왕"과 "목지국 혹은 월지국"의 성격이 종래의 생각처럼 세형동검문화에 기반 한 토착사회의 성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와는 다른 계통의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성립된 사회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를 명확히 고구(考究) 하기 위해서는 삼국지 한전의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우선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1. 준왕의 남천지

우선, 준왕의 출발지인 "고조선"지역은 정확한 비정을 미루더라도 풍납토성이 3세기 이전에 한강유역에 이미 출현했을 경우, 한강유역을 준왕의 남천지로 가정해 보면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많이 생겨난다고 지적하고 싶다. 우선, 종래와 같이 진왕을 금강유역으로 본다면, 최근에 발견되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풍납토성의 경우는, 삼국지 한전의 기술에 대한 사실상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래 마한이 위치했다고 생각하던 금강과 영산강 지역은 세형동검문화가 상당히 발전되기는 했지만 진왕이 금강유역에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풍납토성이 한강유역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 확실해 진다면, 진왕을 한반도남부의 최고통치자로서 자리 매김 한 삼국지의 설명은 그 기반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29]. 따라서 삼국지가 3세기의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여과 없이 전하고 있다는 종래의 평가에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최대의 토성이 발견된 한강유역에 진왕의 통치중심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타진 해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지 한전에만 근거하여 본다면 한반도 남부의 패자는 백제가 아니라 진왕 (辰王)이다. 열거된 소국의 이름에서 백제국과 목지국=월지국은 별개의 존재로 기술되어 있으며 진왕은 이 중에서 목지국=월지국을 다스린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30]. 진왕이 직접 다스린다는 소국의 명칭에는 몇 개의 다른 전승이 존재하는데 [31] 이 들 중 어느 것이 정확한 명칭일지는 알 수 없지만 [32] 본 고에서는 "월지국"이 원래의 진왕의 통치지역을 가리키는 호칭이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제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현대 중국 음으로 비교할 경우, "월지"의 "월"과 "위례"는 상당히 근사한 발음이 나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33] 불안한 언어학적 비교라는 점을 약간이라도 용납 받을 수 있다면, 삼국지의 "월지국"과 풍납토성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고 본다. [34]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삼국지의 찬자는 "진왕"에 대한 기술 다음에 준왕에 대한 부분을 서술함으로써 양자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집단으로 볼 수 있도록 의도하여 배 치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준왕은 고조선에서 탈주한 후 한(韓)으로 들어와 한왕 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35] 후한서 한전에는 준왕의 세력은 곧 절멸하고, 마한인이 다시 이 지역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36] 이 이야기는 준왕과 후대의 진왕이 직접적인 혈연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지역에 존재했었던 세력이라는 점에 대한 추측은 가능하다고 본다. 만약 3세기의 삼국지 한전에 기술되어 있는 진왕에 대한 기록이 옳고 진왕과 준왕도 서로 유사한 지역에서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두고 성립한 것이라면 풍납토성의 발굴로 진왕의 중심지가 금강유역으로 보기 어려운 이상 준왕의 남천지 역시 한강유역이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미흡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를 통해서 어느 정도 설 명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즉, 풍납토성의 가장 아래층에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순 수기가 존재하는데 이 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송국리식 토기와 연관관계가 깊은 재지적 전통 위에 있는 토기라고 한다(이홍종, 1996). 이 재지적 토기와 함께 발견되는 타날문토기가 출현하는 것은 이홍종(1996)의 구분에 의하면 한강유역의 토기변천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데, 대개 기원전 2세기대로서 철기문화의 파급과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다고 보아 기원전 2세기대의 고조선의 변천 즉, 준왕 남천이나 위만조선 멸망과 관련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풍납토성에서 보이는 집 자리와 토기의 변천도 거의 유사한 경향을 보이므로, 풍납토성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순수기에서 와질토기와 공반 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처음으로 조영되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되며 더욱이 이런 변화가 고조선의 변천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현재로서는 준왕의 남천지가 바로 한강유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한은 종래의 관점에서는 토착적인 성격의 정치세력으로 간주하여 왔지만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면, 마한은 의외로 중국적 문화의 영향이 강한 집단으로 비춰지는 측면도 강했음은 한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하면 마한이 멸망할 때의 장수로 주근(周勤) [37]과 맹소(孟召) [38] 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이름은 단순히 토착인의 이름을 음차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후대에 조작되지 않았다면 중국식 이름의 영향을 받은 인물의 이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마한을 구성하는 집단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특히 주근은 우곡성에 근거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馬韓 舊將周勤 據牛谷城叛) [39] 고 하였는데 이 우곡성은 말갈과 관련하여 깊은 관계가 있는 성으로 되어 있다. 우선 백제본기 다루왕 29년에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게 하였는데 말갈을 방비하기 위해서라 하였으며 [40] 기루왕 32년조 [41] 과 구수왕 16년조 [42] 에도 다시 말갈과 관련지어 우곡성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같은 말갈은 백제의 북쪽에 접해있고 [43] 백제의 경계를 침범하거나 [44] 한산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여 [45] 우곡성은 말갈과 지근거리에 있음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분명하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근이 반란을 일으킨 우곡성은 한강유역의 백제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점에 있었던 성이 되겠는데 종래와 같이 금강유역에 "마한"의 세력이 있지 않고 백제와 근접한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한"과 관련되어 나오는 또 다른 지명은 원산성과 금현성이 있다 [46]. 이 두개의 지명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모두 미상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현재 원산성의 경우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령왕 12년조에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이라 하여 가불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가불성의 경우, 경기도 가평으로 보는 견해와 충북옥천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고 한다(김병남, 2002).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가불성을 경기도 지역 으로 보는 쪽을 취하고자 하는데 이는 최근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남정 이후에도 한강유역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수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동성왕과 무령왕 연간에 나타나는 기록을 통해서도 재확인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에 기반 한 것이다(김병남, 2002). 즉, 백제본기에는 한성과 관련된 기록이 웅진 남천 이후에도 계속 간취 되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기록이거나 지명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백제가 한강 이남을 계속 영유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앞서 이야기 한 무령왕대의 기사에서 고구려군이 원산성을 공격하기 불과 5년 전인 왕7 년에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이라하고, 또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라 하였는데, 여기에 나온 고목성, 한성, 횡악등이 김병남 (2002)에 의하면 연천, 서울, 삼각산 등으로 비정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한강유역이 백제와 고구려사이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산성 역시 이들 한강유역에서의 전투에서 많이 경과하지 않은 시기에 고구려와 관련하여 사서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한강유역에서의 고구려와 백제간의 치열한 접전의 판도 안에 놓여져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47] 이런 점은 금현성의 경우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마한과 관련된 錦峴城과 유사한 金峴城이 나오는데, 이 금현성은 역시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공방을 벌일 때 함께 나오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48]. 이러한 면들을 고려해 본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한 관련지명들은 현재 명확히 비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모두 한강유역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고려하면, 현재까지 마한의 중심지를 금강유역에 비정할 충분한 근거가 확보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준왕의 남천지=마한의 중심지는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한강유역에 있었을 가능성 역시 고려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2. 삼국지한전 기사에 대한 몇 가지 재고

여기서 삼국지 한전의 내용을 "진왕"의 치소를 한강유역, 구체적으로는 풍납토성에 둔다는 가설을 전제에 두고 재해석 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최근 발견된 풍납토성이 3세기 이전에 이미 축조가 완료되어 삼국지의 시대에 한반도 남부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 던 중심지라는 것이 입증될 경우, 삼국지 한전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고려가 될 것이다.

우선, 진왕이 통할하던 마한이라는 사회에 대한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마한에는 군장의 경우, 최고정점에 선 진왕 외에도 지배하는 사회의 크기에 따라 신지, 읍차 등의 칭호가 있 었는데 [49] 큰 나라는 만 여가 정도,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 총 인구는 십 여 만 호 정도였다고 한다 [50]. 이는, 전성기시의 낙랑군의 호수가 6만여호, 인구가 약 40만 정도였다고 하는 점을 감안해 볼 때 [51] 에도 상당한 인구이며 당시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히미코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숫자와 맞먹는 정도의 인구 [52] 로서 삼국지에 기술된 대로 마한전역을 진왕이 통제하고 있을 경우 결코 작은 세력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군장들 상호간의 중층적 위 계가 존재했는가 하는 점인데, 사실 여부는 차치 하고라도 삼국지의 찬자는 소국의 통치자들 사이의 중층적 위계질서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1)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2) 弁 辰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
(3) 馬韓在西...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4)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 支 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 善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伯長
(5) 弁辰亦十二國...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먼저 사료 (1)은 후한서에서 인용한 것인데 [53], 마한의 왕이 "진왕"으로서 목지국에 도읍하고 있는데 삼한전체의 총왕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게다가 진변한의 왕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한인"이라고 기술함으로써 마한의 "진왕"이 실제로 삼한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54] 사료 (2)에 의해서 이러한 "진왕"의 모습은 더 뒷받침 받을 수 있다고 보는데 사료 (3), (4) 그리고 (5)에서는 한에 존재하는 수장에 대한 명칭과 관직의 명칭을 볼 수 있다. 명칭들 사이에는 우열이 있는 것이 확인되지만, 이 서열의 정점에 진왕이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사료 (4)에는 신지에게 문맥이 분명치 않은 내용의 "가우호"를 한다고 하고 있는데 박대재(2002)에 의하면 이 부분은 진왕이 가우호의 주체로 보는 부분과 객체로 보는 부분으로 의견이 갈리어 있기는 하지만 복수의 신지의 명칭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지가우호..진지렴"의 부분은 진왕과 여러 명의 신지 사이의 상하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일부의 의견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55]. 즉, 이병도 (1959)에 의하면, 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의 부분에서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소국의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臣雲 安邪 臣離兒 拘邪등은 각각 臣雲新國, 弁辰安邪, 臣沽國, 弁辰狗邪등의 나라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대체로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진왕과 신지는 동일한 성격의 존재로 파악할 수 없는 상이한 위상의 소유자 로서(이병도, 1976) 삼한의 신지는 복수의 존재인데 반해, 진왕은 그보다 상위의 단일한 존재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수 있다고 한다(박대재, 2002). 결국, 위의 4개국은 진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다른 소국과도 역시 차별화 된 존재로서 진왕과 다른 소국의 중간단계에 존재하던 정치적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최근의 연구(윤선태, 2001) 에 공감을 표하는 바다 [56].

삼국지에는 이러한 진왕이 존재하던 마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6)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57]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이 사료는 무척 흥미로운 부분인데, 마한의 영역 내에서도 북쪽 지역과 남쪽지역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마한의 북방은 군현에 가까워 서 자못 예속이 밝았지만, 먼 곳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인데 전통적인 마한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마한 내부에 상당한 정도의 이질적 풍속을 가진 집단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종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료에 주목하여, 마한을 다른 사회에 비해서 보다 토착적인 성격의 집단으로 파악하였다고 본다. 즉,

(7)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 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在上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棺無槨
(8)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聚歌舞飮酒晝夜無休 其舞數十人 起相隨踏地低 手足相應 節奏有 似鐸舞
(9) 其男子時時有文身
(10)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이라 하였는데 이 구절들은, 삼국지 한전의 마한관련 기록을 전통적 토착사회에 보다 가까운 상태로 인식하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무리 없이 보다 "전통적 사회"에 가까운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인 금강유역을 마한의 중심지로 해석하는데 연결되어 진 것 같다. 그러나 삼국지 한전의 마한에 대한 기술에는 상반된 상황을 서술한 것 같은 내용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11) 散在山海間 無城郭 [58]
(12)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 之 通日喚呼作力 不以爲痛 以勸作且以爲健 [59]

과 같은 사료는 마한 내에서도 지역 간의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차이가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마한이 대방군과의 접계지역 에서 시작하여 한강유역을 정점으로 금강유역 이남의 어느 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는 상태로서 비록 많은 수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해도 그 영역의 북쪽에는 철기문화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중국문화에도 밝던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남쪽에는 이들과 어느 정도 이질적인 문화의 집단, 즉 전통적인 세형동검사회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우선,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나열되어 있다.

(13) 1有爰襄國 2牟水國 3桑外國 4小石索國 5大石索國 6優休牟 國 7臣 沽國 8伯濟 國 9速廬不斯國 10日華國 11古誕者國 12古離國 13怒藍國 14月支國 15咨離牟廬國 16 素謂乾國 17古爰國 18莫廬國 19卑離國 20占離卑國 21臣 國 22支侵國 23狗廬國 24 卑彌國 25藍奚卑離國 26古蒲國 27致利鞠國 28 路國 29兒林國 30駟廬國 31內卑離國 32感奚國 33萬廬國 34酸卑離國 35臼斯烏旦國 36一離國 37不彌國 38支半國 39狗素 國 40捷廬國 41牟廬卑離國 42臣蘇塗國 43莫廬國 44古臘國 45臨素半國 46臣雲新國 4 7如來卑離國 48楚山塗卑離國 49一難國 50狗奚國 51不雲國 52不斯 邪國 53爰池國 54 乾馬國 55楚離國 [60]

이러한 소국명칭의 배열은 무작위 하게 배열된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남쪽까지 순서대로 배 열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천관우, 1979). [61] 다시 말해서 마한관련 50여 국은 북쪽에서 남쪽까지 내려갈 때 접하는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다는 주장인데 위 50여 국의 위치를 분석해 보면, 월지국은 구체적으로는 경기남부-충남북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많아 천안지역 혹은 예산방면이 온당하다는 설도 있었다. [62]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어봐야 할 것은 만약 소국명칭의 배열에 대한 전제가 옳다면, 백제와 월지국은 매우 지근거리에 있었는데 월지국의 북쪽 즉, 대방군에 가까운 쪽에는 모두 13개의 나라가 있어야 하며 월지국의 남쪽에는 41개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63]. 이는 소국들 중 월지국 북쪽의 백제가 한강부근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면, 금강유역에 월지국을 위치시키는 시도는 상당히 무망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월지국은 경기남부-충남북부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특히 천안지역을 비롯한 충남지역 북부지역은 많은 관심을 끄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지역에는 금강유역의 양상과는 차별화 되는 철기시대의 유적이 다수 보고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월지국을 천안지역이나 보다 해안 쪽에 위치한 풍납토성 보다 100리 남쪽인 지금의 아산만과 태안반도를 중심으로 한 아산, 예산, 홍성 일대에 비정 하는 예가 늘고 있다 [64].

이는 월지국을 금강유역에 비정하는 경우보다는 보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귀 추가 주목되는 것이지만 이런 시도도 적어도 현 단계에서 월지국의 통치자인 진왕이 마한의 맹주라는 것을 인정하고, 삼국지가 3세기의 한반도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 전제된다면, 어째서 풍납토성보다 분명한 열세에 있는 "천안지역의 월지국"을 "풍납토성의 백제"보다 더 상위의 존재로 묘사했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게된다. 만약 월지국이 금강유역, 혹은 천안지역으로 비정 된다면 결과적으로 삼국지 한전에 의한 3세기 한반도 남단의 재구성이 어려워지게 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현재로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여기서, 마한전에 기술된 소국 중 최남단에 속하는 지역들을 살펴보면, 건마국이 54번째에 존재하고 있는데 마한전의 소국들이 북쪽에서 남쪽의 순으로 배열되었다고 보는 견해에 반하여 건마국은 전통적으로 현재의 전북 익산 금마면에 비정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한의 영역이 전남 남단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에게 혼란을 주어왔다 (박대재, 2002). 이 문제는 마한의 남쪽 경계와도 관련이 있지만 우선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잘 알려진 대로 남만(南蠻)인 침미다례가 분쇄된 후 백제 의 초고왕과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오니 比利酸中布彌支半古四邑이 스스로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동안 이 읍의 명칭을 둘러싸고 比利 酸中 布彌支 半古 四邑으로 읽어 야 한다는 의견과 比利 酸中 布彌 支半 古四 邑으로 읽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 여 혼란을 주어왔었다 [65].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의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삼국지 마한전에 나오는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이 음의 상사에 의하여 일본서기 신공기의 布彌 支半 古四의 세 읍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66]. 만약 이러한 추정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면, 이 세 읍이 대체로 전북지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이상, 삼국지 마한전의 소국들 중, 일부의 위치가 추정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들 소국들이 일부의 주장대로 전북지역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마한전의 내용상 이들보다 뒤에 기술된 16개의 소국들의 일부는 전남지역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한편, 월지국을 한강유역으로 비정 하는 시도가 받아들여 질 수 있다면, 월지국과 벽비리국 사이에는 19개의 소국이 존재하므로 이들 소국들은 충남 및 경기도 남부지역에 비정이 가능해 질 것이다 [67].

진왕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또 하나의 다른 집단인 진변한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진왕이 "가우호"된 신지를 통한 삼한의 통제가 마한지역과 변한지역에 공히 미치고 있었다고 주장한 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즉, 삼국지에 의하면 진왕의 영향력은 마한에만 미쳤던 것이 아니고

(14) 弁 辰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 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이라 하여, 변진한의 일정 지역까지도 포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68] 변진한에 대한 삼국지의 기술을 보면,

(15)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抵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 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辰)樂奴國 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馬延 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 辰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 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이라고 하여 진변한에 모두 24개의 나라들이 있음을 서술하고 이들 중 12개 국가는 진왕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에 이 부분의 신빙성 문제를 두고 큰 논란이 있었지만, 삼국지 한전의 이 기사를 그대로 취신해 볼 경우 진변한 지역에 진왕에 속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이 혼재해 있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소국명 중 에 크게 국명에 "변진"이라는 칭호를 붙인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는데, 사료 (4)에 가우호된 신지에 "안야"와 "구야"가 각각 변진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변진이라는 이름을 쓴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 중에서 전자의 경우야 말로 진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왕에 속한" 12개국으로 삼국지에서는 기술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싶다. 그런데 변진관계 소국들의 지리적 배치에 관해서는 윤선태 (2001)에 의하면 낙동강수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만나는 반로국 (고령), 마연국 (밀양)을 지나 최남단의 구야국 (김해)에 도달한 다음, 이어 서북쪽의 안야국 (함안)에 내려갔다가 남강의 수로를 따라 낙동강 본류에 합류하여 다시 마연국을 거쳐 독로국 (동래), 사로국 (경주), 우중국 (울진)등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69]. 그런데,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섬진강 수계와 남해안 지역이 신석기시대부터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었음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고 하는데 (송은숙, 1998) [70] 곽장근 (1999)에 의하면, 금강과 섬진강을 연결하는 남북방향의 교통로는 후일의 백제가 가야세력내지 왜와의 교역로로 사용했던 통로로서 백두대간을 넘어 가야지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4세기 전반대에 이르면 이 지역에는 중형급 고총이 출현하지만 곧이어 단행된 근초고왕의 남정으로 소멸되게 된다고 보았는데 이 고총들의 매장주체부는 수혈식 석곽묘로서 묘제와 유물의 속성이 가야고분과 밀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어 그 조영집단이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71]. 결국,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간주하고 풍납토성으로부터 북쪽지역에는 13개국이 존재했다는 점, 그리고 삼국지 한전에 나타난 마한 소국 중 "가우호"된 4국이 진왕과 다른 소국들의 사이에 존재하며 진왕을 대표하여 다른 소국을 통괄하던 존재로 본다는 통설을 받아들여 보면, 이들 가우호된 신지가 통할하는 소국의 위치는 삼국지의 기술순서와 상대적 거리로 미루어 볼 때, 경기도 북부=신분고국, 영산강유역=신운신국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림 1). 이는 그 전면적인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신분고국과 신운고국은 상대적으로 비정된 위치를 가지고 판단해 본다면,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가장 유력한 교통로 주위에 존재하던 상대적으로 우세한 단계의 소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72] 특히 신분고국과 백제국은 삼국지 한전에는 바로 옆에 기술되어 있는데 [73] 이는 풍납토성을 진왕의 치소로 볼 수 있다면, 신분고국과 백제국은 양자 모두 한강북부에 배치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진변한 지역에 존재하는 구야국과 안야국의 경우를 앞서 기술한 대로 전북동부지역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경남 내륙지역, 최종적으로는 김해지역으로 들어오는 경로 상에 위치한다고 볼 때, 이 두 나라 역시 한강유역의 진왕으로부터 출발하는 교통로가 한반도 남단까지 이르는 경로의 도중에 위치하여 주변의 소국을 통할하던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74]

3. 후대의 역사 전개에서 본 진왕과 교통로의 의미

끝으로 삼국지 한전에서 볼 수 있는 진왕과 이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교통로가 후 대의 역사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갔는지에 대한 약간의 천견을 피력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윤선태 (2001)에 의하면, 마한의 통합은 비록 백제에 의해 완수되지만, 그 통합의 최초움직임은 목지국의 진왕에서 비롯되었고, 삼국지 한전은 바로 그 진왕의 역사라고 하였는데, 논지의 상당부분에 공감하는 바다. 최근 한국청동기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중국동북부와 한반도라는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한 이 문화는 강 한 공통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역적으로 다양한 유형을 낳으면서 발전해 갔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유형들 간의 공통성 유지를 위해서는 이 지역들 간의 긴밀한 교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교역로와 정치세력의 발전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겠다 [75]. 즉, 청동기전기에 요령성과 남만주,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그 문화적 성격에 있어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을 갖게 되는 현상은 이 문화권내에 어떤 고도의 정치적 통일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문화권내부의 수많은 유형들 사이에 긴밀한 문화적, 인종적 교류가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한국청동기문화의 흐름이 청동기전기에는 아직 일본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청동기전기와 후기의 문화적인 교류의 양상은 항해와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와도 관련을 지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76]. 그러나 청동기후기에 들어서면, 한국청동기문화는 서일본으로 연장되어 야요이 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데 [77], 한반도남부까지 이르렀던 교역로가 서일본까지 연장되게 되어 이 지역에 문화적인 급변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본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요이 전, 중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문화적, 인종적 흐름의 방향은 야요이 후기에 이르면 이와는 반대방향의 역류현상이 관찰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서기원년 이후의 일정시기에 이르면 왜계유물이 한반도 남 부지역의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78], 이러한 유물의 성격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이 역시 잘 발달된 무역로가 당시 대방군이 위치한 지역에서 한반도를 통하여 일본의 세토내해까지 이르는 경로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에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79]. 이러한 왜계유물의 사용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삼국지 한전의 기사에서도 쉽게 간취 할 수 있는데

(16)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와 같은 부분은 한반도의 해안지역에 존재했던 왜계 이주민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80].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서부지역에 이르는 이러한 "무역로"의 존재와 이를 통한 문화, 인구의 이동은 앞으로의 연구보고에 의해서 더욱 정치(精緻)해져야하는 성질의 것이지만, 현재의 미흡한 자료를 가지고 성급한 추론을 해보자면, 이러한 무역로의 성립과 붕괴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의 전개에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필자는 백제와 신라라는 사회는 한국청동기시대이래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존재하던 "교역로"에 대해서 이를 압박하여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다. 즉, 세토내해의 교역로의 장악을 통해 일본의 야마타이국이 서부일본의 패자로 발전해 간 것처럼, 한반도에서도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구야국에 이르는 지역의 교통로를 진왕을 정점으로 이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은 소국들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서 유지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추후, 다시 다른 기회를 빌어 써보겠지만, 백제와 신라는 이 무역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입장에 있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는 한강유역과 경주지역에서 흥기하여 이 무역로를 북쪽과 동쪽방향에서 압박하고 있었다고 보는데 이들이 강성해지면 질수록 남은 것은 "한때 성립되어 있던 무역로"의 파편적 세력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81]. 따라서, "백제"는 교역로상의 한반도 측 정점(頂點)으로 기능했던 "진왕"을 누르고 이 지역의 패자로 기능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종전에 존재했던 무역로상의 소국들은 "재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82] 이 움직임이 결국 역사적으로 기술된 부분이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의 진출이라고 보겠다 [83]. 다만, 백제의 경우는 시종일관 이러한 교역로의 숙적으로 존재했던 신라와는 달리 장수왕의 남정으로 웅진천도를 감행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종전에 존재하던 교통로상의 소국과의 연계를 크게 강화하였다고 생각하는데 [84], 이 과정에서 백제와 왜간의 관계는 신라와 왜간의 대립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 바뀌어 갔다고 본다.

IV. 맺음말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는 최근에 발견된 풍납토성이 3세기 이전의 한강유역에서의 강고한 정치체의 성립을 상징한다는 보고가 정설로 굳어질 경우, 삼국지 한전은 사료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주지하는 대로,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당시의 상황이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풍납토성 과 같은 정치체의 존재가능성은 삼국지의 입장에서 볼 때 사료적 신빙성에 있어서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많은 논리적 비약이 전제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삼국지 한전이 전해주는 내용이 풍납토성의 발굴 보고와 일치하는 면을 설정해 볼 수는 없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본 연구는 계획되었다.

결론적으로 간추리자면, 삼국지 한전자체가 편린을 제공해 주고 있었으나 크게 중요시 되지 않던 삼한의 맹주로서의 진왕에 대한 전승을 학계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풍납토성의 발굴과 관련하여 많은 암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장차 발굴이 진행되어야 전모를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풍납토성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사에서 차지하게 될 비중은 그 유물을 정확히 분석해보면, 이 토성의 지배자가 동아시아의 교역로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본 논문에서는 그 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보고와 삼국지 한전을 새롭게 해석해 본 결과,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지역의 문화권은 초기에는 북방으로부터 이동해 온 외래계와 토착계의 결합으로 파생되었지만 그 안에는 마한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백제로 상징되는 세력이 혼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풍납토성이 3세기 이전에 축조가 완료되었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로 굳어질 경우, 존재하는 사료의 적극적 해석을 통하여 삼국지 한전에서 편린으로만 전해지는 한반도 남부를 통제하는 진왕의 존재는 사실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풍납토성은 현재까지의 보고를 보면, 백제국가의 왕성으로서 기능했던 시기도 후대에 이르면 존재했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풍납토성의 주체가 시기를 두고 교체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보며, 이는 진왕으로부터 백제로의 패권의 교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 점, 학계의 적극적 검토를 바라는 것이지만, 최근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진왕의 중심지를 풍납토성으로 설정해 본 이 시도도 잠정적인 추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인하고 싶다. 만약 진왕에 대응될 수 있는 유적이 다른 지역에서 보고 되어질 수 있거나 풍납토성의 발굴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백제와 연관되어 성립되었다는 것이 확실해 질 수 있다면 졸고의 논리는 자연히 폐기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 伯濟國...月支國 ... 凡五十餘國 (삼국지 한전)
2 종래에 삼국지의 진왕을 삼국사기의 마한왕과 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백제왕과 마한왕 사이에 맺어져 있던 주종관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지가 완전히 대립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편년상의 문제일 뿐 삼국사기 역시 삼국지와 마찬가지로 마한왕=진왕의 상위적 존재를 기술하고 있어 양자간에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었다 (윤선태, 2001).
3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후한서 한전). 이 사료에서는 진왕이 목지국을 중심으로 "삼한"을 통할하고 있음을 확실히 기술하고 있어 3세기의 이전의 한반도 남부지역의 상황이 여러 소국들이 분립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맹주를 중심으로 한 일정한 질서가 있는 사회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여러나라의 국왕"이 마한인종이라는 기술은 소국의 정치적 자율성이 상당부분 진왕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후한서의 시각은 삼국지위지에 더 비중을 두는 시각에 의하여 부정되어 졌다. 이에 대한 전말은 박대재 (2002)의 글에 자세하다.
4 이에 대해서는 서기원년을 전후하여 이미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설 (신희권, 2002)과 기존 의 몽촌토성의 왕성으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하고, 풍납토성은 몽촌토성보다 축조연대가 늦은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박순발, 2002).
5 최근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뢰성을 둘러싸고 이희진(1998)강종훈(1999)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은 그 좋은 예이다.
6 삼국지의 민족지적 성격에 대한 의견은 김철준 (1973)박대제 (2002)의 글에 의거하였다. 김철준의 글은 박대재의 글에서 재인용.
7 일부에서는 중도문화의 무기단식 적석총을 고구려의 무기단식 적석총과 연결시켜 이해함으로써 이를 서기원년 전후에 남하한 백제의 세력과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권오영, 1986) 이 역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무기단식 적석총의 경우, 타날문토기가 나오는데, 이 토기가 고구려 초기의 토기와 관련이 없고, 적석총 자체의 구조도 고구려 것과는 틀린다는 점을 들고 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견해이지만, 고구려 초기토기에 대한 양상이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풍납토성의 타날문토기들의 연원이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아직 재고의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8 풍납토성의 카본데이팅 수치는 적지않은 수의 샘플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김태식, 2001). 이에 의하면 집자리에서 나온 연대는 중심연대가 기원전 200-100년에 이르며 토성의 경우는 대체로 서기 100-300년에 이르고 있다. 집자리의 경우가 토성보다 연대가 이른 것은 풍납토성지에 토성이 축조되기 전에도 상당기간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며, 집자리는 삼중환호의 시대와 연결시켜 보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적어도 풍납토성 지역에 정치적인 중심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려 볼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9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계속 발견되는 이러한 방식의 주거지는 휴전선 이북에서도 발견되어 전축분이 분포한 영역의 남단까지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10 이홍종(1999)에 의한 한강유역의 토기변천에 대한 시기구분은 다음과 같다. (가) 중도식 단순기: 송국리식 토기에서 변화하여 한강유역권의 새로운 토기양식으로 정립되며 기원전 3세기 중반-기원전 2세기 전후에 해당한다. (나) 와질토기와의 공반기: 기원전 2세기대. 와질토기의 등장은 철기문화의 파급과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다고 하며 와질토기의 출현을 기원전 2세기대의 고조선의 변천(준왕 남천, 위만조선 멸망)과 관련을 지어 설명하고 있다. (다) 중도계 이동기: 한강유역에서 중도계(풍납동식 무문 토기) 소멸, 일부가 내륙지역및 동해안에 잔존되며 와질토기는 남부지역으로 확산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 (라) 중도계 소멸기: 풍납동식 무문토기 소멸. 와질토기로 일원화 됨. 기원전 1세기 중엽-기원전 1세기 후반.
11 삼중환호는 풍납토성의 가장 이른 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문화재 연구소, 2002).
12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과 대방군 사이에 풍납토성과 같은 정도의 우월한 정치집단의 존재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3 박대재(2002)에 의하면, 충남 공주 봉안리, 전북 장수 남양리, 충남 부여 합송리, 충남 당진 소소리, 논산 원북리 토광묘등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14 박대재(2002)에 의하면 익산 평장리 출토 한경과 공주 공산성 출토 한경은 전한대의 동경으로서 진국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15 박대재(2002)에 의하면, 전북과 충남일대에서 발견된 일련의 후한경들은 모두 공주-부여-익산의 금강 중, 하류권에 한정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 일대가 당시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한다.
16 박대재 (2002)의 이러한 해석은 일본의 야마타이국논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야마타이국 논쟁에서는 중국식 동경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후 야마타이국을 통해 일본 각 지역에 반사되었는데 이러한 동경의 분포를 분석하여 야마타이국의 위치와 권력집중에 대한 단서를 찾고자 하는 연구가 있다.
17 이시기에 이르면 제한된 종류의 철기만을 반출하는 청천강이남지역에 반하여 그 이북지역은 다양한 종류의 철제 농공구류를 비롯한 주조철기가 다량 발견되어 양자간의 철기문화의 양상은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18 정영화(2000)는 서북한 지역에 전국계의 철기가 유입된 후 남부지방으로 철기가 확산된 시점은 기원전 2세기 이전인데 종전에는 경주지역의 철기는 전국계의 영향을 받은 서남부지방의 주조철기의 계보를 잇고, 한의 단조철기 기술을 간접적으로 수용해서 철기를 제작된 것으로 보아 왔지만 그의 분석에 의하면 경주지역의 철기는 모두 전국계를 잇는 연화보-세죽리유형의 초기철기유물 조합상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남지방 철기유입은 반드시 한반도 중서부 지역과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고 있다. 그는 연화보-세죽리유형이 남으로 확산될 때, 중서부지방에서 주로 일부 품목에 한정된 청동기를 대체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영남지방에서는 실용적인 철기로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수용배경이 달랐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이 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철기의 자체생산이 가능했던 기술적 단계에서 가능했다고 보는것인데 경주지역에서 철기의 자체제작 기술을 확보했던 시기에 중국은 철기제작기술이 국가에 의해서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경주지역의 철기문화의 수준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상당한 우위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그의 논문에 의하면 매우 제한적인 철기만을 반출하는 금강유역과는 달리 경주지역은 철기의 종류와 수량 면에 있어 기원 후에 이르면 금강유역보다 우위에 있는 상황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19 삼국지 위지 동이전
20 다만, 박대재 (2002)는 진왕과 마한왕을 분리하여, 진왕은 금강유역을 지배하는 수장인 반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왕은 다른 존재로서 3세기 중엽당시 마한 사회 전체를 통제한 실력자가 있다면 진왕이 아니라 마한왕이라 호칭했을 것이라 하고 있다.
21 기원전 한반도 안의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는 대동강유역과 금강유역 그리고 경상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상고사학회 간 한국상고사 (II)의 세형동검문화의 지역적 특성, 이종선, 1992). 이 세 지역 중 가장 개시가 빠른 것은 금강유역으로서 종전의 통설처럼 대동강유역이 고조선, 금강유역이 준왕의 남천지라는 시각으로 보면 혼선이 생기게 된다.
22 岡內三眞은 이청규 (1997)에서 재인용
23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화분형토기와 원저단경호를 주로한 양식이 이미 목곽묘단계에 성립되어 (국립중앙박물관, 2001) 준왕의 원거지가 대동강유역일 경우에는 이와 유사한 양식의 토기가 한강유역에서 나 와야 하지만 현재까지 한강유역의 외래계 토기에서 대동강지역의 직접적 영향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24 연화보-세죽리 문화가 구들 시설을 갖춘 지상가옥, 회색의 태토에 승석문을 타날한 타날문 토기, 명도전, 중국계 주조기술을 기반한 발달된 전면적 철기문화 및 청동기문화의 소멸(최몽룡, 1997) 이라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한강유역의 문화 역시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토기, 구들시설, 청동기문화의 소멸이라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는 양상을 고려하면 양자간의 연관성은 계속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25 이렇게 본다면, 마한은 종래의 생각과 같이 금강을 중심으로 한 세형동검문화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된 철기문화지역를 기반으로 한반도 전역에 그 영향권을 미치는 세력으로 재조정 할 수 있다. 마한은 종래의 생각처럼 "토착인의 성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유이민에 의한 철기문화의 대대적 보급에 기원을 둔, 유이민 집단과 토착인의 연합에 의한 새로운 정치세 력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6 실제로 마한을 전통적인 인식처럼 충청도 일대에 비정하지 않고, 경기도 일대에 비정한 별개의 전승도 존재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7 이 토성은 후대에 가면 백제의 도성으로서도 기능했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생각되는데 삼국지의 진왕 =백제왕이라는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강유역의 문화의 소유자에 대한 좀더 치밀한 분석이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8 이 문화는 "청동기와는 결별한 완전한 철기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화의 형성에 기여한 "외래문화"에는 단지 하나의 계통=이주민집단 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천강 이북의 여러 집단들이 청동기시대까지는 단지 일종의 "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으로 연속적으로 남하하여 온 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29 금강과 영산강 유역은 3세기에 이르면 다른 지역보다 철기문화의 도입과 유행이 앞서있었던 지역이 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한강유역에 동시기에 풍납토성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삼국지 "진왕"의 목지국을 현재의 통설대로 금강유역으로 보게되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삼국지 한전이 기술한 시대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0 辰王治月支國 (삼국지 한전)
31 현재 목지국의 이름에 대해서는 3가지의 다른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다. 즉, 목지국 (目支國, 한원주 위략, 후한서, 통전), 월지국 (月支國, 삼국지) 그리고 자지국 (自支國, 한원주 위지) 이다. 이 세 가지의 이름은 나란히 쓰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나머지 두 가지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 이 일반적이다.
32 박대재 (2002)는 현재 학계에는 삼국지의 월지국설을 따르는 연구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한서의 목지국설을 따른다고 하였다.
33 위례성과 인접한 강 이름이 욱리하 라고 삼국사기에는 나와 있는데 이를 현대 중국 음으로 읽으면 위리 (yuli)이다. 한자로는 위례와 상당히 다르지만 현대 중국 음으로 읽을 경우, 욱리하의 욱리 (yuli, 위리) 와 위례(weili, 웨이리)는 거의 비슷한 발음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지국의 "월지"의 경우에는 "지"를 수장에 대한 전통적인 칭호로 볼 경우 "월"은 위어(yue)로 발음되어 상당히 유사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4 필자는 풍납토성이 초기에는 "진왕"의 치소 였지만 , 이 후 어느 시기엔가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백제 역시 후대에는 수도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위례"라는 이름은 백제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어졌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역시 충분한 근거는 미흡하다.
35 侯準僭號稱王 爲燕亡人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36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37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4년조
38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5년조, 馬韓將孟召 以覆巖城降
39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4년조
40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41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42 靺鞨入牛谷界 奪掠人物
43 온조왕 2년, 靺鞨連我北境
44 온조왕 3년, 靺鞨侵北境; 진사왕 7년, 靺鞨攻陷北鄙 赤峴城
45 동성왕 4년, 靺鞨襲破 漢山城
46 온조왕 26년,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47 김병남(2002)은 원산성을 충남 금산 진산면의 동쪽 30리에 있었던 猿山鄕으로 보는 견해를 따르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초고왕 25년조)이라 하여 원산향은 신라의 영토내에 속한 성으로 기술하고 있어 원산향과 원산성은 구분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48 성왕 26년조에,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이라 하여 독산성이 한강의 북쪽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2년뒤인 28년조에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이라 하여,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음을 쓰고 있어서 금현성이 당시의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공방을 벌이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일한 사건을 신라본기에서는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 城增築 이라 하였는데 진흥왕대에 한번의 출격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성 2개를 모두 탈취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 금현은 도살성과 함께 한강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듯 하다.
49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삼국지 한전)
50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萬餘戶 (삼국지 한전)
51 한서 지리지
52 삼국지 위지 왜인전
53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이 상이한 부분이 있으며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된 바 있다. 그러나 본 고에서는 삼국지나 후한서 양자 모두 한반도 남부에서의 "진왕"이라는 존재를 기술하고 있으며 그의 역할에 대한 인식 역시 거의 비슷했다고 보고 삼국지를 주로, 후한서를 보조적으로 인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 고는 "진왕"을 "한 전체를 통치하는 총왕" 으로서 파악하는 1950년대까지의 통설 (이에 대한 정리는 박대재(2002)에 자세하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박대재(2002)에 의하면 이러한 통설은 그 후 삼국지 동이전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됨 으로써 비판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비판이 따르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한국고대의 정치발전단계상 그와 같은 광역의 왕이 삼한시기에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대세론이 공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한강유역에서 삼국지의 시대에 강력한 정치적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이상 "삼한총왕설"은 원점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본다.
54 이 정도로의 영향력은 실제로 세형동검문화인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선점권"만으로는 생겨날 수 없 다고 본다. 그 보다는 실제의 "생산력과 무력"이 우위에 있는 집단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금강유역의 3세기의 상황으로는 이러한 영향력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55 삼국지 한전에는 其官有魏率善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伯長 이라 하여, 마한의 관직명을 기술하고 있다. 명칭 상으로 보면, 중국이 주변의 만이군장에게 하사한 관직명으로 보이며 실제로 그런 의도에서 사여 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관직명이 군현의 관직명이라는 점이 "한" 세계의 내부질서의 부재와 중국의 통치의 강고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실제로 이 문장은 辰王治月支國 이라는 구절의 바로 뒤에 나오고 있어서 진왕과 관련을 의식하고 삽입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위에 의해서 수여된 만이 군장에 대한 관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이들 관직은 진왕의 하위에 존재하고, 진왕의 통제를 받는 관직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싶다. 같은 시기 왜인전을 보면 今以難升米爲率善中郞將 牛利爲率善校尉 假銀印綬 引見勞賜遣還 라 하여 히미코가 보낸 사신에게 역시 유사한 명칭의 관직을 하사해서 보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강제할만한 위력을 갖지 못 했던 군현과 한 사회사이의 타협의 결과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56 윤선태(2001)는 최근의 논문에서 삼국지 한전의 "가우호"이하의 신지는 다른 소국들과는 차별되는 삼한의 대국들로서 진왕은 이들에 대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해로 및 육로 교역망을 장악하였다고 하였다.
57 이 문장은 "마한"과 "군현"의 경계에 어떤 정치적 세력의 존재도 시사해 주고 있지 않은데, 마한이 대방과 직접 접계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58 이 구절 중 산해간 이라는 말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서 전통적으로 마한이라고 보아왔던 금강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곳에 성곽이 없다고 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현재 고고학적으로 부정이 시도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체로 한반도 서남지역이 성곽이 다른 지역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59 여기에는 마한지역에서 "성곽"과 "관청"을 짓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종래 이것을 (11) 사료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을 들어 삼국지 한전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것은 마한 사회 내의 북쪽과 남쪽지역의 차이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즉, 남쪽지역은 성곽이 많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북쪽지역은 성곽이 축조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보고 싶다. 이 사료 내에 존재하는 구절 중 "젊은이가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라는 부분은 일부 학자에 의해 "지게 진 모습"으로 해석되어 왔 었는데(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이 구절에서 "풍납토성"과 같은 대규모 토성을 판축하는 상황을 떠 올려 볼 수도 있다.
60 삼국지 위지 동이전. 월지국과 함께 표기된 굵은 글씨의 국가는 같은 삼국지에 나오는, 신지 명칭에 가우호 된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이다. 앞에 있는 숫자는 일련번호.
61 이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도 건마국이 전북 익산에 비정 되는데 반해 끝에서 두 번 째에 나온다는 부분이 그것이다(박대재, 2002).
62 武田幸男, 1996. 박대재(2002)에서 재인용.
63 가장 마지막에 기술된 건마국과 가장 처음에 기술된 有爰襄國이 각각 마한의 남계와 북계에 해당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북쪽끝에 위치했다는 有爰襄國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백제국 (伯濟國)과 월지국은 전체 마한을 구성하는 국가들 중 상당히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두 국가는 상당히 지근거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3세기 대방군의 남방한계를 위-진대의 전축분으로 상징되는 세력이 미치는 남방한계를 마한의 북쪽 경계가 시작된다고 가정 해본다면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우리의 생각보다 마한의 북쪽 경계는 상당히 북쪽까지 올라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월지국은 대체로 한강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만약 한강유역이 기원 전후하여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공통성을 가진 영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최근의 보고를 신뢰한다면, 한강유역, 남한강, 북한강을 포함하는 이 문화권에는 매우 복잡한 출자의 외래 이주민들이 정착했다고 보지만 백제건국세력뿐만 아니라 준왕으로 대표되는 세력도 동일지역에 정착했다고 생각하고, 이들은 토착세력과도 경합하면서 한강유역의 철기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64 윤선태(2001)에 의하면, 특히 서진대의 중국유물이 나온 홍성의 신금성은 진왕권력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바라고 하였다.
65 이에 대하여 천관우, 전영래, 김태식, 이도학, 김영심등은 5개의 읍명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이병도, 이기동, 노중국등은 4개의 읍명이 옳다는 입장에 있다.
66 위 세 개의 소국은 이름이 매우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데서 이와 같이 추정하였다. 일본서기의 비리와 벽중의 경우도 마한전의 벽비리국과 어떤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67 종전과 같이 금강유역에 월지국을 비정할 경우, 지반국등과 월지국사이의 소국의 숫자가 너무 많아 통설대로 지반국등을 전북지역에 비정할 경우, 금강유역은 이로부터 너무 근접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다만, 천안을 비롯한 충남 북부지역의 경우는 아직 월지국의 비정지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불식하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한편, 만약 삼국지 한전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소국명을 기재한 것이라는 통설이 옳다면 건마국=금마면이라는 종전의 통설은 재고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건마국은 54번째에 존재하므로 전남 해안지역에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68 진변한의 12국이 진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고 하므로 마한의 영역을 함께 포함하면 진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수는 마한을 포함 한반도 남부지역 총 80만명 정도가 진왕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셈이다. 이는 삼국지위지동이전 문맥대로만 해석한다 해도 진왕의 영향력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69 이러한 추론은 천관우 (1991)에 의거하였다고 하였다.
70 곽장근 (1999)에서 재인용
71 특히 이 지역은 종래 백제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그 세력집단이 백제가 아닌 가야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72 이에 관해서 윤선태는 기리영전투당시 신분고국은 인근의 다른 6국보다 상위의 권력자로서 이들을 일정하게 통제, 지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시사하였는데 이는 3세기 전반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는 신지격한(臣智激韓)이 송본(宋本)에는 신책첨한으로 기재된 것에 주목하여 이를 인명이 아니라 국명으로 파악하고 신분활국의 이칭 신분첨국과 동일시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의 기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왕이 빈틈을 타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변민을 취습하였다...왕이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 하여 돌려주었다)를 기리영전투와 연계시켜 해석하여 당시 백제가 신분고국과 함께 군현과 항쟁하는 상황이었다고 하였다. 비록 세세한 논지는 본고와 같지 않지만, 필자는 이러한 신분고국의 입지는 다른 "가우호"된 소국들, 즉 신운신국, 안야, 구야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이들은 주변의 소국을 통할하고, 진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무역로의 유지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73 이 때문에 윤선태 (2001)는 신분고국을 진왕의 하위에 있는 존재로 간주했었지만, 백제를 압박하는 "말갈"과 같은 존재로까지 파악하였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지만, 신분고국과 백제는 공히 한강북부지역에 존재하였으며 상당한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74 진왕과 한반도 남부의 교통로의 유지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이미 윤선태 (2001)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75 한국의 괴정동 유형은 한반도내에서는 가장 빠른 세형동검유적인데, 그 선행형은 요동의 정가와자 유형에 있다 (신용민, 2000). 아직 한국청동기문화의 전모가 확인되지 않아 이 유형의 문화 역시 육로를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정가와자 유형에서 괴정동 유형 사이에 중 간단계의 유형에 대한 보고가 없어 요동지역으로부터 해양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겠다. 최근에는 산동반도에 분포하는 지석묘는 북방식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많이 분포하는 남방식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는데 이 역시 육로를 통한 전파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청동기문화의 어느 시기에 해로를 통한 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파되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76 죠몽시기에도 한반도 남부와의 문화적 교류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로 바닷길을 통한 교류가 잘 정비되어 있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야요이시기의 문화적 전개는 한반도남부 에서 발달한 청동기문화의 제요소가 시간적인 선후관계에 따라 정연하게 전파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청동기후기의 해양교통로가 일회적이고 단속적인 수준을 넘어서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77 야요이문화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하지만, 이 문화의 성립에 미친 죠몽인의 영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의 성립과 발전에 한반도 남부지역의 청동기문화, 특히 송국리유형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78 일본 야요이 문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현재까지의 조사보고를 토대로 할 때, 죠몽인의 문화적 인종적 기여를 인정할 수 있지만, 야요이 문화 자체가 한국청동기문화의 한 유형인 송국리유형을 기반으로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야요이 문화가 개시된 이래 한반도에서 일본 쪽으로 흘러가던 문화적, 인종적 흐름이 서기원년을 넘어서면 (야요이 후기) 서일본 각지에서 일본고유의 문화로 발전하는데 이 시기에 이르면, 이제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일방적 이주, 전파였던 양상이 역류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 발견되어 보고 된 남해안 일대의 왜계 하지키 (土師器) 의 경우 이러한 교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79 최근 서해안지역에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의 경우, 이러한 교류의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방형주구묘는 일본열도에서 야요이시기의 주요한 매장방식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이와의 직접적 관련여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의 방형주구묘가 서해안 일대에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보고 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주구묘의 경우, 현재 매장주체부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 발굴자들은 이 묘의 경우 매장주체부가 분구 위에 조성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토기 등의 부장품의 출토가 많지 않아 완전한 해명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방형주구묘가 일본 야요이시기의 것과 연결된 것임이 밝혀질 경우 그 기원 문제를 포함한 논쟁이 심화될 것으로 본다.
80 이들은 다른 풍속상의 기술 없이 보전에 능하고 병장기가 마한과 동일하다는 점만을 기술한 점으로 볼 때 단순한 생산직에 종사한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기술 자체가 변진한이라는 한반도내의 큰 정치체의 틀 안에서 설명되고 있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81 이 파편적 세력들의 문화적 동질감, 연대감이 결국, 영산강 유역, 가야지역, 왜 사이의 연대감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무역로가 각개격파, 끊기면서 생존에 어려움을 겪게 된 집단들의 연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본다면, 왜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연계는 종전 일부의 주장처럼 왜의 진출이 매개가 된 것이 아니라 진왕대에 이미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결과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한강유역--금강유역--가야지역--왜의 연결은 한반도측의 진왕과 일본열도의 왜왕을 정점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 중 한강유역의 진왕이 백제에 의해 타도되고 신라에 의해서 가야가 압박되면서 이러한 교통로는 붕괴의 위기에 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진왕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한반도 남부에 남아있던 교통로상의 소국들에 대한 "후원역"을 자임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82 일본서기에 보이는 근초고왕과 왜와의 사이의 교류는 근초고왕이 종전의 교역로를 통해서 왜와의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료에는 백제와 왜는 접촉이전에는 서로에 대해 크게 잘 알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백제가 당초 이 교역로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83 근초고왕의 남정시, 왜가 함께 참여한 이유는 백제보다도 왜가 이 교통로의 이해관계에 더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던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왜가 백제에게 "임나의 땅을 할양" 하는 기록등은 왜의 정치적 영향력이 한반도 남부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점이 아니라, 당초에 진 왕이 지배하였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교통로의 통할권을 백제가 인수하려함에 이르러 왜가 이에 적극 동조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본다.
84 백제의 남천시 큰 공을 세운 목만치 등은 후대에 가야지역과의 밀접한 연관이 간취되는데, 이는 금강유역에서 가야지역으로 이어지는 진왕대의 교통로의 잔존의 결과라고 볼수 있겠다. 즉, 웅진남천이전의 백제에게 압박당하던 금강--가야지역의 소국 잔존세력들은 진왕의 멸망 이후에도 왜와의 교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백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됨에 이르러 백제의 부흥에 종전의 교역로상의 제 소국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와 같은 기록이 남게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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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최성락, 2001, 「마한론의 실체와 문제점」『박물관연보』9 목포대박물관.
그림 1. 풍납토성을 마한의 중심지로 가정했을 경우의 개략적인 그림
마한은 복잡한 성격의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으리라 생각하는데, 현재까지의 발굴보고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추정해 보자면 한강유역에 최근 공통적인 문화의 존재가 보고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중도문화권은 풍납토성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진왕의 소재지인 풍납토성 (별표)이 그 중심지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종래 마한의 중심지가 소재 했으리라 생각했던 금강유역문화는 본고에서는 마한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중심지의 역할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최근 천안을 중심으로 보고되고 있는 철기문화의 양상을 볼 때 충남 북부지역의 경우는 아직 마한의 중심지의 후보지 에서 제외하기는 이르다고 본다. 어둡게 칠해져 있는 부분 타원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나온 5개 읍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 의 소재지로 현재의 학자들의 상당수는 이 5개 읍이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동일하거나 유사한 명칭의 국명이 마한전에 출현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순서를 기준으로 계산할 때, 마한의 남단까지는 16개국이 더 존재하고, 월지국까지는 20개국이 사이에 있는데 거리 상으로 보아 금강유역에 월지국을 비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천안지역의 경우는 거리 상으로 볼 때 마한의 중심지로의 비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외에 영산강유역과 변진계 유역도 삼국지 한전의 기록을 참조하면, 진왕의 판도 하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지 한전의 "가우호"된 신지는 진왕과 다른 소국사이에 존재하는 우세한 신지 들이었을 것으로 보는데, 한전에는 4개의 국가의 명칭이 적혀 있다. A의 경우는 신분고국으로서 풍납토성보다 북쪽에 있으며, 백제와 함께 한강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월지국에서 마한의 북쪽 경계까지는 13개국밖에 없어, 한강북쪽의 경기북부일대에 마한에 속한 소국의 존재를 인정하자면, 금강유역에 월지국을 비정하기는 매우 어렵고, 풍납토성과 천안지역만이 그 대상에 들어갈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우호된 신지는 변진의 안야국 (C) 과 구야국 (D) 에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한반도내의 교통로의 요점을 장악하고 진왕과 함께 마한의 우세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B는 신운신국으로 거리 상으로 볼 때, 전남지역으로 생각되며 후대의 영산강유역의 세력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지를 검토하면, 월지국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13개국이, 남쪽에는 41개국이 있어 월지국이 전체 마한의 판도에서 본다면 상당히 북쪽에 치우친 형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