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母系血統體制) 연구(硏究)

A Study on the Ancient Matrilineal Descent System Revealed in the Manuscript Version of Hwarangsegi(花郞世紀)

김동찬 (Kim, Dong Chan)

요약

일제시대 南堂 朴昌和(1889-1962)에 의해 筆寫되었다고 알려진 『화랑세기』는 아직도 眞僞問題로 論爭중이다. 필자는 진위문제 檢證의 일환으로 이 자료를 살펴보던 중, 母系血統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以前부터 국사학계 일부에서 신라 왕실의 母系에 대한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계혈통문제는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문제 판단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며, 아울러 신라사의 여러 의문을 해명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인의 혈통관념이나 신분제, 왕위계승체제 등의 문제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기존 자료에서 어렴풋이 나타나던 모계체제는 『화랑세기』에서 구체적인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두 갈래의 모계혈통이 신라지배층 내부를 二元化하고 대립과 경쟁, 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점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이 兩大 母系集團이 하나의 체제를 형성하고 신라라는 국가를 영위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新羅史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과 결부해 보았다. 특히 三姓交立 등 姓氏問題, 部體制, 骨品制, 近親婚, 葛文王, 女王登極 등이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체제와 관련있다고 판단했다. 신라의 모계문제는 단순한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하나의 체제, 즉 二部體制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삼국유사』등 문헌자료 및 金石文자료와 대조,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 신라인이 혈통을 계승하는 주체는 母系이다.
  2. 母系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3. 두 母系集團이 "二部體制"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4. 『화랑세기』의 大元神統은 6세기대 金石文의 喙部이며 후에 朴氏姓으로 바뀐다.
  5. 眞骨正統은 沙喙部이며 姓氏 사용기에는 金氏로 불리게 된다.
  6.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母系로 전해진 金氏, 朴氏 姓이 있다.
  7. 두 母系集團의 최상층부가 交代로 王과 葛文王을 계승해 간다.
  8. 葛文王은 두 모계집단 중 왕을 배출하지 않은 집단에서 맡으며 왕위계승체제의 한 축이다.
  9. 두 母系集團의 여성 중 최고 수뇌인 宗이라는 여인이 왕과 갈문왕을 낳는다.
  10. 宗이라는 신분의 여인에게서 聖骨身分이 배출되며 眞骨身分도 모계로 전승된다.
  11. 中古期 末의 두 여왕도 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12. 모계체제는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 가문이 진골 신분에 편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3. 兩大 모계집단의 결합은 원시사회의 한 형태인 母系 半族社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제어

모계체제, 모계혈통체제, 신라, 화랑세기

목차

  I.   머리말
  II.  花郞世紀에 나타난 母系血統體制
  III. 大元神統과 眞骨正統, 喙部와 沙喙部
  IV.  聖骨과 眞骨
  V.   母系血統에 의한 王位繼承
  VI.  姓氏와 母系血統體制
  VII. VII. 金庾信家의 진골귀족 편입
  VIII.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그 동안 많은 신라사 연구자들은 신라인들이 母系血統을 중시했다거나, 母系社會의 遺習이 남아 있다고 말해 왔다. 더 나아가 왕위계승에도 모계혈통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1]. 그러나 모계혈통을 어떤 형태, 어떤 비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구체적인 실태는 기존자료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연구도 진전이 없었다. 골품제나 왕위계승에 있어 모계혈통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추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화랑세기』(이하 筆寫本『花郞世紀』를 『화랑세기』라 한다.)에는 그 구체적인 운용실태가 드러나고 있다. 母系로 身分이 결정되고 지배층 전체가 兩大 母系集團으로 二元化되어 있으며 왕위계승도 兩大血統이 交代하였다는 정황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신라사회가 어느 시점까지 母系로 혈통을 구분하고 계승해 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모계혈통체제를 감안하고 신라사를 보면 그동안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문제들이 해소될 여지가 보인다. 즉 朴, 昔, 金 3姓의 交立에 의한 복잡한 왕위계승문제, 骨品制의 실체, 近親婚問題, 女王의 登極, 金庾信家의 眞骨貴族 편입등이 해명될 수 있으며 아울러 금석문자료에 보이는 喙部와 沙喙部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다. 또 考古學上의 의문으로 남아 있는, 황남대총 여성의 묘에서 금관이 나온 점, 쌍둥이고분(瓢形墳)등의 의문도 해소될 여지가 있다.

필자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眞僞問題가 밝혀지지 않은 『화랑세기』를 어떻게 근거자료로 사용하고 파격적인 주장을 하느냐는 반박이 예상되지만, 이 문제는 眞僞問題와도 직결된다고 본다. 『화랑세기』가 20세기에 생존했던 한 인물에 의해 僞作됐다면 여러 의문을 한꺼번에 해명하는 열쇠를 이토록 정교하게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저자 자신도 모계체제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시의 實相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계혈통문제는 50년대 前後 일부 연구자가 제기한 문제였지 [2],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기존 역사자료에서는 선명하게 도출되지 않았기에 기존 자료를 참고해 이러한 내용을 僞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실태에 주목하여 화랑세기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提起하려 한다. 먼저 『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의 실태를 지적하고 해명되지 않은 여러 쟁점에 대해 모계혈통이라는 체제와 결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II. 花郞世紀에 나타난 母系血統體制

『화랑세기』에는 신라지배층 [3] 의 모든 남녀들이 모계혈통으로 신분을 구분했음을 나타내고 있지만 父系를 무시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랑세기』는 대부분 풍월주들의 世系가 부계 위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모계혈통체제라고 보는 것은 중요한 身分의 결정에 있어서, 모계가 절대적인 기준이었다는 정황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고, 모계혈통으로 派閥이 갈려졌으며 왕위계승도 모계가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누구이든 그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영향은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모계혈통은 신라 固有文化의 原形이고 부계혈통은 그들이 외부사회와 접촉하면서 조금씩 導入해가는 外來的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 자체에서도 후반으로 갈수록 父系에 대한 比重이 점차 높아지는 것이 보인다.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모계혈통은 『화랑세기』가 眞本으로 확인되지 못할 경우, 근거 자료가 될 수 없지만, 일단 화랑세기에 모계혈통체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화랑세기』를 眞本으로 가정하고 연구하는 사람 중에도 모계혈통체제를 대체로 否定하기 때문이다 [4].

1. 모계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었다.

『화랑세기』 [5] 전체에서 모계혈통으로 身分이 결정되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부계혈통도 중요시했고 따지긴 했지만 신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2세 未珍夫」 [6] (53쪽) 法興王의 아들이라는 比臺라는 인물이 있었는데도 외손자인 眞興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도 법흥왕의 아들이 없었다는 내용은 없으나 통상 법흥왕의 아들이 없어 외손자이며 조카인 진흥이 계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화랑세기』는 법흥왕의 아들이 있었고, 법흥왕 자신도 아들에게 왕위를 상속케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신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인 眞興이 계승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법흥왕의 딸 只召夫人이다. 이 때 지소는 법흥왕의 아우 立宗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은 상태다. 시집간 딸이 자신의 아들을 아버지의 후계로 계승시키고, 그것도 아버지의 친아들을 제치고 있다. 이 과정에 어떤 政變도 없었고 왕위에서 밀려난 비대는 아무런 장애없이 일생을 마쳤으며 高位官職도 거치고 있다. 이것은 왕위계승에 있어서 왕의 권위로도 어찌할 수 없는 독특한 繼承體制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왕의 아들이란 부계혈통을 가진 비대보다, 지소부인(법흥왕의 딸)의 아들이란, 모계혈통을 가진 진흥이 왕위계승에 있어서 優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혈통을 모계로 구분하고 모계혈통이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7세 薛花郞(薛原)」(84-92쪽) 「8세 文努」(94-104쪽) 모계혈통이 부계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는 점은 여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설원은 어머니(금진)의 신분이 높고 아버지(설성)의 신분이 미천한데 비해 문노는 반대로 아버지가 比助夫 [7] 라는 고위인사였지만 어머니는 가야국의 공주였다고 한다 [8]. 설원랑은 신분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 반해 문노는 신분문제로 갖가지 장애에 부닥치고 있다. 결국 문노는 골품을 가진 允宮이란 여인과 혼인하고 여러 차례 戰功을 세우고, 또한 진지왕을 몰아내는데 일조하고서야 신분문제를 해결한다 [9].
③「1세 魏花郞」(48쪽)에서 摩腹七星을 소개하는 기사중 異說로 魏花郞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마복칠성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모계혈통이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기준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④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호한 경우에도 신분상 하등의 장애가 없다 [10]. 「14세 虎林公」 (151쪽)은 "아버지가 福勝公"이라 했으나 "아버지를 알수 없다"고도 했고 "혹은 秘寶郞이라고도 한다'하여 세가지 說을 적고 있다. 최고 신분인 화랑 풍월주가 되는데 아버지가 누구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骨品은 母系血統의 높고 낮음이다.

『삼국사기』등 기존자료에서 접하는 骨品이 바로 모계혈통임을 화랑세기는 나타내고 있다. 모계혈통을 말할 때는 골품이란 용어를 쓰지만 부계혈통에 대해서는 골품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골품이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모계혈통의 品階를 나타내고 있음이 화랑세기 에서 확인된다.

①「1세 魏花郞」(51쪽) "公諫之曰 臣女無骨品.....공이 諫하여 말하길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라고 했는데 법흥왕이 자신의 아들이며 위화랑의 외손자인 比臺에게 왕위를 승계하려 하는데 위화랑은 반대하는 이유로 비대의 母이며 자신의 딸인 玉珍이 無骨品이라 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11]. 어쨌든 왕의 아들임에도 어머니의 혈통이 낮아 문제가 된다는 뜻을 표현하는데 골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②「20세 禮元公」(181쪽) 遊花 3인을 데리고 당나라에 가며 宗室의 여자라고 속이게 한다고 했을 때 예원공은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道가 아닌데 하물며 骨品을 속이는가"라고 따졌다는 대목. 역시 여성혈통의 높고 낮음에 대해 골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③「15세 庾信公」(156쪽) "가야국 감지왕의 다섯형제가 우리나라의 골품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위와 마찬가지다.
④「7세 薛花郞」(86쪽) "골품이 있는 자는 설원랑을 따르고, 草澤의 사람들은 문노를 많이 따랐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왜 설원랑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문노를 따랐을까? 설원랑은 모계혈통이 높아 골품이 높고,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계로 골품이 없기 때문이다. 모계혈통이 바로 골품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여성의 혈통이나 모계혈통을 지칭하면서 골품이란 용어를 빈번하게 쓰고 있으나 부계혈통을 지칭함에 있어 골품이란 용어를 사용한 경우는 단 一例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신분으로서의 골품외에 制度(骨品制)로서의 골품을 의미하는 용어도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하 제도를 의미하는 골품의 사례를 본다.

①「8세 文奴」(101쪽)"공이 진지왕을 廢立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官位가 阿 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 이종욱은 이 구절을 들어 골품은 流動的이며, 한 사람의 일생중에도 변할 수 있는 신분제라 하였다 [12]. 그러나 앞서 거론한 예문들을 봐도 골품은 혈통과 직결되어 태어나는 순간, 골품이 결정됨을 알 수 있고 문노는 高位身分 [13] 의 아버지를 두었으면서도 골품이 없었고, 신분문제로 갖가지 장애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노가 阿 에 이르러 골품을 얻었다는 것은 阿 바로 위 大阿 부터 眞骨신분이 아니면 오를 수 없다고 한 『삼국사기』「職官」조의 기사를 볼 필요가 있 다 [14]. 아찬보다 위로 진급할려면 진골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진지왕을 몰아낸 政變의 일등공신을 골품이 낮다는 이유로 무한정 배제할 수도 없다. 그래서 특별히 예외를 허용한 경우로 봐야 한다. 이 경우를 들어 일반적인 골품의 유동성으로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②「12세 菩利公」(140쪽) "그 때 황후의 지위로 二花公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을 草芥처럼 내버리고....." 淑明公主가 二花郞과 눈이 맞아 出宮한 상황을 골품을 버렸다고 했는데 이 대목도 이종욱 교수는 골품의 流動性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뒤에 骨品항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出宮이란 행위를 골품을 잃는 것과 직결시키는 것은 무리다. 이 경우의 출궁은 왕위와 관련있는 최고혈통(聖骨)을 낳을 수 있는 宗의 지위를 버렸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식에게 성골신분을 계승할 수 있는 지위를 버렸다고 봐야지, 자신의 출궁이란 행위가 바로 신분하락으로 이어진다고 볼수는 없다. 出宮하면 신분을 잃는다면 入宮하면 신분이 회복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런 신분제도는 상상할 수 없다. 이종욱이 예를 든 대목은 골품제라는 제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用例임을 알 수 있다.

3. 모계혈통에 두 계통이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남녀들은 모계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고 있는데 모계혈통에는 두 계통이 있으니 바로 大元神通과 眞骨正統이다. 이종욱 교수는 이 두 갈래의 모계혈통을 왕비를 배출하는 母系의 두 계통이라고만 의미를 局限시키고 있는데 이 문제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다. 이 두 갈래의 모계혈통은 왕비를 배출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지배층 내부를 二元化하고 때로 相互 對立과 葛藤의 요소가 되고 있음을 화랑세기는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왕실이나 화랑도 조직내에서 항시 팽팽한 대립 또는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색은 이 兩大 모계혈통간에 혼인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 다. 특히 왕실의 혼인은 대체로 이 양대 혈통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어머니의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派가 갈려 대립한다는건 단순한 모계혈통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古代人이 대체로 혈통을 기준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신분이 결정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부계혈통 위주인 姓氏제도와 반대로, 모계로 혈통을 파악하였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모계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현대의 개념으로 姓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종욱 교수는 "남자는 一代에 한해 어머니의 계통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현재 여성이 아버지의 姓을 자신만 계승하고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 兩大 모계혈통의 기준점, 宗

「11세 夏宗」(128쪽) 眞骨(正統)은 只召를 宗으로 삼았고 大元神統은 思道를 宗으로 삼았다.

『화랑세기』에서 혈통의 기준이 모계라고 볼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이 宗이란 존재이다. 宗이 어떤 뜻을 지녔는지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그 역할로 보아 宗家나 宗孫을 일컫는 宗과 같은 의미로 보이므로 맏이로 내려가는 혈통의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양대 혈통집단에 있어서 혈통의 기준이 여성에게 있었다는 것은 모계로 혈통을 따졌다는 근거의 하나가 된다. 당시의 사람들이 혈통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이 宗으로 불린 살아 있는 여성이 었으니, 宗과의 관계가 멀고 가까움에 따라 王家와의 혈연이 멀고 가까움으로 나타났고, 또 각자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宗은 단순히 혈통의 기준인 宗孫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왕의 어머니나 왕비가 되었고 때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화랑세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혈통과 신분의 모든 척도는 이 宗이란 여인에게서 비롯된다고 본다 [15].

(2) 昔氏와 金氏를 貫通하는 眞骨正統 系譜

『화랑세기』에는 대원신통의 계보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지만 直骨正統의 女人系譜가 고스란히 전해져 주목을 끌고 있다. 단 한 차례의 단절도 없이 直系로 내려오는 왕실 여인들의 系譜이다.

眞骨正統 系譜 : 雲帽-玉帽-紅帽-阿爾兮-光明-內留-阿老-鳥生-善兮-保道-只召

이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에서 이 인물들을 찾아 본다. 玉帽는 11대 조분왕의 母, 阿爾兮는 10대 내해왕의 왕비이며 15대 기림왕의 母 [16], 光明은 13대 미추왕의 왕비, 阿老는 19대 눌지왕비이며 [17] 20대 자비왕의 母, 鳥生은 눌지왕의 딸이며 지증왕母로 각기 나타난다. 또 保道는 법흥왕비이며 只召는 진흥왕母이다. 이 계보의 인물들이 왕비나 王母가 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지만, 왕비를 배출하는 혈통이란 건 잘못된 분석이다. 왕비가 되지 못했으면서도 왕모가 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玉帽, 鳥生, 只召는 왕비가 아니면서 王母가 되었다. 왕비를 배출하는 혈통이 아니라 왕을 배출하는 혈통이라고 봐야 한다. 왕비가 된 것은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함인 것이다 [18]. 이 계보의 여인들과 부부의 연을 맺거나 혈연관계가 없는 왕들이 있다. 그 왕들은 대원신통의 여인들과 같은 형태의 혈연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진골정통 계보가 왕들의 姓이 昔씨-金씨-昔씨-金씨로 바뀜과 관계없이 직계로 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은 왕위가 부계위주가 아니라 모계위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단서이다.

『화랑세기』에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계보를 파악하면서 아쉬운 점은 대원신통 계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며, 또 이미 밝혀진 대원신통계보에도 모순이 있다는 점이 다. 대원신통의 祖는 눌지왕대 인물로 추정되는 보(갓머리+玉)美 [19]이고 이 계통이 지증왕비, 연제부인과 진흥왕비 사도부인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도부인의 계보에서 역추적하면 思道-玉珍-吾道 이렇게 나아가는데, 엉뚱하게도 오도의 어머니는 善兮夫人이라고 한다. 선혜부인은 진골정통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저자의 오류이거나 필사과정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한다. 「11세 夏宗」(122쪽) 에는 대원신통 계보의 한 사람인 미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있다.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碧花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아..." 미실의 母가 오도이며 오도의 母는 옥진이다. 미실의 면모에 이 혈통의 장점이 있다는 내용인데 벽화는 혈통과 관련없다면 왜 벽화를 들먹이겠는가. 벽화는 선혜부인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오도의 母가 선혜가 아니라 벽화가 아닌가하는 심증이 강하다.

『화랑세기』에는 위에서 거론한 대로 모계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는 점, 골품은 모계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의미한다는 점, 모계에 두갈래가 있어 지배층 사회 전체가 兩分되어 있는 점, 모계의 직계가 왕의 부계혈통(姓) 교체와 관계없이 직계로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제 이러한 모계체제의 특징이 신라사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기존자료 를 통해 분석해 보겠다.

III. 大元神統과 眞骨正統, 喙部와 沙喙部

삼국시대의 部는 어떤 위상을 가졌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연구자들간에 정리된 견해가 없다고 본다. 고구려의 경우 초기의 部는 半國家的인 형태를 띤 국가 내의 조직으로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신라도 초기에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존재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中古期에 해당하는 6-7세기까지도 部가 이런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존재했을까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本稿에서는 중고기 신라의 部가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部가 어떤 근거로 편제되거나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하나의 단초를 제기하려 한다. 근래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리비가 발견되고 6세기대 금석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으로써 部의 실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금석문에서 왕과 갈문왕이 소속된 喙部와 沙喙部가 대부분의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데, 이 喙部와 沙喙部는 기존 신라사 자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모아질 수 밖에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梁部와 沙梁部가 보이므로 喙가 후대에 梁으로 바뀌어졌다고 추정할 뿐이다.

『화랑세기』에는 6세기대 신라지배층사회를 兩分하고 있는 이 탁부와 사탁부가 어떤 형 태로 나타나는가? 표면적으로는 部體制가 보이지 않는다. 부체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화랑세기』는 그야말로 僞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지배층 사회를 兩分하고 있는 요소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大元神統과 眞骨正統이다. 『화랑세기』에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母系 血緣集團이다. 喙部와 沙喙部도 모계가 같은 혈연집단이 아닌가 가정해 볼 필요가 있다.

1.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왕비의 姻統일 뿐인가?

앞서 거론했다시피 이종욱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왕비를 배출한 모계혈통이라고 진단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20]. 왕비가 대대로 두 갈래의 혈통에서만 나왔다고 하는데, 이런 인식이 과연 합리적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왕비가 두 갈래 여성 혈통에서만 나왔다면 왜 그런 현상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대사회의 절대권력자인 왕이 사랑하는 여인은 고귀한 혈통도 조건이 될 수 있지만, 美貌라는 조건도 필요할 것이다.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왕비로 삼아 그 여인이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母系의 直系血統이다. 외할머니-어머니-(나)-딸-외손녀 이렇게 여성으로만 이어지는 직계혈통이다. 남자도 이 모계혈통에 포함되어 어머니의 모계혈통을 따르고 있다 [21].

그런데 주목할 것은 남성들로 조직된 화랑도 조직 내에서도 모계혈통으로 派가 갈라져 대립과 경쟁, 또는 갈등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派가 風月主가 되느냐, 또는 副弟가 되느냐하는 파벌형성의 제1요건이 대원신통이냐 진골정통이냐 하는 것인데 어머니의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자들이 파벌이 갈라져 다툰다면, 단순한 혈통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왕실 내에서도 여성들이 모계에 의해, 두 파벌로 갈라져 암투를 벌이고 있는 양상이 나타난다. 신라 지배층 전체가 兩大 모계혈통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면 모계로 혈통을 구분하는 두 집단이 신라를 지배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인식의 대전환을 해 볼 필요가 있다.

2.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喙部와 沙喙部의 다른 이름

학자들은 영일냉수리비의 至都盧葛文王은 지증왕, 울진봉평비의 牟卽智寐錦王은 법흥왕, 斯夫智葛文王은 법흥왕의 아우로 알려진 立宗으로 대체로 比定하고 있다 [22]. 그런데 지증왕은 沙喙部, 법흥왕은 喙部, 입종은 沙喙部로 서로 部가 다르다. 父子간 兄弟간에 部가 다르다면 부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部는 단순한 행정구역이란 주장이 나올 수 있다 [23]. 하지만 그렇게 보면 兩部에 소속된 사람들이 왕과 갈문왕을 위시한 高官도 있고 16위 관등 小烏帝智같은 下位官等者도 포함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왕과 高官, 하위 官職者가 골고루 섞여 같은 행정구역에 거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는 이에 대해 部를 모계혈통에 의해 형성된 血緣集團으로 보고 지증왕과 법흥왕은 모계혈통이 다르기에 部가 다르다고 가정해 본다 [24].

『화랑세기』에는 지증왕과 법흥왕은 모계혈통이 다름이 확인된다. 지증왕은 그 母가 鳥生夫人으로 眞骨正統임이 확인되고 법흥왕은 大元神統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母 延帝夫人이 진골정통 계보에 보이지 않으므로 대원신통임을 알 수 있다 [25]. 父子간에 모계혈통이 다르니 部는 바로 모계혈통이란 것이다. 아울러 立宗葛文王도 법흥왕의 아우라 했지만 異腹兄弟로 추정할 수 있다 [26].

그러므로 양대 모계혈통인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바로 喙部와 沙喙部의 다른 이름이라 가정할 수 있다. 6세기대 신라금석문에는 왕과 고위관료 대부분이 喙部와 沙喙部에 속해 있다. 6세기 신라 지배층의 파벌과 소속을 나타내는 이 部體制가 『화랑세기』에 보이지 않는다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자료로 볼 수 없다. 『화랑세기』에 보이는 兩統體制의 對立構圖를 新羅碑文에 나오는 兩部體制의 對立構圖에 비교할 수 있다. 部라는 조직이 어떤 매개체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일단 혈통이라고 본다. 古代社會가 대체로 血統을 중심으로 集團이 형성되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초기 신라의 6부가 각기 다른 姓을 가졌음을 보더라도 部는 혈통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화랑세기』에는 왜 部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統으로 칭하고 있을까? 화랑세기가 탄생할 무렵 部體制가 사라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598년 작성된 남산신성비에는 그때까지도 탁부 [27] 와 사탁부, 本彼部 등이 보이지만 文武王碑에는 部의 이름이 없다. 部體制는 통일기를 즈음한 7세기경에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왕위가 聖骨에서 眞骨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이다. 울진봉평비에는 왕(법흥왕)이 탁부에 속해 있었지만 진흥왕代 비문에서는 왕의 所屬 部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 만큼 왕권이 강화됐음을 시사한다. 왕이 갈문왕과 대등한 수준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가 외부문화 (특히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불합리한 傳來의 慣習體系로부터 점차 탈피해가는 과정으로 본다. 왕위계승체제 부분에서 이 문제를 再論하겠다. 어쨌든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작할 당시 部로서 人名을 표기하던 방식은 사라졌다고 본다. 그 이후에 다시 部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部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배층의 兩大 세력을 다른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라고 본다. 統이라는 명칭은 部의 형성 기준이 바로 血統이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部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화는 姓氏制度의 도입이다. 이 시기 진흥왕대 처음으로 姓을 사용했던 근거가 나타나고 [28] 문무왕 비문을 비롯해 [29] 『삼국사기』에도 金武力과 金庾信, 金大問 등 姓氏 사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30]. 姓의 등장과 함께 部가 사라지는 것도 部가 혈통임을 나타내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역시 중국문화를 수용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3. 史書와 金石文에 나타나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

사탁부를 진골정통, 탁부를 대원신통으로 보게 된 근거는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지증왕(至都盧葛文王)이 沙喙部라는 점을 근거로 했고, 喙部인 법흥왕이 대원신통이란 것은 母 연제부인이 진골정통 계보에 없다는 점을 들었다. 다소 불안한 설정이므로 근거를 더 찾아 본다. 화랑세기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한 사실이 드러난다 [31]. 그에 따라 영일냉수리비에 나오는 喙部 乃智王을 찾아 본다.

지증왕(진골정통) - 법흥왕(대원신통) - 진흥왕(진골정통) - 진지왕(대원신통) - 진평왕(진골정통)

이제 필자의 추정에 따라 部名으로 바꾸어 본다.

지증왕(沙喙) - 법흥왕(喙) - 진흥왕(沙喙) - 진지왕(喙) - 진평왕(沙喙)

다시 지증왕대 이전으로 이 계승체제를 연장한다.

눌지왕(대원:喙) - 자비왕(진골:沙喙) - 소지왕(대원:喙) - 지증왕(진골:沙喙)

반드시 이런 순서로 계승해 왔다고 볼 근거는 없으나, 지증에서 진평대까지의 형태로 보아 그 前代에도 이런 체제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왕력」에 눌지왕의 異名을 內只王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 喙部 乃智王을 눌지왕으로 비정하고 있다. 눌지왕의 母 保反夫人도 진골정통계보에 없으며, 대원신통의 祖로 알려진 美와 이름이 유사하고 활동기간이 유사하므로 자매간이 아닌가 추정한다. 또 『삼국유사』「왕력」에 눌지왕의 아들 인 자비왕의 母가 아로부인 [32] 이라 한 점도 交婚의 관습으로 보아, 눌지왕이 대원신통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단양적성비에는 한 사람의 낯익은 이름이 시선을 끄는데 沙喙部 設智及干支이다. 창녕 척경비에 나오는 沙喙部 都設智沙尺干도 동일인물일 것이다. 도설지는 대가야의 마지막왕으 로 알려져 있다 [33]. 그 도설지가 신라 관직을 갖고 沙喙部소속이 되어 있다. 금관가야 왕족과 마찬가지로 이 도설지도 대가야가 망한 뒤, 신라에 歸附해 신라관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설지가 사탁부가 된 과정이 화랑세기에 드러난다. 도설지는 대가야왕 異腦의 아들이라는데 이뇌는 신라소지왕비 선혜부인이 낳은 兩花公主를 왕비로 맞았다고 한다. 이뇌가 죽고 도설지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니 도설지의 어머니는 양화공주일 것이다. 양화공주의 母 선혜부인은 진골정통이니 도설지는 沙喙部이어야 한다 [34].

『화랑세기』에 보이는 인물들의 모계혈통과 碑文에 소속 部가 표기된 채 나타난 인물들을 직접 비교해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인명 표기 방식이 틀리기 때문이다. 김대문은 모든 人名을 뜻을 살린 漢文으로 표기했음을 분명히 밝혔지만 [35], 碑文의 人名은 소리나는 대로 적은 鄕音이기에 동일인물이 있어도 알 도리가 없다 [36]. 둘째는 비문에 나온 인물들은 대체로 6세기 중반의 인물인데 반해, 화랑세기에 모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인물들의 활동기는 6세기후반-7세기전반경으로 시기가 어긋나기 때문으로 본다. 또 하나는 모계혈통은 母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추적할 수 있는데 비문에는 여성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사부(苔宗), 거칠부(黃宗)--喙부
도설지, 무력지--沙喙部 [37]

이렇게 금석문에서 部名이 드러난 유명인물도 『화랑세기』에서는 어느 계통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이들의 아들로 드러난 인물들, 예컨대 이사부의 아들 世宗, 거칠부의 딸 淑明공주가 모두 진골정통이고 무력의 아들 서현이 대원신통으로 나타난 것은 대체로 모계혈통과 部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이 인물들의 혼인형태가 대체로 兩大 母系集團사이의 交婚이었기에 子女들은 아버지와 모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필자의 연구가 미진한 탓으로 이 정도만 밝혔지만, 양쪽자료를 보다 치밀하게 분석하면 더 많은 사례가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법흥왕의 아우로 알려진 立宗도 법흥왕과 모계가 다른 異腹兄弟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법흥왕의 딸(지소)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뒤에 왕위계승부문에서 再論하겠지만 혈통의 기준을 모계로 보았을 때 대체로 族外婚을 지향했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난다. 같은 모계의 형제(同母兄弟)에게 딸을 주는 혼인사례는 극히 드물거니와 이런 혼인에서 왕위계승자가 나올 수 없다 [38].

IV. 聖骨과 眞骨

骨品制는 신라에서 혈통을 주체로 한 폐쇄적인 신분제로 알려져 있다. 골품은 聖骨, 眞骨과 여섯 頭品을 합쳐 骨品으로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頭品이 없고 골품이란 용어만 쓰이고 있다. 『화랑세기』가 작성될 시점에 두품이란 체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화랑세기』에서 사용하는 골품은 骨의 品階일뿐, 골품과 두품을 합친 용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骨品은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모계혈통만을 지 칭하고 있으니, 모계혈통의 높고 낮음이다. 골품제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정리된 定說은 없고 각양각색의 견해가 난무하고 있다 [39]. 현재까지도 골품제의 주요 쟁점은 聖骨과 眞骨이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조에 있는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까지는 聖骨이고 진덕여왕부터 말기까지 眞骨..."이라 한 대목, 그리고 『삼국사기』「雜誌. 服色」조에 보이는 성골과 진골의 엄격한 의식주 차별을 보고 성골과 진골이 따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무엇이 성골이고 무엇이 진골인지 아직 명료하게 구별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0].

앞서 지적했다시피 『화랑세기』는 골품을 모계혈통의 品階라는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성골과 진골도 종래의 부계와 모계를 포함한 포괄적인 혈통개념에서 탈피해 모계혈통 중심으로 범위를 좁혀 볼 필요가 있다. 뒷부분 왕위계승체제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화랑세기』에 나타난 골품의 성격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점만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1. 聖骨

聖骨은 문헌자료에 나타날 뿐,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身分이란 說도 있다 [41]. 성골과 진골의 분리가 어떤 기준이었는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는 성골이나 진골이란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진골이란 용어가 쓰이긴 하지만 골품제 하에서의 진골이 아니라 진골정통의 略稱으로만 쓰고 있다. 이 시대 성골이나 진골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계혈통의 높낮이로 신분을 구분하고, 그러한 신분구분이 제도로서 정착되었을 정황도 보인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통해서도 성골과 진골의 명확한 구분을 찾기는 불가능하나 그러한 구분이 있었음은 분명히 드러난다.

「13세 龍春公」(142쪽) "骨品者王位臣位之別也....골품은 王位와 臣位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이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추정하게 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성골은 王位와 연결하고 진골을 臣位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골은 독특한 왕위계승체제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나 왕의 혈통과 관계된 여인들을 성골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善德, 眞德 두 女王이 등장하고 그 이후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무열왕이 되는 순간부터 성골이 끝났다고 한 것은, 그 前代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었고 성골이란 용어는 그 변화 이전의 체제를 가리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그 왕위계승 체제를 해부하는 것이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일반론으로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인 자를 聖骨이라 한다면 무열왕 김춘추도 성골이 아니라고 볼 여지는 없다 [42]. 무열왕은 父系로 진지왕의 손자이고 母는 진평왕의 딸 天命이므로 양가 모두 왕족이다. 그의 正妻가 김유신의 누이로 직계왕족 혈통이 아니므로 妻의 신분에 의한 것이라는 說도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43]. 그 점도 일견 타당하다 할 수 있으나 김유신의 여동생과 왕실의 여인사이의 혈통상 차이점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하고 왕실 여인들의 혈통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

이종욱은 김춘추의 母 천명부인이 出宮했다는 사실 [44] 을 들어 왕궁에 거주하는 왕의 직계 가족이 성골이라는 주장을 폈다 [45] 하지만 골품이란 신분이 유동성을 가졌다는 설정은 문제가 된다. 出宮하면 성골신분이 사라진다는 논리라면, 다시 入宮하면 성골신분이 복원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골품신분이 유동적이라면 그토록 엄격한 골품제의 분리와 차별은 존재할 수 없다. 또 무열왕과 그 후대 왕들도 얼마든지 성골신분을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골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왕위계승체제 자체에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는 신라사회전체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혈통의 단절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변화의 단서 하나는 聖骨王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갈문왕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갈문왕이 바로 성골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근거이다 [46].

왕의 직계가족이 성골이라는 설정은 성골의 범위 설정에 있어 일견 近似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라의 왕위계승체제는 다른 王朝와 달리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왕의 아들과 갈문왕의 아들, 왕의 사위와 갈문왕의 사위, 왕의 외손자와 갈문왕의 외손자가 왕이 되고 있다. 뒤에 분석하는 특이한 왕위계승체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二部體制 [47] 의 왕과 갈문왕, 2부 체제 혈통의 중심인물인 양대 모계의 宗 [48], 그리고 그 관계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성골신분을 가졌다고 본다. 兩大 모계의 宗이라는 두 여인과 왕과 갈문왕, 두 남성이 서로 交婚을 하여 성골신분을 배출한다고 보지만 이 4인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넷뿐일 수는 없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2인의 남성은 왕과 갈문왕이 되고 2인의 여성은 모계의 宗이 된다. 나머지 형제자매는 왕궁에 남아 혈통을 계승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出宮을 하여야 한다. 출궁하면 바로 성골신분을 잃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혈통을 잇기 위해 宮에 남은 형제자매가 代를 잇기 전에 사망하기라도 하면 바로 왕궁에 들어가 혈통을 계승해야 한다. 그러므로 왕궁에서 태어난 사람은 출궁을 했더라도 성골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출궁한 이들이 낳은 자녀도 성골신분을 이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출궁이라는 行爲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혈통의 기준이 되는 宗과 世代가 벌어지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왕실에 남아 혈통을 계승하는 直系와 세대가 벌어지면 어느 代에선가 신분이 갈라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시점에 대한 기준은 알 수 없다. 이상은 필자가 생각하는 특이한 왕위계승체제에 의한 성골개념이다.

김춘추가 성골이 되지 못한 경위를 위의 왕위계승체제와 관련해 분석해 본다. 김춘추의 父 龍樹 [49] 와 母 天命夫人은 성골 신분임이 틀림없다. 「6세 용춘공」조에는 진평왕이 한때 용수나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용수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진평왕이 다시 용춘에게 옮겨가고 최종적으로 딸 선덕에게 옮겨가며, 용수, 용춘이 각기 선덕과 관계해 자녀를 낳고자 했지만, 선덕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바람에 그 의도가 좌절되고 선덕은 여왕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김춘추는 出宮한 천명의 아들이기에 왕(宗)이 된 善德에 대해 傍系가 되므로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50]. 하지만 김춘추의 혼인관계가 결정적인 결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 양대 모계의 宗에 의한 독특한 혈통계승 체제를 이어 가지 못할 결정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51]. 앞서 용춘의 경우에도 그러했지만 『화랑세기』에는 혼인과 출산에 의한 혈통계승이 당사자의 신분에도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2].

어쨌든 성골은 독특한 왕위계승체제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한데, 필자는 역시 모계혈통의 문제가 왕위계승 자격과 성골 신분을 좌우한다고 본다. 앞서 지증왕의 경우에도 父系로는 前代 소지왕과 再從간이 되므로 거리가 멀지만, 모계로는 진골정통의 宗인 鳥生夫人의 아들이므로 성골이 되고, 그에 앞서 前王과 방계 혈족이면서도 왕이 된 미추왕, 내물왕, 실성왕등도 모계로는 이 범주 안에 들어 있었다고 본다 [53]. 다시 정리하면 양대 모계혈통의 기준인 宗과의 혈연관계가 성골 신분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2. 眞骨

우리는 진골이란 용어를 신분으로서만 알고 있다. 즉 성골 신분과 진골 신분이 있고 또 頭品 신분이 있다고 알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이 眞骨이란 용어가 여러차례 나오지만 身分으로서의 진골이 아니라, 항시 진골정통을 약칭으로 진골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54]. 신분이 아닌 혈통을 지칭하고 있다. 대신 신분으로서의 진골을 말할 때는 骨人, 骨品등으로 쓴다. 그렇다면 진골이 신분을 지칭하게 된 것은 『화랑세기』 탄생 이후일 가능성이 있다.

김대문의 시대에 部體制가 사라지고 대신 혈통을 나타내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그 진골정통에서 왕실과 관련된 혈통, 즉 骨人들을 眞骨로 부르게 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화랑세기』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며 권력을 양분하던 체제에서 진평왕代 균형의 추가 진골정통쪽으로 기울게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평왕의 母后인 萬呼夫人이 攝政하면서 대원신통을 핍박했다고 한다. 그 결과 대원신통의 勢가 급격히 위축되었던 상황이 나타난다 [55]. 혼인에 있어서도 兩統間 交婚이 주류를 이루던 체제에서 탈피해 진골정통 내부에서의 혼인이 주류를 이룬 실태가 보인다 [56]. 대원신통을 대체하며 등장한 세력이 문노와 김유신등의 가야계이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무열왕비가 되면서 완전한 대체를 이루게 된다.

대원신통계의 몰락으로 兩大 母系集團이 균형을 이루며 신라를 지배하던 체제에서 진골정 통의 독주체제로 굳어짐으로서 진골이란 이름은 兩大血統의 한 갈래를 지칭하던 이름에서 전체 신라귀족층의 신분을 [57] 지칭하는 용어로 서서히 변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대원신통계를 대체한 김유신일족이 또한 진골정통이었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58]. 진골 아래 頭品집단은 喙部와 沙喙部를 제외한 습비부, 한기부, 모량부, 본피부등을 지칭한다고 보지만 여기서 자세한 분석은 하지 않겠다.

이러한 혈통계승체제로 보면 진골신분의 계승도 모계가 기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와 관련된 기록이 『新唐書』「列傳」新羅條에 있다 [59].

其族名第一骨, 第二骨以自別. 兄弟女.姑.姨.從 妹, 皆聘爲妾. 王族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 常爲妾 ... 친족의 명칭에 제1골 제2골이니 하여 서로 구별한다. 형제의 딸 및 고모와 이모 및 사촌자매간에 모두 혼인한다. 왕족이 제1골이고 왕비 역시 1골이다. 아들을 낳으면 제1골이 되며 제2골의 여인에게는 장가들지 않으며 비록 장가들더라도 항상 첩으로 삼는다.

통상 알고 있는 골품제와 크게 相異하지 않다. 하지만 "제2골의 여인에게는 장가들지 않으며 장가들더라도 항상 첩으로 삼는다" 이 대목에 주목하게 된다. 『화랑세기』에는 첩신분의 여인도 많고 첩신분에서 태어난 자손들도 많다. 하지만 첩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들은 신분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월주들도 첩신분에게서 많은 자녀를 얻었지만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했음이 나타난다.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욱은 첩의 아들은 정실의 아들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고 조선시대 庶子차별제에 견주고 있다 [60].

하지만 이는 조선의 庶子차별이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지, 신라의 경우를 조선시대의 것과 같은 범주로 볼 수 없다. 화랑세기에는 최고 신분인 국왕도 수많은 후궁(첩)을 두고 있는데 그 후궁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별다른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앞서 거론한 比臺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正妃에게서 태어난 王子에 비해 많은 차별을 당하고 있다. 신당 서의 이 대목은 제1골(聖骨)위주로 기록했지만 실제 진골신분에도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61].

진골신분이 모계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진골 신분인 남자가 6두품 여인을 첩으로 삼으면, 그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골이나 진골은 후대로 내려간다고 해서 인구비례가 높아질 수도 없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많은 妻를 거느리지만 진골신분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면 진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세기의 풍월주들은 100여명에 이르는 자녀를 낳았다는 경우도 있는데 [62] 이 자식들이 다 높은 신분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남자는 일생 동안 수 백명의 자녀를 얻는 것이 가능하지만 한 여성이 낳을 수 있는 자녀는 많아야 10여 명으로 한정돼 있다. 진골신분만 인구비례에서 높아질 수 없다.

3. 朗慧和尙塔碑銘의 骨品

골품제를 연구한 논문에는 朗慧和尙塔碑銘(聖住寺塔碑文)의 골품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인용하고 있다. 신라 當代의 자료중 골품에 대한 자료는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俗姓金氏, 以武烈大王八代祖, 大父周川, 品眞骨,位韓粲, 高曾出入, 皆將相戶知之. 父範淸, 族降眞骨一等曰得難, (原註:國有五品, 曰聖而, 曰眞骨, 曰得難....속성이 김씨이고 무열대왕이 8대조이다. 할아버지(大父)는 周川이며 골품은 진골이다. 직위는 韓粲(대아찬)이다. 고조와 증조는 나아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었다. 아버지는 範淸이며 일족이 진골에서 1등 降等하여 득난이 되었다』 [63]

여기서 族降이란 말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낭혜화상 가문의 골품이 인위적 또는 정책적으로 降等되었다는 해석이다. 진골 신분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기므로 정책적으로 골품을 강등시켰다는 말이다. 이 비문의 골품기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 대목의 족강을 인위적인 강등이라 보는데는 별 이견이 없는 것 같다 [64].

인위적인 강등이라면 골품이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유동적인 신분이 되는 것이다. 강등이라면 골품이 강등되어야 할 사유가 있었는지? 강등의 범위나 대상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 또 법이나 관습에 의한 강등이 아니라면 강등 당한 사람들의 반발도 당연히 예상된다. 인위적인 강등이 있었다면 인위적인 상승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모계혈통체제로 이 문제를 보면 낭혜화상의 조부 周川은 진골신분의 여성과 혼인하지 못했기에 아들 範淸은 진골이 아니다고 해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범청은 주천의 嫡子가 아니라 庶子다. 즉 주천의 正妻는 진골 신분이었지만 첩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이었고 범청은 바로 첩의 아들이란 것이다. 後者일 가능성이 높다. 주천이 자기 자식에게도 진골 신분을 물려주기 위해 진골신분여인과 혼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첩까지 진골신분일 필요는 없고 진골신분의 여인이 같은 신분인 남자의 첩으로 들어가는 일도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니 범청은 주천의 本妻 아들이 아니란 것이다.

한 個人의 身分變動에 대해 族이란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예상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낭혜화상의 입장에서 8代祖 무열왕까지를 올려 보면 대대로 진골신분이었다가 아버지 범청 代에 한 등급 떨어졌으니 그 후손이 계속 이어진다고 보면, 一族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번 떨어진 신분은 復位가 어렵다. 범청의 후손들이 6두품이 되었는데 진골신분 여인과의 혼인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범청의 후손 입장으로는 範淸 代에 族降되었다고 볼 수 있다.

V. 母系血統에 의한 王位繼承

『화랑세기』는 신라 왕실이 모계혈통에 의해 왕위계승을 해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母系繼承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왕위계승에 있어 兩大 모계혈통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하고 있고, 모계의 直系血統이 석씨와 김씨 등 王姓의 變動과 관계없이 中古시대까지 이어진 점을 보면 모계계승이라 볼 정황은 충분하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제외한 여타 자료에는 모계에 의한 계승이라는 단서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조 혁거세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이른바 聖骨王시대의 왕위계승 사례는 물론, 下代에도 모계위주의 계승체제가 보인다. 그 근거는 전왕의 사위 또는 외손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는 사례 가 많은 점, 박씨와 석씨, 김씨가 서로 뒤섞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점, 고구려 백제와 달리 王曆에 母系와 왕비의 家系에 대한 기록이 빠지지 않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新羅의 王位繼承에 있어 모계가 重視되었다거나 모계에 의한 계승이 있었다는 주장은 과 거부터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65].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모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기존 문헌자료를 근거로 도출된 것들이다. 『화랑세기』에는 이들 연구 성과와 상당히 유사하며, 구체적인 母系繼承의 形態가 나타난다. 『화랑세기』가 1950년대 이후 나온 위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應用해서 僞作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모계체제의 구체적인 형태를 담은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먼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 기존 자료에 나타난 모계 계승의 흔적을 살펴보고 『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계승 체제를 볼 것이며, 아울러 금석문자료와 문헌자료, 화랑세기 3者를 대조해서 실제 신라왕실의 모계계승체제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인지 구체적인 형태를 추정해 보겠다.

1. 신라의 특이한 王位繼承

新羅王曆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기에 三姓交立이란 현상이 나타나는 점과 사위 또는 외손자계승이 많은 점, 그리고 갈문왕이 왕위계승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三姓交立과 사위계승은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다. 왕의 姓이 바뀔 때 사위가 계승하는 사례가 많은 것이다. 탈해왕, 미추왕, 내물왕 등 왕의 姓이 바뀔 때 사위가 계승하는 사실을 들어 전통 학설은 아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위가 代를 이었다거나, 父系가 다른 집단이 무력으로 왕조를 교체한 사실을 숨겨 그렇게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다른 王朝에서는 항상 조카나 사촌, 그도 아니면 父系의 傍系親族 중에서 왕위계승자를 찾았다. 아들이 없을 때 사위가 계승하는 경우는 신라 외에 찾아 보기 힘들다. 後者의 경우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탈해왕이 물러난 뒤 다시 박씨 파사왕이 등장하는 거나 김씨 미추왕 다음에 다시 석씨왕이 등장하는 사례로 보면 결코 다른 父系集團이 왕조를 찬탈했다고 볼 상황은 아니다.

사위나 외손자가 여러 차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母系에 의한 왕위계승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기록에서 사위라고 明示한 경우는 4대 탈해왕 뿐이지만, 다른 경우에도 왕비가 前王의 딸이라고 하므로 사위임을 알 수 있다. 왕력에서 모계계승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보겠다.

<사위계승>
4대 탈해왕(남해왕의 사위)
11대 조분왕(왕비가 내해왕의 딸)
13대 미추왕(왕비가 조분왕의 딸)
17대 내물왕(왕비가 미추왕의 딸)
18대 실성왕(왕비가 미추왕의 딸)
19대 눌지왕(왕비가 실성왕의 딸)

<외손자계승>
8대 아달라왕(母가 지마왕의 딸)
16대 흘해왕(母가 조분왕의 딸)
19대 눌지왕(母가 미추왕의 딸)
20대 자비왕(母가 실성왕의 딸)
22대 지증왕(母가 눌지왕의 딸)
24대 진흥왕(母가 법흥왕의 딸)

사위 또는 외손자계승이라고 한 위의 왕실계보가 父系繼承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조분왕은 내해왕의 사위 자격보다 벌휴왕의 손자라는 자격으로, 또 진흥왕은 법흥왕의 사위로서보다, 조카라는 자격으로 계승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외손자계승이라고 한 아달라왕, 흘해왕, 눌지왕, 자비왕, 지증왕, 진흥왕 중 지증왕을 제외하면 모두 父系로서도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66]. 그러나 聖骨時代 전체 王曆을 하나의 틀로 보면 독특한 왕위계승체제가 드러난다.

먼저 부계계승이 아니고 모계계승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은 왕의 姓이 바뀌는 시점, 즉 父系의 轉換期에 항상 모계가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해왕의 사위인 탈해가 박씨 유리왕의 代를 이으면서 남해왕비 雲帝夫人과 脫解王妃 사이에 모계가 연결되고 있다. 박씨 아달라왕에서 석씨 벌휴, 내해왕으로 다시 석씨로 돌아가는 과정에도 內禮夫人이란 연결고리가 나타난다. 내례부인은 박씨 아달라왕비이면서 석씨 내해왕의 王母로 등장한다. 이 경우 두 인물이 同名異人일 수도 있겠지만 아달라왕대 나타난 仇道라는 인물이 내해왕대에도 활약하는 것을 보면 아달라왕비와 奈解王母는 동일인물로 볼 여지가 있다.

11대 조분왕은 벌휴왕의 손자라 했지만 구도갈문왕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기에 김씨쪽 性向을 보인다. 仇道는 味鄒王의 父로 알려졌지만 이미 그 前代 조분왕의 장인으로 王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경우도 구도의 딸이라는 모계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김씨로 알려진 구도와 미추도 昔氏王朝 代의 인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여기에 있다. 金氏 勢習體制를 연 내물왕도 昔氏王朝 인물인 味鄒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다음 18대 실성왕의 어머니가 昔氏라고 한 것도 석씨와의 연결고리다. 미추와 내물 사이에는 유례,기림,흘해 3명의 왕이 있지만 이 3대의 간격은 다른 곳에도 나타나고 있으니 조분왕비 아이혜는 점해, 미추, 유례 3대를 거친후 기림이사금의 母로 등장한다. 내물, 실성, 2왕의 丈人인 미추왕보다, 왕비 광명부인 쪽을 보면 3대를 거친 후 왕의 丈母로 등장하는 공통점을 볼 수 있다. 朴氏나 昔氏, 金氏 집단을 혈통이나 性向, 문화 등으로 뚜렷이 분리해 보는 경향이 많지만, 서로 모계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달리 볼 수 있는 단서이다.

1대 박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聖骨王時代를 보면 부계의 직계상속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또한, 다른 王位繼承體制가 있음을 짐작케하는 단서이다.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高祖-曾祖-祖-父순의 直系繼承을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부계계승의 흔적이 분명히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父子 사이에 다른 姓의 왕이 끼어들거나 한 세대를 缺落시키고 등장하는 등, 직계상속이 아주 드물게 보이는 점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넘긴 경우는 초기의 혁거세-남해-유리, 파사-지마, 눌지-자비-소지, 지증-법흥 등 6차례가 전부다. 이상 신라왕위 계승체제의 특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前王의 사위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사례가 많다.
② 姓이 바뀌면서도 모계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③ 왕위의 父系 直系相續이 드물다.
④ 왕실 내의 近親婚이 많다.
⑤ 갈문왕이 혈통상 왕실의 한 주체로 등장한다.

이런 특징들은 순수한 부계계승체제와 다른 특이한 체제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기록의 混線이나 漏落에 의해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복잡한 계승관계에서 하나의 법칙이 도출된다면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에서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王曆만이 王母의 家系와 왕비의 家系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 점도 그에 관한 단서의 하나이다.

2.『화랑세기』에 나타난 王位繼承

(1) 『화랑세기』의 왕위계승

앞서 거론한 대로 화랑세기에서 신라인은 혈통을 모계로 계승하고 구분했다는 사실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고 왕실 내에 모계혈통으로 나뉘어진 2개의 파벌이 형성돼 있다. 왕실에는 왕의 母后, 王妃, 여러 後宮들이 모두 대원신통 아니면 진골정통에 속해 있다. 그리고 왕실을 둘러싼 화랑도 조직, 또 고관대작들도 모두 양대 모계집단에 소속되어 지배층 전체가 二元化되어 있다. 그런데 두 모계집단은 항시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적어도 진평왕대 이전까지 두 모계집단은 서로 婚姻을 하는 사이였으며 어떤 법칙에 의해 相互補完적인 관계를 영위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22대 지증왕(진골정통), 23대 법흥왕(대원신통), 24대 진흥왕(진골정통), 25대 진지왕(대원신통), 26대 진평왕(진골정통)

이렇게 5대가 지속되는 동안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해 왔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로 나타난 결과이고,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법흥왕의 뒤를 이어 진흥왕이 계승하는 과정에서 명확한 단서가 발견된다. 법흥왕의 아들이 있었고 법흥왕 자신도 그 아들에게 왕위를 相續케 하고자 企圖했으나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67].

왕실의 여인들과 실력자들이 반대한 이유는 법흥왕의 아들 比臺의 母인 玉珍이 正妃가 아 니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正統難立... 진골정통이 서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68]. 이것이 또한 법흥왕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주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이 대원신통이고 比臺도 대원신통이니 진골정통이 서기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진골정통인 진흥왕이 代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라는 기존 자료에서 가졌던 왕위계승체제의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진흥왕이 법흥왕의 사위라는 자격을 가진 점은 앞서 사위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여러 사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사위왕 등장사례는 「13세 용춘공」(145-147쪽) 에서 한번 더 확인된다. 기존 자료에서 가졌던 의문, 즉 진평왕이 四寸인 龍春을 두고 왜 자신의 딸에게 왕위를 계승케 했느냐는 의문에 대해 화랑세기는 해명의 근거를 보이고 있다. 진평왕은 용춘의 형 龍樹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는 것이다 [69]. 그래서 맏딸 天命과 용수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뒤에 왕의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 용수보다 아우인 용춘에게 마음이 기운 것이다. 용춘의 능력이 더 뛰어났음이 짐작된다. 이 과정에서 진평왕의 두 딸인 천명과 선덕사이에 운명이 갈린다. 앞서 진평왕은 맏딸을 이미 용수에게 시집보냈다. 용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이제 마음이 변해서 용춘에게 왕위를 주고 싶은 것이다. 딸에게 양보를 권했다. 천명은 효심으로 순종하여 出宮했다. 왕비가 되지 못할 운명이니 왕궁을 나와야 한다 [70]. 善德公主는 천명과 달리 용춘과 자신이 혼인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71]. 선덕은 당시 처녀였기에 그런 태도가 가능했을 것이다. 선덕은 결국 자식을 낳지 못해 용춘의 사위계승은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진평왕이 자신의 사촌인 용수, 용춘 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만 그냥 물려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딸과 혼인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평왕과 사촌형제인 용춘에게로 왕위가 가는 것이 아니라 진평왕비 摩耶夫人에서 그 딸인 천명이나 선덕에게로 권위가 계승되는 형식이 취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이 부계가 아니라 모계계승체제임을 설명하고 있다.

(2) 兩大 모계혈통의 交代繼承

앞서 신라의 王曆과 王室系譜를 보면 단순한 부계체제로 볼 수 없다는 면을 피력하였지만 그렇다고 부계가 무시되었던 상황은 아니다. 金哲埈은 이를 들어 "Double Descent" 즉, 二重繼承이나 兩系繼承이라 했는데 [72] 모계와 부계를 모두 만족시키는 계승체제를 말한다. 만일 왕족이 두 계통이 아니고 한 계통이면서 모계와 부계를 모두 만족시키는 直系 계승체제를 지속하려면 극단적인 近親婚, 즉 親男妹간의 혼인이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근친혼은 우생학적인 면에서 종말을 부르며,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다. 『화랑세기』에서도 同父同腹의 친남매간 혼인은 볼 수 없다.

직계혈통에 의한 왕위계승이 있어왔지만, 그 혈통이 하나가 아니라 2갈래 모계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극단적인 근친혼은 막을 수 있었으니 바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다. 화랑세기는 兩大 母系가 지증왕부터 진평왕까지 교대 계승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앞서 部體制항에서 말한 대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을 部로 바꾸어 보면 喙部와 沙喙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한 형태가 된다.

여기서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를 다시 보겠다. 영일냉수리비의 沙喙部 至都盧葛文王은 비문이 작성되던 癸未年(503년)에 갈문왕의 자격으로 통치했음을 나타낸다 [73]. 울진봉평비에는 喙部 牟卽智寐錦王과 沙喙部 沙夫智葛文王이 있다. 일부 연구자는 탁부는 왕을 맡고 사탁부는 갈문왕을 맡았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영일냉수리비의 지도로갈문왕(지증왕)이 실제로 왕위에 재위했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갈문왕이 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史書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當代에 기록된 금석문과 후대기록인 사서를 대조하면 그러한 사례가 가능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탁부 지증왕과 탁부 법흥왕은 父子간이면서 部가 다르다. 부계로는 父子相續이라 볼 수 있지만, 탁부와 사탁부가 交代했음이 확인된다. 『화랑세기』에 진골정통인 지증왕과 대원신통인 법흥왕이 왕위를 교대하는 상황과 일치한다. 여기에 탁부 법흥왕의 在位時 그와 형제간으로 알려진 立宗이 사탁부소속으로 갈문왕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또한 주목한다.

왕과 갈문왕은 각기 자신의 部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탁부가 왕위를 차지하면 사탁부는 갈문왕을 맡았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탁부가 왕이면 탁부는 갈문왕이 되어야한다. 화랑도 조직 내에서 풍월주가 대원신통이면 화합을 위해 진골정통을 副弟(화랑도조직의 2인자)로 삼 는것과 같은 맥락이다 [74]. 양대집단이 대등한 균형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한 쪽이 소멸할 수 있고 균형을 유지하자 면 대등한 權力分割體制를 유지해야 한다. 울진봉평비에서 사탁부는 立宗으로 추정되는 斯夫智葛文王 [75] 이 사탁부를 대표하며 갈문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법흥왕이 탁부이니 이제 사탁부가 다음 왕위를 맡아야 한다. 법흥왕비 保道夫人이 사탁부(진골정통)이니 자연스레 사탁부가 계승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보도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것 같다. 보도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은 화랑세기에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보도부인의 딸 지소부인이 낳은 진흥왕이 대를 잇는 것이다 [76]. 여기서 왕이 相對 部의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상속하면서 모계로는 교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눌지-자비-소지 3대는 두차례 부자직계상속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도 왕실의 양대 모계혈통간 交婚으로 모계혈통의 교대계승(部의 교대)은 지속될 수 있다.

(3) 兩大母系集團을 대표하는 여성, 宗 [77]

탁부와 사탁부라는 모계집단을 대표하는 남성이 왕과 갈문왕이라고 했는데, 『화랑세기』에는 양대 모계집단의 여성수뇌가 있으니 宗이라 했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宗이다. 이 宗이란 여인은 宮主로도 불렸는데 각기 梁宮과 沙梁宮을 차지하고 왕과 갈문왕의 혼인상대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78].

「11세 夏宗」(128쪽) 보리공의 어머니가 숙명공주였기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진골정통은 只召를 宗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思道를 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祖는 玉帽였고 대원신통의 祖는 보美로부터 출생하였다.

祖는 시조란 말이고 宗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혈통기준점이란 말이다. 이 기준점에서 왕이 배출되었다면 모든 고위신분은 이 宗이란 모계의 기준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宗의 신분이 모든 혈통의 頂點이며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골정통의 祖가 석씨왕조 初入에 이미 출발하고 있고 대원신통의 祖 보美는 내물왕대 인물로 보인다 [79]. 진골정통의 祖 玉帽는 仇道의 딸이라 했는데, "非古之眞骨也....옛부터의 眞骨이 아니다. [80]"라고 해서 그 이전에도 진골집단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宗의 혈통이 끊어지면 다시 傍系血族중의 하나로 宗을 삼아 혈통을 이어갔을 것이다. 玉帽 이전의 眞骨이 있었듯이, 보美 이전에도 대원신통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3. 왕과 갈문왕

이제 신라사의 초입부터 진덕여왕 代까지 이른바 聖骨時代 왕실과 끊임없이 연결되던 갈문왕이란 존재를 모계체제와 관련하여 분석하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3대 유리왕의 왕비 家系를 거론하면서 처음으로 "日知葛文王之女"라는 말로 갈문왕이 등장한 이래 28대 진덕여왕代 "國飯葛文王의 딸이다"는 기사까지 갈문왕이란 존재는 왕실과 끊임없이 연결고리를 갖고 나타난다.

김부식은 갈문왕에 대해서 두가지 評을 내고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신라본기」 일성이사금 15년 기사 "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했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이고, 또 하나는 점해왕 원년 "아버지 骨正을 봉하여 世神갈문왕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논평하며 "신라는 왕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왕은 그 아버지를 높여 모두 왕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장인을 그렇게 부른 일도 있었다. 이는 예의에 어긋나니 본받을 일이 못된다."고 한 것이다.

김부식의 논평은 앞서 자세히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이 갈문왕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전적으로 追封한 왕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게 분명하다. 그는 下代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은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추봉해 ㅇㅇ대왕이라 한것과, 초기 왕력에서 왕의 장인이나 외조부를 갈문왕으로 부르는 사실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갈문왕도 추봉한 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도 갈문왕에 대한 인식이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런데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의 발견으로 갈문왕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갈문왕이 당대의 국왕과 함께 국정을 담당한 實勢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중 왕의 系譜에서 갈문왕과의 관계를 찾아 본다.

<초기왕력의 갈문왕관계;3대-28대>

3대 유리왕 - 왕비가 일지갈문왕의 딸
5대 파사왕 - 왕비가 허루갈문왕의 딸
6대 지마왕 - 왕비가 마제갈문왕의 딸
7대 일성왕 - 일지갈문왕의 아들 (或云)
11대 조분왕 - 골정갈문왕의 아들, 母가 구도갈문왕의 딸
13대 미추왕 - 母가 이칠갈문왕의 딸
14대 유리왕 - 母가 내음갈문왕의 딸
17대 내물왕 - 구도갈문왕의 손자.
22대 지증왕 - 습보갈문왕의 아들
24대 진흥왕 - 입종갈문왕의 아들
26대 진평왕 - 왕비가 복승갈문왕의 딸
28대 진덕여왕 - 국반갈문왕의 딸

아울러 왕의 친척으로 왕통에 들어간 왕이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부르지 않은 사례가 상당수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9대 벌휴왕 - 각간 구추의 아들
10대 내해왕 - 이매의 아들
15대 기림왕 - 이찬 걸숙의 아들
16대 흘해왕 - 각간 우로의 아들
17대 내물왕 - 각간 말구의 아들
18대 실성왕 - 이찬 대서지의 아들
26대 진평왕 - 동륜의 아들

이상을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추봉하여 갈문왕으로 불렀다는 김부식의 인식은 잘못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 12대 점해왕代 "아버지 骨正을 봉하여 世神갈문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지만, 이 경우는 갈문왕이 아닌 상태에서 갈문왕으로 추봉했다기보다 骨正에서 世神으로 이름이 바뀌는 상황에 주안점이 있다고 본다 [81].

어쨌든 이상의 기록과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의 갈문왕을 考察해 보면 갈문왕은 왕과 함께 왕궁내에 거주했던, 권력의 한 軸이 분명하다고 본다. 탁부와 사탁부가 권력을 균점하고 탁부가 왕일때는 사탁부가 갈문왕이었고, 사탁부가 왕일 때는 탁부가 갈문왕을 맡았다고 판단한다. 단, 후대 왕권이 강화되면서 각 部에 1명씩 2명의 갈문왕을 두었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 진흥왕대 금석문인 진흥왕순수비와 창녕척경비에는 진흥왕의 소속 部를 銘記하지 않고 있다. 이어서 진평왕 원년 기사 "백반을 봉해 진정갈문왕으로 삼고, 국반을 봉해 진안갈문왕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82].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일성왕代 "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했다"는 기사로 보아 갈문왕은 왕이 임명한다고 볼수 있지만 이는 일성왕대 갈문왕의 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갈문왕이 왕의 통제를 받는 직위였겠지만 그 형식자체는 왕과 대등한 지위라는 구조에서 존속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거론한 대로 갈문왕은 마지막 聖骨王이라는 진덕여왕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갈문왕은 성골체제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성골왕 시대로 지칭된 시기에 실제로는 聖骨이란 용어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 했지만, 이 성골은 초기부터 진덕여왕대까지 독특한 왕위계승체제와 왕위계승이 가능한 身分을 지칭하는 용어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聖骨시대 이후에 갈문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골이란 신분형성에 갈문왕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양대 모계혈통 즉, 二部體制에서 兩部의 남성 대표인 왕과 갈문왕, 그리고 여성대표인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宗간의 交婚으로 聖骨이 탄생하고 갈문왕도 성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도 혈통의 주체는 모계이지, 왕과 갈문왕의 부계혈통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위의 왕력에서도 보았지만 왕의 아들도 갈문왕의 아들도 아닌 왕이 있다. 왕과 갈문왕은 각기 자신의 어머니쪽 혈통에 의해 왕과 갈문왕이 되었지만 자신들이 혈통계승의 주체는 되지 못했다. 다음 왕과 갈문왕은 역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宗인 梁宮主와 沙梁宮主의 혈통에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

갈문왕의 소멸은 법흥왕대 이후 왕권이 크게 강화되면서 왕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던 갈문왕의 지위가 유명무실화되고 이어서 두명의 갈문왕이 탄생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고 본다. 갈문왕의 有名無實化는 성골의 종말, 양대 모계체제(二部體制)의 종말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4인의 핵심인물이 형성하는 계승체제

앞에서 왕위계승체제를 형성하는 핵심인물로 왕과 갈문왕, 진골정통의 宗, 대원신통의 宗 4인을 지적했다. 이제 이 4인이 어떤 형태로 왕위계승과 최고혈통을 계승해 나가는지, 추정을 통해 圖式을 만들어 본다.

왕위계승체계 (== : 혼인관계)
1대 : 王(沙喙部)====喙宮主(대원신통의 宗)
2대 : 王(喙部)====沙喙宮主(진골정통의 宗)
 
葛文王(喙部)=====沙喙宮主(진골정통의 宗)
葛文王(沙喙部)===喙宮主 (대원신통의 宗)

① 1대 왕은 아들을 1대 갈문왕의 딸과 혼인시키고 갈문왕을 계승하니 2대 갈문왕이다.
② 1대의 갈문왕은 아들을 왕의 딸과 혼인시키고 왕위를 계승하니 2대 왕이다.
③ 2대 왕과 갈문왕은 1대와 같이 혼인상대를 교환하여 3대의 왕과 갈문왕을 배출한다.

왕의 아들은 갈문왕이 되고 갈문왕의 아들은 왕이 되는 이러한 체제는 특이한 계승체제의 원형이라 보는데, 昔氏 王代에 이와 대체로 유사한 계승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도식은 자체모순이 있다. 2대의 왕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모계 혈통을 따르면 沙喙部가 되어 部(母系)의 교대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요체는 모계의 교대와 왕위와 갈문왕의 교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평범한 4촌간의 交婚으로는 이런 二重의 교대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대를 비껴가는 叔姪간의 혼인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실제 석씨 왕대에 같은 세대 4촌간의 혼인보다 세대가 빗나가는 3촌, 5촌사이 숙질간의 혼인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83]. 석씨 왕대는 아니지만 입종갈문왕이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진흥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모계의 교대와 왕위와 갈문왕의 2중 교대를 한 원형과 가깝다.

이 4인의 핵심인물이 대체로 이와 같은 계승체제를 구성했다고 보지만 실제 이러한 도식과 일치하는 계승관계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왕이나 갈문왕이 자식을 낳지 못할 수도 있고 아들이나 딸만 낳을 수도 있다. 혼인에 있어서 반드시 족외혼이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母系의 族外婚을 지향하고 兩部가 대등한 세력균형을 위해 이런 계승체제를 가졌다고 본다. 이것은 남성인 왕과 갈문왕에 기준을 두었지만 실제는 양대 모계의 宗인 여인의 혈통을 기준으로 계승체제가 연결되어 나갔을 것으로 본다.

탁부와 사탁부가 왕위를 교대하고 왕과 갈문왕은 각기 자신의 部를 대표하는 지위를 겸했으며, 兩大 모계의 宗은 다른 모계의 남성과 혼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체제를 가정할 수 있다.

5. 『三國史記』와 『三國遺事』「王曆」에 나타난 兩大 母系集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왕력」에서도 양대 모계집단의 교대계승이란 사실을 볼 수 있다. 박혁거세왕비 閼英夫人이 김씨족 시조 김알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84]. 알영설화에 鷄龍이나 鷄嘴가 등장하는 등 유사한 점을 여럿 지적하지만, 필자는 알영의 탄생지를 沙梁里라고 한 점을 주목한다 [85]. 박혁거세를 탁부(대원신통), 알영을 사탁부(진골정통)라 가정하고 8대 아달라왕까지 양대 모계집단의 흔적을 찾아 본다 [86].(<표1> 참조)

표 1.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왕력」에 나타난 왕실계보 (1대-20대)
王名 王姓 王妃 王母 王妃 및 王母系譜
1 赫居世 閼英    
2 南解 雲帝 閼英  
3 儒理   雲帝 妃-日知葛文王의 딸, 許婁王의 딸(朴)
4 脫解     妃-南解왕의 딸, 母-積女國王의 딸
5 婆娑 史省(朴)   妃-許婁葛文王의 딸, 王-儒理王의 아들
6 祗摩 愛禮(金) 史省 妃-摩帝葛文王의 딸
7 逸聖   妃-支所禮王의 딸, 王-유리왕의 맏아들
8 阿達羅 內禮(朴) 妃-祗摩王의 딸, 母-支所禮王의 딸
9 伐休   母-只珍內禮, 王-탈해왕의 孫子
10 奈解 內禮 妃-助賁王의 누이 王-벌휴왕의 孫子
11 助賁 阿爾兮 玉帽 妃-奈解왕의 딸, 母-仇道갈문왕의 딸
12 粘解     王-助賁王의 동생
13 味鄒 光明 妃-조분왕의 딸, 母-伊柒갈문왕의 딸
14 儒禮   母-奈音갈문왕의 딸,
15 基臨   阿爾兮 王-伊飡 乞淑의 아들
16 訖解   命元 母-조분왕의 딸, 王-내해왕의 손자
17 奈勿 保反(金) 休禮(金) 妃-미추왕의 딸, 王-角干 末仇의 아들
18 實聖   禮生(昔) 妃-미추왕의 딸, 王-伊飡 大西知의 아들
19 訥祗 阿老(金) 保反(金) 妃-실성왕의 딸, 母-미추왕의 딸
20 慈悲   阿老(金) 妃-巴胡갈문왕의 딸, 母-실성왕의 딸

박혁거세를 왕을 배출하는 부계혈족집단, 알영을 왕비족, 즉 모계친족집단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87] 후대의 사실을 놓고 볼 때 처음부터 두 모계집단의 체계를 갖추고 출발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알영을 시조로 한 모계집단이 있었다고 보면, 박혁거세를 낳은 모계집단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88]. 이 경우 南解王妃 雲帝夫人은 박혁거세와 같은 모계집단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3대 유리왕비는 알영과 같은 모계가 된다. 『삼국유사』「왕력」은 유리왕비가 김씨임을 나타낸다 [89]. 大元神統은 이름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雜誌」 祭祀條에는 남해왕의 親妹 阿老에게 박혁거세의 四時祭를 주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로는 탁부의 女系始祖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아로가 남해왕의 친누이라는 기록이 문제되지만, 친누이라도 母系가 다를 수 있다. 더구나 『삼국유사』「왕력」은 아로부인이 남해왕의 딸이라 했으므로 더욱 그런 심증을 짙게 한다 [90]. 박혁거세이후 8대 아달라왕대까지 왕비의 모계가 두 집단으로 갈라지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5대 파사왕, 6대 지마왕의 왕비는 김씨고,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비는 박씨이다. 김씨와 박씨가 바로 교대하지 않는다. 비록 불안한 설정이지만 1, 3, 5, 6대 왕비가 김씨이고 2, 4, 7, 8대가 박씨로 추정할 수 있다. 4대 탈해왕비와 8대 아달라왕비는 각기 남해왕, 지마왕의 딸임을 볼 때 뒤에 보이는 왕가와 갈문왕가의 交婚이란 면이 드러난다. 9대 伐休王부터 시작되는 석씨왕대에는 兩大 모계혈통의 交代繼承 체제가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탈해왕의 直系系譜: 脫解王-仇趨-伐休王-伊買-奈解王-于老-訖解王

한 세대를 건너뛰어 한 사람씩 왕이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91]. 母系 半族社會에서 父子간은 모계혈통(部)이 다르나 祖-孫간은 같은 모계(同族)이다. 모계의 族外婚을 지켜 같은 집단끼리는 혼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祖父-高祖父가 한 집단에 속하고 父-曾祖는 다른 집단이 된다. 위 계보에서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못한 사람을 다른 部에 속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王妃나 王母도 두 집단으로 나뉘어지는지 보겠다.

탈해의 손자인 9대 벌휴왕은 母가 김씨라 했고 다음 10대 奈解王은 母가 內禮夫人으로 앞서 말했다시피 아달라왕비와 동일인물이다. 일단 朴氏王母로 지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 11대 助賁王은 母가 구도갈문왕의 딸 玉帽이며 김씨라 했다. 옥모는 화랑세기에서 진골정통의 祖로 불리고 있다. 이하 옥모의 후손들은 김씨로 보면 무방하다 [92]. 그러므로 옥모와 옥모의 아들 조분도 김씨다.

12대 점해는 助賁王의 동복아우라 했으므로 일단 김씨로 가정한다. 내해와 조분은 사촌간이면서 장인 사위관계이며 모계가 다르다. 다음 미추왕은 김씨로 알려졌지만 母가 박씨이므로 내해와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으며, 조분왕과는 장인 사위관계이다 [93]. 미추의 다음 代는 조분의 아들로 14대 儒禮가 즉위한다. 그런데 유례의 母는 박씨라 했는데 조분왕의 왕비라는 阿爾兮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94]. 15대 基臨王은 조분의 손자(父-乞淑)이며 아이혜의 아들이다 [95].16대 訖解는 내해왕의 손자이며 母가 조분왕의 딸이다. 앞서 조분왕비 중 내음갈문왕의 딸이라는 여인은 박씨라고 했으므로 訖解王母도 박씨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석씨왕조에서 왕모가 두 갈래의 혈통으로 갈라짐을 알 수 있다. 왕모의 계통을 박씨와 김씨로 나누었는데 王母는 왕의 계통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은 분석으로 석씨왕들의 모 계를 박씨와 김씨로 나누어 보았다.

벌휴(김)-내해(박)-조분(김)-점해(김)-미추(박)-유례(박)-기림(김)-흘해(박)

박씨와 김씨가 반드시 교대하는 상황은 아니나 거의 1대 1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왕의 모계를 분석하여 두 계통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왕비의 계통은 交婚의 관습으로 보아 모계와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분왕의 경우처럼 같은 모계와 혼인하고 그 자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내해왕비는 석씨라고 했지만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니 김씨로 봐야 하고 조분왕비는 김씨 아이혜와 박씨 O召부인 둘임을 확인했다. 미추왕비는 光明夫人인데 역시 김씨이다 [96]. 이후 유례, 기림, 흘해는 왕비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다 [97]. 이제 김씨왕조로 불리는 내물왕 이후를 보겠다.

내물왕은 석씨왕조와 별도로 권력을 찬탈한 새로운 세력집단이란 주장을 하는 연구자가 많지만 [98] 내물과 실성은 석씨왕조를 잇는 석씨 집단과 같은 계통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 실성은 外祖父가 昔登保라 했으므로 모계가 석씨임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내물의 장인이며 祖父인 味鄒왕 역시 석씨왕代의 한 인물로 봐야지, 따로 분리해 볼 수 있을 만큼 특별한 면모가 없다.

혹자는 미추와 내물 사이에 3대의 왕이 있었던 사실을 들어 미추와 내물사이 몇 代가 缺落되었다거나 [99] 석씨왕조와 김씨왕조가 별도로 존재했었는데 후세 사가들이 인위적으로 결합한 흔적이라 하는데 [100], 초기 왕실의 독특한 계승체제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억측일 뿐이다. 王曆을 보면 유리의 아들 逸聖이 3대를 隔한 뒤에 등극하고 탈해의 손자 벌휴가 4대를 거른뒤에 나타나며 내해의 손자 흘해가 5대가 지난 뒤에 왕위에 오른 사실과 비교하면 특이한 면이 거의 없다 [101]. 이런 점을 보면 내물과 실성은 석씨왕조代의 왕위계승체제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내물왕의 母는 김씨라고 했으므로, 박씨 흘해왕을 이어 다시 김씨모계를 잇고 있다. 奈勿王母 休禮夫人도 역시 석씨 왕가의 유력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내물왕의 아들이 어려 실성이 대를 이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후대의 해석일 뿐, 석씨왕들이 단 한번도 자신의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상속하지 않은 사실을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실성왕 역시 미추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실성이 내물왕 재위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갔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102]. 실성은 미추왕의 사위라는 자격보다 母系에서 자격을 가졌다고 본다. 실성의 母가 昔씨라는건 앞서 말했다시피 아달라왕비 내례부인을 잇는 박씨 모계이다. 모계는 김씨에서 박씨로 넘어 왔다.

그런데 다음 눌지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눌지왕 代에 중대변화가 발생한다. 『삼국사기』에 눌지왕은 실성을 죽이고 왕이 됐다 했고 『삼국유사』는 고구려군이 실성을 죽였다 했지만, 어쨌든 신라사 최초의 流血政變이라 볼만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눌지의 母는 保反夫人인데 진골정통계보에 없으므로 박씨로 추정해도 무방하다. 실성이 박씨 모계이니 정상적인 왕위계승체제를 이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내정간섭으로 신라 특유의 계승체제를 유지하지 못한 탓으로 볼 수 있 다 [103]. 아무튼 눌지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있다. 이 체제는 자비왕대에도 이어져 자비왕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시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박씨 여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兩大 母系體制가 와해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골정통계보의 여인이 석씨 代와 마찬가지로 1代씩 걸러 나타나므로 그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볼 상황은 아니다. 눌지왕비 阿老夫人과 소지왕비 善兮夫人이 진골정통이고 『삼국유사』「왕력」에는 慈悲王妃에 대해 巴胡葛文王 또는 未欣角干(미사흔)의 딸 [104] 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는 소지왕母가 김씨라고 해서 필자의 추정과 빗나간다 [105]. 후에 姓氏問題에서 다시 거론하지만 이 姓氏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修正, 加筆이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므로 절대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106]. 따라서 소지왕의 母는 박씨로 보아야 한다. 앞서 정리한 석씨왕대 이후 왕력에서 박씨모계와 김씨모계로 구분하여 『화랑세기』에 나타난 지증-진평간의 대원신통, 진골정통 교대계승 상황과 연결해 본다.

벌휴(김) - 내해(박) - 조분(김) - 점해(김) - 미추(박) - 유례(박) - 기림(김) - 흘해(박) - 내물(김) - 실성(박) - 눌지(박) - 자비(김) - 소지(박) - 지증(김) - 법흥(박) - 진흥(김) - 진지(박) - 진평(김) [107]

두 갈래의 모계혈통 집단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8]. 필자의 분석이 명확한 근거에 의해 나오지는 못했지만 두 집단이 왕과 갈문왕을 맡고 왕위와 갈문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체제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이러한 구도가 이어져 왔다고 보지만 눌지왕 이전과 눌지왕 이후가 명확히 구분되는 점은 분명하다. 눌지왕 이후부터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눌지왕 이전에는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바로 넘길 수 없는 체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보지만 『삼국사기』에 눌지왕부터 마립간으로 王號가 변하는 점, 그리고 이사금이 "나이 많은 사람" 이란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주목한다. 2대 王系의 인물 중 나이 많은 사람순으로 왕위에 오르다 보니 父子 直系繼承이 가능하지 않았던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109]. 두 갈래의 王系때문이기도 했겠지만 父子間의 혈연의식이 후대처럼 강하지 못했던 이유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6. 여왕의 등극

三國 중에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을까? 하는 문제도 학계의 오랜 과제가 되어 왔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에서 여성의 권위가 낮지 않았다는 점을 반영한다고도 하고, 골품제란 폐쇄적인 신분제로 인해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기형적인 현상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역시 모계혈통체제에 의한 결과가 아닌가 추정한다. 황남대총과 서봉총 등 夫婦合葬墓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의 묘에서 金冠이 나왔다. 그 시대에 여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모계혈통으로 왕위계승이 결정되었다고 보면 그 시대에 여성이 금관을 쓰는 일이 크게 이상하지 않다. 『화랑세기』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신분이 낮은 상태의 부부가 많다 [110]. 신분이 높은 여인과 혼인함으로서 자신의 신분도 처의 신분과 대등한 상태로 유지하거나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듯한 움직임이 보인다. 모계혈통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더라도 모계의 최고혈통으로 정상적인 왕위계승을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나, 왕비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으로 왕이 된 경우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성골과 진골이 뚜렷이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지만 聖骨身分내에도 서로 간에 격차가 있었음이 나타난다. 특히 사서에 모계나 부계에 대한 기록이 뚜렷하지 않은 채 前王의 사위라는 자격이 강조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탈해나 미추, 내물, 실성 등이 그렇다. 남편인 왕은 왕비와의 혼인이 깨어지는 순간 신분이 하락하고 만다. 그래서 표주박형고분(瓢形墳)이 생겼을 것이다 [111].

6세기후반경부터 7세기전반기의 신라 최상층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화랑세기』는 왕실이 사실상 "여인천하"라고 할만큼 여성들이 모든 정치를 전횡하고 있는 실태가 보인다. 신라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진흥왕대, 왕실은 왕의 母后 只召夫人과 王妃 思道夫人, 왕의 총애를 받던 美實 등 왕실여인들이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 이 경우는 조선시대 왕권이 약화된 상태에서 왕실의 여인들이 암투를 벌인 상황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성골 혈통의 중심인 宗의 신분을 가진 여인들은 남성인 왕에 못지않은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宗의 신분을 가진 여인들이 실제 왕으로 불렸거나 금관을 썼는지는 추정할 근거가 없다.

이제 선덕여왕의 등극과정을 화랑세기에서 찾아본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아들이 없어 여왕이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으니 소지왕도 아들이 없었으나 再從간인 지증왕이 대를 이었고, 법흥왕도 아들이 代를 이은게 아니라 외손자이자 사위가 대를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앞서 아들이 없어도 사위나 외손자 또는 조카가 대를 잇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골이 대가 끊겼다는 대목에서도 성골의 실체에 대한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과연 당시에 성골신분의 남성이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화랑세기』에서는 다른 일면을 전하고 있다. 앞서 한번 거론했다시피 진평왕은 아들이 없는 상황을 고려해 진지왕의 아들인 龍樹나 龍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는 것이 다 [112].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나 용춘에게 왕위계승의 결격사유는 찾을 수 없다. 진평왕은 처음 맏이인 용수에게 마음을 두고 자신의 딸 天命을 용수와 혼인시켰으나 용춘이 여러 모로 능력에서 형을 능가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평왕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두 딸 천명과 善德을 앞에 두고 이 같은 의중을 비추고 양보하라고 한다. 천명은 이미 용수와 혼인한 사이였기에 순종하고 出宮하였지만 선덕은 그러지 않고 용춘이 자신을 도와 줄수 있다고 하고 私臣이 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113]. 자신을 돕는다는 말은 남편이 되어 자식을 낳고 혈통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뒤이어 자식을 낳지 못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는 대목이 이어지는데 용춘이 선덕의 夫君(남편)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는 형태, 곧 사위왕의 경우를 희망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진평왕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두 공주에게 양보할 것을 권했다는 것은 공주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왕이 된 사례가 한번도 없었다면 진평왕이 공주에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앞서 법흥왕대 태자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도 이미 시집간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공주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었고, 그에 앞선 시기에도 여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암시한다.

또 하나는 만일 선덕의 의도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또 한 사람의 사위왕인 "龍春王"이 탄생했을 것이라는 정황이다. 결과적으로 以前의 사위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선덕이 자식을 낳지 못해 혈통을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평왕이 진골정통이고 용춘이 대원신통인 점은 兩部 교대계승의 상황과도 부합한다. 진평왕이 천명과 선덕에게 양보를 구한 것은 두 공주가 왕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모계혈통문제로 어떤 결정권이나 자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4].

탈해나 조분, 미추, 내물, 실성 등 前王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이 된 경우는 실제로 표면에 드러난 왕들과의 관계를 나타내었기에 사위관계를 주목하는 것이지, 앞서 필자가 피력한 왕위계승체제를 따른다면 대부분의 왕이 前王이나 갈문왕의 사위가 될 수 밖에 없다. 혈통의 기준은 여성(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宗)이었기에 그 여성과의 관계가 어떤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위는 男性인 왕보다 宗이라는 여성과의 관계가 어떠했는가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용춘이 왕위를 계승했다면 진지왕의 아들이란 父系가 있기에 진평왕의 사위라는 신분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선덕은 마야왕비를 잇는 진골정통의 宗이다. 이 宗과 혼인하는 사람은 왕이나 갈문왕이다. 용춘이 선덕과 관계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해 그 지위에서 물러나고 선덕은 다른 남성을 찾고 있다. 단순한 혼인문제가 아니라 자식을 낳아 혈통과 家系를 계승하는 일이 또한, 당사자의 신분을 결정하는 한 요인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眞德女王은 화랑세기에서 그 家系가 나타나지 않고, 『삼국사기』에는 父가 진평왕의 아우 國飯갈문왕, 母가 박씨 月明夫人이라 했는데 [115] 사도부인을 이은 대원신통의 宗일 것이다. 선덕, 진덕 두 여왕은 각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혈통기준인 宗의 신분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선덕이나 진덕이 여왕이란 이름으로 史書에 남게 된 것은 두 여인이 모두 자녀를 낳지 못해 후계가 단절되었던데 기인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 시대의 實勢들인 김춘추, 김유신이 여론을 감안해 어떤 형식요건을 갖추기 위해 진덕여왕을 추대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든 두 여왕의 등장은 신라의 독특한 왕위계승체제나 사회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양대 모계체제가 끝나고 갈문왕이 사라지며, 왕위는 한동안 부계의 직계계승이 이루어진다. 통일전쟁기를 전후하여 신라사회의 외부문화 흡수와 이에 따른, 신라사회의 변화가 二部體制(聖骨王時代)의 종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7. 金哲埈의 二部體制

신라 왕실의 母系問題는 그 동안 많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어 온 바이다. 특히 末松保和등 日人學者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이 문제는 金哲埈에 이르러 뚜렷한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후속자료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음으로 인해 연구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90년대 이후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연구자도 골품제 연구자료등 에 있어서 모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하지만, 왕위계승체제 등 구체적인 부분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지면의 부족으로 여기서 모계문제 연구자료를 모두 거론하지 못한다.

『화랑세기』의 모계혈통체제를 분석한 결과, 이 시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金哲埈의 二部體制論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신라의 모계문제를 막연히 혈통의 문제로 제기했을 뿐이지만 김철준은 하나의 體制로 인식하고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1952」에서 밝힌 바는 주로 외국의 인류학 연구자료를 응용해 2개 半族集團이 신라 지배층을 구성하였음을 시사하였으니 [116], 2개 반족집단을 각각 박씨 집단과 김씨 집단으로 지목하였다. 그 후 中古期 왕실에서 김씨 왕족과 박씨 왕비족이 형성하는 二重繼承體制, 즉 Double Descent이론을 제기했다 [117]. 먼저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박씨 집단과 알영부인을 시조로 한 김씨 집단이 혼인관계로 결합되어 二部體制를 형성했으며, 중고기에는 박씨 왕족과 김씨 왕비족이라는 2개 집단이 하나의 계승체제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皮瑛姬(1979)는 이 Double Descent이론에 대해 더욱 세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118]. Double Descent이론을 전체 신라사에 확대 적용하여 모계문제에 대한 해석을 기한 것이다. 그 결과 무열왕대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中代를 제외하고 전 시기에 걸쳐 모계에 의한 왕위계승이 있었으며 아울러 Double Descent적인 면이 고찰된다고 하였다. 二部體制를 약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① 상호 대립하고 경쟁하는 2개 집단이 혼인관계로 하나의 집단체제를 형성한다.
② 二部體制의 탄생은 한 집단의 분열에 기인한다고 보지만 서로 이질적인 집단의 결합 즉 토착인과 이주민 집단간의 결합에 의한 탄생으로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③ 외부에서 볼때는 한 집단인데, 내부에서는 서로를 철저히 구분하여 다른 집단임을 믿고 있다.
④ 혼인에 있어서 2개 집단의 계속된 交婚을 지속해 간다. 그 중에서도 4촌 범위내의 근친혼이 주류를 이룬다.
⑤ 고대문명단계에 세계 각지에 전파된 보편적인 사회체제이다.
⑥ 지배계급만이 2부체제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⑦ 半族社會 [119] 또는 二元化社會로 불리기도 한다.

『화랑세기』에는 2개의 모계집단이 왕위를 교대하며 지배층 사회 전체를 二元化하며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면도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金哲埈의 二部體制와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신라의 이러한 독특한 계승체제나 혈통관념은 인류사회 발전과정의 한 형태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半族社會가 특이한 家系繼承과 혼인형태를 가진 것은 근친혼을 방지하면서 순수한 혈통을 유지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세기』에도 모계의 族外婚을 지향했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族內婚도 드물지 않았으니, 이 결과는 엄격한 족외혼의 규칙이 없었던 연유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족외혼의 원칙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보겠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혼인형태에 대해 더 세밀한 연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金哲埈 등의 모계문제 연구에서 아쉬운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王室系譜와 혼인관계만을 참조했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화랑세기』를 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인물계보와 혼인관계는 자료가 전승되면서 유교적 사고를 가진 後世人에 의해 加筆 또는 故意 누락이 있었을 정황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화랑세기』를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VI. 姓氏와 母系血統體制

1. 최초의 金氏와 朴氏

신라인들이 母系 또는 女系로 혈통을 구분하고 인식했다면 史書에 나타난 朴씨나 金씨 昔씨 등 姓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필자는 『화랑세기』의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바로 喙部와 沙喙部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박씨와 김씨라는 모계의 姓이 나타난다고 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초기부터 박씨나 김씨 등 姓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6-7세기대의 금석문에는 姓을 볼 수 없다. 중국사서에 처음으로 진흥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120].

진흥왕이 김씨성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 姓이 바로 확산되어 신라 왕족이 일제히 姓을 사용하였거나 일반화된 건 아닐 것이다 [121]. 진평왕대(598년) 작성된 남산신성비에도 여전히 성이 보이지 않고 탁부와 사탁부라는 部名이 기록되고 있다.

어쨌든 진흥왕이 金氏 姓을 선언한 사실은 신라사 전체의 姓氏 문제와 현재 한국인의 성씨에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시발점이라 여겨진다. 『화랑세기』에서 진흥왕은 진골정통임을 나타내고 있다 [122]. 앞서 진골정통이 沙喙部임을 주장했는데 이제 진골정통과 사탁부가 바로 金氏집단임을 말하고 있다 [123].

진골정통=사탁부=김씨족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혈통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朴氏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기존사서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필자는 진흥왕비 思道夫人이 최초의 박씨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도부인은 대원신통으로 진흥왕과는 소속 집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沙喙部와 喙部 중 喙部가 먼저 생기고 沙喙部는 喙部에서 분화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大元神統도 『크고 으뜸이며 神의 계통』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眞骨正統보다 높은 혈통을 의미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喙部이며 대원신통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대원신통 진골정통은 모계혈통이고 姓은 부계혈통으로 반대의 혈통관념이기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 中古期의 많은 인물이 기록에 따라 성이 다른 이유를 알 수 있다 [124].

신라인이 모계로 계승하는 혈통관념을 가졌다면 중국식의 姓氏制度를 도입했더라도 혈통 관념이 하루 아침에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는것은 불가능하다. 진흥왕대 喙部가 박씨, 沙喙部가 김씨를 선언하면서 한동안 이 姓은 모계로 전승되다가, 점차 부계로 전환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진흥왕의 혈통은 당시의 혈통관념으로는 시조 박혁거세와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은 시조와 다른 성을 채택했다고 본다. 어쨌든 金이라는 姓이 탄생하는 시점, 이 김씨는 진흥왕이 속한 모계혈통 즉 沙喙部(진골정통)를 가리키는 혈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신라 시조 설화중 왕비 閼英夫人설화는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鷄龍, 鷄嘴, 閼智居西干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알영이 沙梁里에서 태어났다고 한 점이다 [125]. 건국시기부터 喙部(梁部)와 沙喙部(沙梁部)의 혼인형태의 결합으로 국가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박혁거세의 母 娑蘇설화 [126]도 삼국유사에 보이므로 始祖母설화를 가진 2대 모계집단에 의해 신라가 형성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127].

그럼 『삼국사기』「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에 기록된 金閼智 탄생설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때 태어난 김알지가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탈해왕의 대를 이은 파사왕은 왕비가 김씨 史省夫人인데 탈해왕 9년에 태어난 알지는 파사왕 원년에 13살이 될 뿐이다. 딸을 낳아 파사왕과 혼인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또 사성부인의 父가 탈해가 아니고 허루갈문왕이라 했다. 다음 지마이사금대 기사에 등장하는 김씨 愛禮夫人도 알지의 후손으로 보기 어렵다. 알지가 46세쯤에 해당하나 父가 摩帝葛文王이므로 알지의 손녀라고 보기도 어렵다. 閼智이전에 김씨로 지칭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탈해왕대의 김알지탄생설화는 김씨 시조와 관련없는 시조 조작인가?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정황이 또 있다. 仇道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화랑세기』에서 진골정통 집단의 시조가 玉帽인데 부계혈통관념으로 전환되면서 남성시조를 찾게 되고 자연히 옥모의 아버지 구도에 대한 시조관념이 생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구도의 출생시기가 김알지 탄생설화가 생겨난 시점과 대체로 일치하므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仇道는 『삼국사기』「신라본기」아달라이사금 19년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탈해의 손자 伐休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64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탈해의 재위 중에 구도가 출생하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사서에 등장하는 김씨 시조설화는 박혁거세왕비 알영 설화와 진골정통의 남성시조인 구도설화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구도 이전의 김씨와, 구도로부터 내려가는 진골정통간에 혈통의 直系的 연결은 없었다고 보더라도 후대의 진골정통집단은 仇道 以前의 같은 혈족집단속에서 나왔을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진골정통의 시조 옥모가 출생하기 전에도 진골집단이 있었다는 『화랑세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2. 『삼국사기』및 『삼국유사』초기 기록의 姓

진흥왕대 진흥왕과 사도부인이 각기 김씨와 박씨라는 최초의 姓을 사용하였다고 본다면 진흥왕대 이전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떤 경로로 姓이 붙여졌는지 추적해 보겠다. 시조 박혁거세는 喙部, 알영부인은 沙喙部였기에 진흥왕은 시조와는 혈통이 달랐고 사도부인의 혈통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박혁거세와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초기 왕들은 자연히 박씨 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진골정통의 시조인 구도와 그 후손들 은 김씨성을 가지게 된다. 구도의 아들로 알려진 미추와 미추의 조카로 알려진 내물이 김씨가 되고, 내물 이후는 왕위의 직계계승이 이어지니 내물은 중시조역할을 하게 된다.

5대 파사왕의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며 허루갈문왕의 딸이라 했다 [128]. 앞서 탈해왕대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지만 김알지가 허루갈문왕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김알지 탄생 이전에 태어난 인물을 金이라는 성을 붙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김씨란 성을 가진 인물은 沙喙部이며 眞骨正統에 앞선 진골집단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씨집단인 구도와 미추, 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박씨나 석씨 왕조에 왕비로 등장하는 김씨 여인들은 역시 沙喙部(진골)소속이란 이유로 김씨 성을 부여했다고 본다 [129].

앞서 필자는 벌휴왕대부터 진평왕까지 모계혈통이 두 갈래로 뚜렷이 갈라짐을 들어 모계 의 姓을 박씨와 김씨로 나누었다. 『삼국사기』의 姓氏 기록과 『화랑세기』의 모계계보를 절충하고 빠진 부분을 교대계승이란 점으로 가정하여 9대 벌휴왕대부터 왕들의 王母姓을 추정해 본다.

벌휴(김) - 내해(박) - 조분(김) - 점해(김) - 미추(박) - 유례(박) - 기림(김) - 흘해(박)- 내물(김) - 실성(박) - 눌지(박) - 자비(김) - 소지(박) - 지증(김) - 법흥(박) - 진흥(김) - 진지(박) - 진평(김)

벌휴, 내해, 조분, 미추, 유례, 내물, 지증, 진흥, 진지, 진평은 실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의 王母姓과 일치한다. 『화랑세기』 진골정통계보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필자의 분석과 기록이 어긋나는 母姓은 소지왕이 있는데 소지왕은 王母의 부계(미사흔의 딸)가 명확하므로 후대 기록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수정되었을 가능성을 거론했다.

<표2> 삼국사기(삼국유사)의 姓과 화랑세기에 분류된 모계혈통
이름 삼국사기(삼국유사)의 姓 화랑세기의 母系 비고
玉帽夫人 김씨 진골정통  
鳥生夫人 김씨 진골정통  
延帝夫人 박씨 대원신통  
保道夫人 박씨* 진골정통 *화랑세기와 다름
只召夫人 김씨 진골정통 *삼국사기를 따름
思道夫人 박씨 대원신통  
知道夫人 박씨 대원신통  
萬呼夫人 김씨 진골정통  
摩耶夫人 김씨 진골정통  

위의 <표2>는 『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혈통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인들의 姓을 대조한 것이다. 법흥왕비 保道夫人을 제외하고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130]. 이 성씨 기록들이 후대 전승과정에서의 오류가능성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일치만으로 "당시의 姓은 모계혈통이다." 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화랑세기』에서 대원신통계보를 알 수 없으므로 주로 진골정통 위주의 분석을 했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부터 일관되게 나오는 김씨와 박씨 여인들을 혈통이 연결되는 같은 집단으로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사서에서 말하는 박씨, 김씨와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혈통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131].

그렇다면 남성인 왕들의 姓은 왜 모계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을까? 먼저 왕들의 姓을 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혁거세(박), 석탈해(석), 벌휴(석), 조분(석), 미추(김), 내물(김), 지증(김) 등 聖骨時代 왕들에게 이 정도의 姓氏 기록만 남기고 있고 『삼국유사』는 대체로 부계의 성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모계의 성이든 부계의 성이든 이 성씨 기록은 모두 후대 사서기록자가 소급해 기록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왕들의 계보는 각 始祖와 부계 연결이 명확한 만큼 始祖의 姓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나 王母 등 여성들은 시조와 부계가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런 여인들이 『화랑세기』에서 확인되는 모계혈통과 일치하는 성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모계의 姓이 사용되었다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왕실여인도 아니고 왕도 아닌, 기타 인물들의 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삼국사기』「열전」에 많은 신라인의 人名이 있지만 성이 기록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성이 기록된 사람은 대부분 왕들과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32].

金后稷(지증왕의 증손), 昔于老(내해왕의 아들), 朴堤上(파사왕의 5대손), 金歆運(내물왕의 8대손),

이 인물들의 성은 왕들의 성에 기초하여 부계로 연결한 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성들의 성에는 모계의 성이 반영되지 않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異斯夫, 堤上, 圓光, 異次頓 등 기록에 따라 姓을 달리 기록하거나 애매한 경우는 성을 소급하여 적용하다보니 생겨난 착오라고 볼수도 있지만 모계의 성을 적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이차돈과 이사부의 姓을 추적해 본다.

『삼국유사』제3권.「興法」염촉멸신조 - 內養子,姓朴字厭壻,(중략)其父未詳,祖阿珍宗,卽習寶葛文王之子也, (중략) 又按金用行撰阿道碑,舍人時二十六,父吉升祖功漢,曾祖乞解大王

이차돈의 姓이 박씨이며 祖父가 阿珍宗이고 習寶갈문왕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알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대신 阿道碑에는 아버지가 吉升, 조부가 功漢, 증조부가 乞解대왕이라는 다른 계보를 附記했다. 이에 대해 아진종과 습보는 외가쪽 계보이고 길승, 공한, 걸해대왕은 부계라는 주장이 있다 [133].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진종이 조부라면 바로 외조부임을 알 수 있다. 阿道碑에 나온 계보를 부계계보로 봐야 한다 [134]. 그렇다면 이차돈은 성이 昔씨여야 한다. 습보갈문왕이 부계라면 김씨가 돼야 한다 [135]. 그런데도 그의 성이 朴이란 건 그의 모계가 대원신통(탁부)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얻은 성임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와 단양적성비에 그 근거가 있다. 이차돈의 외조부가 아진종이라 했는데, 『화랑세기』에는 異斯夫(苔宗)가 바로 이 아진종의 아들이라 했다 [136]. 이사부와 이차돈은 모계가 같으므로 姓이 같아야 한다 [137]. 단양적성비에 나오는 喙部 伊史夫智를 동일인물로 본다면 이사부의 姓은 박씨가 되어야 하고, 이차돈과 모계가 같으므로 이차돈도 박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昔氏王과 兩大 모계집단

姓氏問題에서 脫解王의 후손 昔氏를 빼놓을 수 없다. 김씨와 박씨 兩大 母系集團으로 구성된 초기 신라왕실에서 석씨는 어떤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석씨는 따로 집단을 형성했다는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昔氏가 실제 사용된 성이 아니고 後世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姓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138]. 진흥왕대에 姓이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그 이후 姓이 본격 사용된 시기에 昔姓은 보이지 않는다. 성이 없던 시대에 태어나고 성이 본격 사용된 시기에는 보이지 않으니 기록상의 姓이라 추정한다.

석씨가 내물왕 이후 김씨에게 완전히 멸족되었다는 어떤 근거도 없고 석씨와 김씨가 교대하는 상황에서 어떤 유혈사태의 흔적도 없다. 오히려 실성왕과 이차돈 등 석씨왕족들과 혈연이 연결되는 사람이 있다.

앞서 거론했다시피 『화랑세기』를 따르면 진골정통계보는 석씨왕조의 開始期에 탄생하여 김씨왕조에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또 김씨모계의 반대편에는 박씨 왕비들이 존재하고 있다. 석씨왕조대에 昔이라는 성이 부여된 왕비는 11대 내해왕비가 유일하다. 그런데 내해왕비는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라 했다 [139]. 조분왕이 석씨이니 내해왕비도 석씨로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다른 석씨왕들은 오직 석탈해와 부계 계보가 연결된다고 姓을 같이 기록했을 뿐이다.

석탈해도 신라 시조중의 한 인물로 볼 수 있지만 昔氏 성을 가진 인물들은 2부체제 속에 속한 인물로 보아야 할 뿐, 박씨 집단이나 김씨 집단과 달리 세력을 형성한 별도의 세력집단이라고 볼 여지는 찾을 수 없다.

앞서 석씨 왕조대에 완전한 2부체제를 형성했고 박씨 왕비족과 후대 진골정통계보와 연결되는 김씨 왕비족이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고 했다. 탈해라는 시조가 등장하고, 그 시조에게 昔氏 姓을 부여하므로써 시조와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왕들에게도 昔이라는 성을 부여한 것이 이른바 석씨 왕조라는 것이다. 김씨나 박씨왕들도 마찬가지다. 앞서 여성들의 姓이 母姓을 따랐다고 했듯이 당시에 사용된 姓은 母姓이었고 부계혈통관념을 가진 후손들이 부계조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父姓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4. 朴, 昔, 金 등 姓氏 사용 이전의 姓

성씨문제에서 또 하나 짚고 갈 것은 이들 박씨와 김씨 모계집단이 朴이나 金이라는 姓을 사용하기 전에는 어떻게 혈통을 구분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部體制 문제에서 언급했지만 금석문에 보이는 部가 바로 姓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가 하는 혈통의 주체만이 다를 뿐, 같은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部가 姓과 같이 혈통구분에만 사용되고 다른 역할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部는 같은 혈통으로 구성된 집단을 지칭함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 5호16국시대 중국내륙에 진입한 여러 塞外民族들이 자신들의 部名을 후에 姓으로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40]. 중국한문을 빌려 쓴 신라인들이 중국에서 쓰는 部의 用例를 달리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무리한 사고이다. 沙喙部, 喙部, 本彼部, 斯彼部 등 이런 部가 바로 姓이라는 것이다 [141]. 다만 탁부와 사탁부가 모계의 姓임을 주장하지만 본피부와 사피부 등 다른 部 집단도 모계로 혈통을 구분하였는지는 알길이 없다 [142].

『화랑세기』에 7세 풍월주 薛原郞의 아버지 薛成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薛이란 성을 사용하는데 이상하게도 자식에게는 자신의 薛씨 姓을 그대로 물려주어 부계계승을 하고 있다 [143]. 骨族으로 불리는 신라왕실은 모계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설성에게 母姓을 내렸지만 薛씨 집단 자체는 부계계승관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원랑의 世系」에는 薛成이 활동할 즈음 이미 薛優輝라는 사람이 及干 [144] 이란 관직에 있었다고 했다. 특히 설성의 어머니 선조를 高耶村長 虎珍公의 후손이라 했으므로 설씨는 習比部에서 나왔다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6부 시조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상황은 화랑세기가 기록될 시점에도 姓氏와 혈통계승에 있어 모계와 부계의 혼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5. 신라의 始祖

신라인의 시조는 사서 기록으로는 朴赫居世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에 왕이 바뀔때마다 始祖墓나 始祖祠堂을 참배했다는 내용 [145]에서의 始祖에 대해 박혁거세가 아닌 김알지나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아닌가고 말하고 있다 [146]. 김씨가 왕이 되고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데 다른 姓氏의 시조를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계혈통 체제로 보면 후대 김씨 왕족이 박혁거세를 시조로 믿고 있었던 사실이 이상하지 않다. 앞서 김씨집단의 모계시조는 閼英부인이라 했으므로, 알영부인이 어머니면 박혁거세는 아버지일 뿐이다.

부계혈통관념으로는 박혁거세가 시조이다. 사탁부가 탁부에서 갈라져 나오고 박씨 김씨 모계집단이 半族社會의 한 갈래라면 박씨와 김씨를 묶어 하나의 種族으로 보는 인식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147]. 양대 모계집단을 骨人이라 부르고 양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骨이란 말이 이 양대 집단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인이 기록한 금석문에는 나타난 또 하나의 始祖가 있으니 星漢이다. 문무왕碑, 김인문碑, 흥덕왕릉碑, 眞徹大師塔碑, 眞空大師塔碑 등에 한결같이 시조를 星漢, 漢王, 또는 聖韓이라 했다. 이 星漢이 누구인가에 대해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조 기사에 김알지의 아들로 나오는 勢漢에 비정하여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다 [148]. 하지만 필자가 앞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김알지는 미추왕의 아버지 仇道를 粉飾한 인물이다 [149]. 하지만 勢漢-阿道-首留-郁甫 이 계보가 구도의 윗대 선조계보일 가능성도 높다. 勢漢 과 星漢을 같은 인물로 보고 다른 실마리를 찾아 본다. 눌지왕때 활약한 박제상의 계보가 있다. 눌지왕과 박제상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눌지왕계보와 파사왕의 5대손이라는 박제상의 박씨계보를 비교해 보겠다.

내물왕계보; 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눌지
박제상계보: 혁거세-남해-유리-파사-아도-(미상)-물품-제상 [150]

눌지왕은 勢漢의 7대손, 제상은 혁거세의 7대손이다. 그래서 星漢을 혁거세의 다른 이름이란 주장이 일찌기 末松保和에 의해 제기되었다 [151]. 알영부인이 김씨족의 모계시조라면 박혁거세는 부계시조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이 견해는 주목할만하다. 혁거세는 박씨족(모시조인 동시에 신라의 건국시조다. 이에 대해 건국시조일 뿐, 김씨족과는 아무런 혈통적인 연관이 없다는 일반론이 있지만 박씨 집단이 김씨 집단과 主活動期間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들과 혈통의 연관이 없는 박씨시조를 건국시조로 삼을 리는 없다. 소지왕때 시조가 태어난 奈乙에 神宮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고 [152] 왕이 새로 즉위할때마다 시조묘나 神宮, 시조사당을 참배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시조가 혁거세가 아닌 다른 인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조를 알지, 미추, 내물, 성한 등으로 비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153]. 후대 부계혈통관념의 소산으로 봐야 한다. 『삼국사기』「雜志」祭祀條에는 혜공왕대 五廟를 세우면서 미추왕을 金姓 始祖로 포함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도 진골정통의 독주체제가 굳어지면서 김씨족만의 시조관념이 생겨난 흔적으로 본다. 미추왕은 필자의 분석으로 보면 母가 박씨라고 했으므로 진골정통이 아니다. 그러나 진골정통의 남성시조인 구도의 아들이며 왕이었으므로, 부계적 관념에서 새로이 인식된 시조로 볼 수 있다.

VII. 金庾信家의 진골귀족 편입

금관가야출신인 金庾信家는 어떻게 신라에서 高官貴族이 되고 지배층에 합류할 수 있었는가? 폐쇄적인 혈통위주 신분제로 외부혈통의 진입을 철저히 봉쇄해온 신라왕실이 어떻게 금관가야 仇衡王 一族만은 선뜻 받아들여 지배층에 합류시켰는지, 기존자료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화랑세기를 통해서만 해명된다. 화랑세기는 모계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됨을 나타내고 아울러 금관가야 왕실이 신라에 歸附하기 오래 전부터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신라왕실과 같은 모계혈통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신라인의 血統觀으로는 금관가야왕실이 신라왕가와 같은 혈통이었기에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158쪽) 世系는 <표3>과 같이 금관가야가 6대 좌지왕대부터 신라의 골품있는 여자를 왕비로 맞기 시작했다고 한다.

<표3>『花郞世紀』 「庾信公」條 世系의 금관가야 王妃系譜
왕력 왕비 王妃의 父(祖) 왕비父의 官職 왕비(父)의 國籍
1대 수로왕 黃 玉     * 黃龍國
2대 거등왕 慕 貞 申 輔 泉 府 卿  
3대 마품왕 好 仇 趙 匡(조부) 宗 正 監  
4대 거질미왕 阿 志 阿 躬 阿 干  
5대 이품왕 貞 信 克 忠 司 農 卿  
6대 좌지왕 福 壽 道 寧 阿 飡 新 羅
7대 취희왕 仁 德 進 思 角 干 新 羅
8대 질지왕 通 里 美海公 ? (내물왕아들) 新 羅
  邦 媛 金 相 沙 干 金官國?
9대 감지왕 叔 氏 出 忠 角 干 新 羅
10대 구형왕 桂 花 桂 鳳   ?

이 내용과 『삼국유사』「가락국기」의 가야왕력을 비교하면 풀리는 의문들이 있다. 「가락국기와 人名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가락국기」만 봐서는 가야왕실이 왜 김씨나 박씨 등 신라 姓을 사용하는지, 왜 신라와 같이 왕비의 家系를 빠짐없이 기록하는지, 왜 신라와 官職名이 같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용이 類似한 『화랑세기』「유신공 世系」(<표3> 참조)를 보면 그 의문들이 대체로 해소되고 있다.『화랑세기』는 이에 대해 금관가야가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므로 왕의 장인(왕비의 父)이 신라와 같은 관직을 가진 이유가 드러난다. 또 가락국기의 좌지왕대 기사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역시 『화랑세기』「15세 유신공 世系」의 좌지왕에 관한 기사를 비교해 보겠다.

『삼국유사』「가락국기」 坐知王條 - 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3년에 왕위에 올랐다. 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벼슬아치로 삼았으므로 국내가 소란스러웠다. 신라가 꾀로써 가락국을 치려했다. 이 때 가락국에 朴元道란 신하가 있었는데 좌지왕게게 간했다. "遺草를 열람하고 열람해도 또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입니까! 질서가 문란해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되겠습니까. 또 복사가 점을 쳐서 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을 제거하면 군자인 벗이 와서 합심할 것이다.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왕은 사과했다. "그 말이 옳다." 傭女를 물리져 荷山島로 귀양보내고 그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15년 永初 2년 辛酉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道寧大阿干의 딸 福壽며 아들 吹希를 낳았다.

『화랑세기』「庾信公」世系, (156-158쪽) -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도령아찬의 딸 복수를 보내어 아들 취희를 낳았다. 금관에서 우리나라 여자를 황후로 삼는 것이 이로서 비롯하였다. 취희가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서 執政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다.

두 기록은 비슷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데 「가락국기」만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화랑세기』와 대조를 하면 좌지왕은 신라 여인을 왕비로 삼으라는 신라의 권고를 무시하고 자국 여인을 맞았거나, 타국의 여인 傭女를 맞았던 것이다. 신라는 금관국이 신라 여인을 받아 주지 않는데 격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이에 금관국 내부가 친신라파와 반신라파로 양분되어 소란해진다 [154]. 좌지왕은 결국 신라와 친신라파의 위협에 굴복하여 왕비 용녀를 귀양보내고 道寧大阿干이란 신라 고관의 딸을 왕비로 맞으며 신라의 附庸國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락국기」는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았다는 구절이 전혀 없지만 가야에 김씨와 박씨가 있는 점, 왕의 장인(왕비의 父)이 신라와 같은 관직을 갖고 있는 점, 가야왕력이 신라와 같이 왕비의 家系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점을 보면,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았다는 『화랑세기』의 내용에서 의문이 해소될 수 있다. 「가락국기」는 『화랑세기』와 유사한 원전을 인용했고, 그 중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는 내용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흔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화랑세기』의 이 대목은 「가락국기」의 의문을 해소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김유신가문이 어떻게 엄격한 골품제 체제의 신라에서 진골귀족에 편입되고 신라지배층에 합류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해소하고 있다. 법흥왕 19년(532) 금관국 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귀부한 뒤 그 아들 무력이 角干이란 고위직을 차지하며 진골귀족에 편입되고 손자 김유신이 왕위에 준하는 반열에까지 오른 배경은 신라왕실이 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혈육으로 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왕실에서 비록 王女는 아니지만 高官의 딸을 금관국에 시집보냄으로서 신라 왕실은 금관국 왕족에 대해 같은 혈육이라는 동질성을 가졌던 것이다.

단양 적성비에 등장하는 沙喙部 武力智阿干支는 김유신의 조부 무력으로 보고 있다. 무력이 沙喙部라는 것은 그가 신라에서 사탁부라는 행정구역에 자리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금관가야에서 태어날 때부터 사탁부라는 모계혈통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다 [155]. 그래서 금관가야 왕족은 진골귀족이 되고, 진흥왕과 같은 진골정통이며, 사탁부이기에 진흥왕과 같은 金氏姓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156].

단양 적성비에 보이는 또 다른 인물, 沙喙部 設智及干支도 마찬가지다 [157]. 도설지는 대가야의 마지막왕으로 알려져 있다 [158]. 그런 도설지도 신라관직을 갖고 沙喙部소속이 되어 있다. 이 도설지도 무력과 같은 경우이며, 더 명확한 근거가 화랑세기에 나온다. 이 도설지는 대가야왕 이뇌의 아들이라는데 이뇌는 신라소지왕비 선혜부인이 낳은 兩花公主를 왕비로 맞았다고 한다 [159]. 이뇌가 죽고 도설지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니, 도설지의 어머니는 양화공주일 것이다. 양화공주의 母 선혜부인은 진골정통계보에 있는 인물이니 도설지는 沙喙部일 수 밖에 없다. 그 도설지가 대가야가 망한 뒤 신라에 귀부해 관직을 가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단양적성비와 창녕척경비에 나오는 도설지를 바로 그 인물로 볼 수 있다.

김유신가문과 도설지가 신라인의 혈통관념으로는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유신가문을 가야계로만 인식하는 것은 후대 부계혈통관념의 소산일 뿐이라고 본다. 후대 김유신의 후손과 왕실간에 갈등양상이 노출되는 것도 신라인이 부계적 혈통관념으로 김유신가문을 異族으로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조부 무력이 신라지배층에 합류할 시기에는 그런 혈통관념이 희박했다고 보여진다.

VIII. 맺음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화랑세기』를 부정하고 있다. 필자는 진본이라는 입장에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지리한 논쟁만 할 것이 아니라, 『화랑세기』의 내용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어떤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 속에 신라인만이 알고 있어야 할 古代社會의 斷面이 있다면,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母系問 題는 신라사 연구자에게 있어 오랜 숙제가 되어 있었다. 『화랑세기』의 저자는 모계문제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숨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알아 채기가 쉽지 않다. 바로 이 점이 『화랑세기』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 랑세기』에서 신라인은 시대에 따라 모계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점도 주목해야 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부계중심적 혈통관념으로 전환해 가고 있는 것이다 [160]. 이 문제는 역사학은 물론이고, 인류학분야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문물을 받아들이기 전 우리 고대사회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가 과연 신라인이 썼는지, 아니면 後世 어떤 사람이 전해진 자료를 통해 적당히 작성해 낸 위서인지, 그 내용면에서의 분석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위서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해서, 또 그 출처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연구자료로서의 사용을 보류한다면 귀중한 보물단지를 안고도,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뚜껑열기를 주저하고 있는 꼴이 된다.

필자는 『화랑세기』에 있는 大元神通과 眞骨正統이라는 양대 모계혈통에 관심을 갖고 분석하여, 신라인이 모계혈통으로 신분을 결정하였으며 2대 모계혈통집단이 하나의 독특한 체제를 형성하고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 체제로 인해 근친혼, 三姓交立, 갈문왕, 골품제 등, 특이한 신라만의 관습과 제도가 나타났다고 본다.

또 이 체제가 인류학에서 말하는 二部體制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신라인이 만든 독특한 체제가 아니라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보편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기존 문헌자료에서는 구체적인 형태를 찾을 수 없었고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확인된다. 기존 자료는 이러한 내용이 어떤 이유에 의해 감춰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깊이 들여다보면 『화랑세기』에 비친 그 체제의 흔적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체제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기록이라 주장한다.

무리한 억측과 그 억측에 기반한 논리전개가 있었다고 볼 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시도로 신라 왕실의 의문과 『화랑세기』의 眞僞問題에 접근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전문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집중분석하고 연구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

1 末松保和, 1954, 「新羅上古世系考」
2 今西龍, 末松保和, 金哲埈 등
3 지배층이라 함은 王室과 高官들이 속해 있는 성골 및 진골귀족집단 전체를 말한다. 『화랑세기』에 骨人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배층은 후대 姓을 사용한 이후에는 朴씨와 金씨 姓을 가진 親族集團을 가리킨다.
4 譯註解本 『화랑세기』 저자 이종욱도 모계혈통의 우위를 부정하고 있다.
5 本稿의 분석자료로 李鍾旭의 譯註解本 ,1999,『화랑세기』를 사용한다.
6 이하 본문과 각주에 O세 O쪽으로 표기하는 경우는 李鍾旭의 譯註解本『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 풍월주와 이 책의 쪽수를 가리킨다.
7 比助夫는 兵部令이란 고위관직을 지냈다고 한다.
8 野國王의 딸이란 설을 竝起하고 있다.
9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病死한 것으로 나오지만 『화랑세기』는 政變으로 폐위되었다고 했다.
10 「13세 龍春公」(149쪽) 용춘공의 世系에서 皇我가 왕의 총신들과 더불어 음란하여 伐知와 德知를 낳았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 벌지와 덕지는 눌지-자비왕대 활약하는 대표적인 武將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도 신분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11 이 경우 無骨品이란 말은 골품이 없다기 보다 골품이 낮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이 옥진이란 여인의 후손과 일족들이 여전히 고위직에 오르고 왕비가 배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진흥왕비 사도부인도 옥진의 딸이다.
12 李鐘旭, 2000.『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이야기』 127쪽, 김영사
13 「8세 文奴」(104쪽) 世系에 비조부는 소지왕비인 善兮夫人이 OO과 相通하여 낳았다고 했다.
14 『삼국사기』 제38권. 雜志 ,제7.「職官조」
15 신라인은 人名에 "夫"가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夫를 宗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 居柒夫-荒宗) 또 여인들을 한결같이 "夫人"으로 부르고 있는데, 남성의 이름에 따르는 "夫'와 여인의 이름에 따르는 "夫人"도 『화랑세기』의 宗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16 아이혜가 기림왕의 母라는 것은 『삼국유사』「왕력」참조
17 阿老夫人이란 이름은 『삼국유사』「왕력」에만 보임.
18 「6세 世宗」(82쪽) 세종의 世系에 나오는 미추왕이 했다는 말 "玉帽의 姻統이 아니면 왕비로 삼지마라"고 했다는 대목은 화랑세기저자 자신도 母系體制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거이다.
19 「10세 미생랑조」(119쪽, 149쪽) 보美와 같은 시대 인물로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와 미해가 등장한다.
20 이종욱 저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이야기』 57-70쪽, 2000. 김영사
21 이종욱은 남자는 1대에 한해 어머니의 계통을 잇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 여성들이 자신만 아버지의 姓을 따르고 자식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 없는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모계로 전해지는 姓이라고 볼 수 있다.
22 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111-121쪽
23 이종욱교수등 일부 연구자는 部를 단순한 행정구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24 姜鳳龍, 1991, 「新羅 上古期 中央政治體制의 基本原理와 部」에서 강봉룡 교수가 먼저 신라의 部가 모계혈통을 기준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25 이 시기 모든 왕비는 진골정통 아니면 대원신통이다. 대원신통 계보는 화랑세기에 나타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26 異腹兄弟가 아니고 同腹兄弟라면 同腹兄(법흥)이 낳은 딸(지소부인)과 혼인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혼인형태는 극히 보기 힘들다. 이런 혼인에서 왕위계승자가 나올 수는 없다.
27 『삼국유사』「奇異 제1권」「신라시조 혁거세왕」조는 喙에 해당하는 梁의 발음에 대해 道라고 했지만 현재는 연구자에 따라 탁, 달, 돌, 훼등으로 각기 다양하게 발음하고 있다. 本稿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는 탁으로 정리한다.
28 『北齊書』「新羅傳」의 『 新羅王 金眞興 ....』이란 대목
29 문무왕비문 『及 國學少卿金 .....』
30 그 이전에는 왕의 系譜에만 姓이 나타난다.
31 『화랑세기』 46-47쪽, 대원신통, 진골정통계보도 참조
32 아로부인도 진골정통임.
33 『삼국사기』「지리지」高寧郡조 참조
34 「6세 사다함조」68쪽, 「8세 문노조」 94쪽, 104쪽
35 『화랑세기』「跋文」"先考嘗以鄕音述花郞世譜.... 아버지가 향음으로 써놓은 花郞世譜"를 한문으로 다시 정리했음을 나타낸다.
36 화랑세기를 僞作으로 보는 근거중의 하나이다. 울산천전리 書石에는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지만 화랑세기와 같은 인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人名標記方式이 다른 점을 看過하고 있다.
37 단양적성비 및 창녕척경비에 보이며 무력지는 김유신의 조부 武力으로 비정함
38 姜鳳龍도 울진봉평비문의 斯夫智葛文王(立宗)은 법흥왕과 母가 다른 형제이다.( 1991,「 新羅上古期 中央政治體制의 基本原理와 部」)하여 部가 母系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全德在는 喙部인 눌지왕의 딸이 沙喙部 지증왕의 母가 된 사실을 들어 모계설을 일축하고 있다.(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64쪽) 兩部가 交婚하는 관습을 모르는데서 나온 견해이다. 눌지왕의 妃는 진골정통인 阿老夫人이다. 눌지왕의 딸 조생 부인도 진골정통일 수 밖에 없고 지증왕도 마찬가지이다.
39 崔在錫,「新羅時代의 骨品制」 1986 .『동방학지 53』
40 국사편찬위원회간 『한국사』7권 「신라의 신분제도」245-271쪽
41 崔在錫,『위 논문』(60쪽) 성골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로 池內宏, 李德星, 武田幸男, 申東河, 申瀅植을 꼽고 있다.
42 李基東은 진지왕계가 배척됐다고 주장하며 銅輪계 성골설을 제시했다.(1972)
43 末松保和를 위시해 김춘추의 혼인관계를 결격사유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44 「13세 용춘공」146쪽
45 이종욱저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이야기』 208-231쪽
46 『삼국사기』「신라본기」 진덕여왕조 " 眞平王母弟 國飯葛文王之女" 이 대목 이후 갈문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47 二部體制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2개 部, 즉 혈통을 달리하는 두 집단이 하나의 권력구조(체제)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48 「11세 夏宗조」(128쪽) " 진골정통은 只召를 宗으로 삼고 대원신통은 思道를 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祖는 玉帽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祖는 보美로부터 출생하였다."
49 김춘추의 父에 대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龍樹 또는 龍春이라 해서 동일인물의 두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화랑세기』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간이며 김춘추는 용수와 天命夫人간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했다. 「13세 용춘공조」141-149쪽
50 김춘추의 姨母가 선덕여왕이다.
51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의 혼인을 적극 기피했음이 분명한데 그가 다른 여인과 혼인한 사이였다는 문제도 있겠지만 이런 신분문제때문이었을 것이다.
52 「4세 이화랑조」(57쪽) 숙명공주가 진흥왕의 아들을 낳고 왕비에 봉해졌다고 한다.
53 聖骨의 출발을 골품제가 시작되었다는 시점으로 판단해 여러 說이 있지만 성골에 대한 인식은 시조 혁거세왕부터라는 『삼국사기』를 따라야 한다고 본다.
54 『화랑세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참고해 위작되었다면 眞骨은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화랑세기』가 기존자료를 참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5 선덕여왕대부터 신라를 사실상 寡頭體制로 이끌고 가던 김유신과 김춘추가 진골정통이고 그들의 처인 문명부인과 지소부인도 진골정통이다. 『삼국사기』「열전」에 등장한 50여명의 인물 중, 40인이 신라인인데 이 중에는 8명의 沙梁人이 있다. 貴山, 項(추항), 强首, 崔致遠, 驟徒(취도), 訥崔(눌최), 金令胤, 匹夫가 그들인데, 劍君은 沙梁宮의 舍人이라 했는데 역시 사량부 사람일 것이다. 대신 사량부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 반해 6세기대 금석문에서 沙梁部(사탁부)와 관직을 半分했던 梁部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居柒夫와 異斯夫는 울진봉평비와 단양적성비에 탁부(梁部) 소속이라 했는데도 열전에는 이들의 소속 부를 기록하지 않았다. 열전의 原典이 기록되던 시점에 梁部가 사실상 몰락한 상황이 아닌가 추정한다.
56 이종욱 譯註解本 『화랑세기』 46-47쪽, 진골정통, 대원신통계보도 참조
57 『화랑세기』는 骨人또는 骨族이라 했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을 합쳐서 골인이라 불렀다.
58 위『화랑세기』46-47쪽, 진골정통,대원신통계보도 참조
59 『中國正史朝鮮列國傳』 525쪽, 金聲九譯. 東文選
60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이야기.』 96-97쪽
61 신당서의 제1골을 진골로 보는 사람도 많다.( 崔在錫, 위 논문, 진골로 보는 사람은 今西龍, 李基白, 邊太燮, 武田幸男, 李明植등)
62 「10세 美生郞」118쪽
63 최영성저 『최치원전집1권』 64쪽, 아세아문화사.
64 金哲埈(1968)은 무열왕의 7대손이 되는 範淸이 族降한다는 점과 무열왕이 내물왕의 7대손인 점을 들어 내물왕의 7대손, 박혁거세의 7대손, 석탈해의 7대손 등에서 世代가 단절되는 점과 연계해 七世同一親族集團이란 용어로 7대가 되면 家系가 分枝해 나간다고 했다.
65 白南雲, 今西龍, 末松保和, 金哲埈, 李光奎 등
66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자이며 전대 소지왕과는 再從間이기에 부계로는 거리가 멀지만 어머니가 눌지왕의 딸이므로 모계가 가깝다.
67 「1세 위화랑조」「2세 미진부조」 48-55쪽
68 「2세 미진부조」53쪽 」
69 龍春과 龍樹를 삼국사기는 동일인물인 듯이 기록했지만 화랑세기는 한 인물의 두 이름이 아니라 兄弟이며 용수가 용춘의 형이라고 했다. 다른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70 이종욱은 이 出宮을 성골의 신분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앞뒤 문장을 보면 왕위와 멀어졌기에 출궁한 것으로 봐야 한다.
71 원문에는" 善德以爲公能扶己..." 라 하여 공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해석했지만 이어지는 대목 즉 용춘이 자식을 보지못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는 대목을 보면 혼인관계를 나타낸 말로 볼 수 있다.
72 김철준. 1968. 「新羅時代의 親族集團」 『韓國史硏究 1』
73 삼국사기 지증왕4년기사에 신하들이 신라국왕이라는 존호를 올렸다는 내용은 이 때 지증왕이 갈문왕에서 왕이 되었던 사실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럼 지증왕이 갈문왕일 때 왕은 공백이었는가? 필자는 그 시점의 왕은 지증왕비 연제부인이 아닐까 한다. 뒤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74 「11세 夏宗조」(128쪽) 풍월주와 부제의 모계가 항상 다르지는 않았는데 이 때 대원계와 진골계간에 극심한 대립이 있어 하종의 母, 미실이 화합을 위해 그런 조치를 했다고 한다.
75 울산천전리 書石에 보이는 只沒尸兮妃가 사부지갈문왕의 妃, 只召夫人으로 볼 수 있기에 사부지를 立宗으로 비정하고 있다.
76 뒤에 다시 거론하지만 昔氏왕조대의 예를 보면 왕의 아들이 다른 모계이더라도 바로 계승하지 못하고 몇 세대를 거르거나 몇 대를 거르는 예를 볼 수 있다.
77 宗은 마루, 근원, 근본, 우두머리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宗家나 宗孫과 같은 의미르 갖고 있는 것 으로 보여 지는데 그 중에서도 宗孫과 가장 근접할 것이다. 맏이로만 내려오는 순수한 혈통의 기준, 즉 모계의 宗孫이란 말이다.
78 『삼국사기』 「잡지」 제8 職官조 中에서 『 진평왕7년 大宮과 梁宮, 沙梁宮에 각기 私臣을 두었다.』고 했는데 대궁의 주인은 왕, 梁宮과 沙梁宮의 주인은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宗이라 추정할 수 있다.
79 「10세 미생랑」「13세 용춘공」(128쪽, 149쪽) 내물왕의 아들 美海(미사흔)가 보美의 夫라 했다.
80 「6세 세종」83쪽
81 벌휴왕의 아들인 골정은 10대 내해왕의 아버지인 이매와 형제간이다. 이매는 내해왕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이매는 갈문왕이란 말이 없다.
82 백반과 국반이 진평왕의 동복아우라 해석하지만 "封母弟伯飯"을 동복아우라 볼 근거는 없다. 점해왕대기사에 점해왕이 "조분왕의 동복아우다"란 기사가 있지만 이 경우는 同母弟로 적었다. 진덕여왕조 기사에도 眞平王母弟國飯이라 했지 同母弟란 표현은 없다. 母弟는 진평왕 母의 아우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83 10대 내해왕과 11대 조분왕은 4촌간이다. 내해왕은 조분왕의 누이동생과 혼인해 4촌간의 혼인이 있었지만 조분왕은 내해왕의 딸과 혼인해 5촌혼이 되었다.
84 今西龍, 末松保和, 金哲埈 등
85 沙梁里는 沙梁部를 가리키고 사탁부, 진골정통, 김씨족을 나타낸다고 본다.
86 필자는 김씨가 사탁부, 진골정통을 가리킨다고 추정하고 있다.
87 今西龍, 金哲埈 등
88 박혁거세의 母라는 娑蘇설화가 전해짐. 『삼국유사』 제5권 感通제7「 仙桃聖母 隨喜佛事」
89 뒤에 다시 분석하지만 필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에 있어서 여인들의 姓은 모계로 전해졌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면도 보인다. 하지만 모계와 무관한 姓은 후대 전승과정에서 수정되었다고 본다.
90 탁부인 박혁거세의 제사를 같은 部의 사람이 주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91 왕이 된 사람은 解나 休라는 비슷한 音의 돌림자를 쓰고 있음이 확인된다. 유교사회에서는 避諱法이라 하여 같은 세대가 아니면 父子間 또는 祖孫間에 같은 글자를 이름으로 쓰지 않는데, 『화랑세기』는 세대를 달리하는 直系間에도 돌림자를 쓰고 있는 사실이 나타난다.
92 眞骨正統系譜 : 雲帽-玉帽-紅帽-阿爾兮-光明-內留-阿老-鳥生-善兮-保道-只召
93 내해와 조분은 아들이 있는데도 사위가 먼저 계승하는 사실은 전형적인 모계 우선의 근거이다.
94 阿爾兮는 화랑세기의 진골정통계보에 나오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왕력」에 유례왕의 母를 O召夫人이라 했다. 阿爾兮와 O召夫人(박씨)은 正妃와 繼妃관계일 수 있다.
95 삼국사기는 기림왕의 母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는 아이혜부인이라 했다. 삼국사기는 아이혜부인이 조분왕비라고 했으므로 아이혜부인은 아들뻘인 걸숙과 관계해 기림왕을 낳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96 광명도 진골정통계보에 있으며 아이혜의 딸이다.
97 왕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유례, 기림, 흘해는 왕비가 실제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서 왕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화랑세기는 후손을 낳아 가계를 계승했을 때 비로소 왕비책봉이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차돈이 흘해의 후손이란 기록(삼국유사 흥법편. 이차돈계보)이 있어 흘해가 자식을 남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聖骨신분을 전해줄 正妃 소생이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왕력에서 왕비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는 반드시 자손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98 日人學者들, 특히 池內宏, 三品彰英, 井上秀雄 등은 내물왕이전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내물왕을 실질적인 신라건국자 또는 새로운 정복자로 보았다.
99 李鍾旭, 2000,『신라의 역사 1권』 52-53쪽
100 金哲埈, 1962,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合輯
101 이 시기의 왕호 尼師今이 나이 많은 사람이란 뜻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王系가 둘이고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계승한다면 출생과 왕위에 즉위하는 시기는 많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102 『삼국사기』「신라본기」 내물마립간 37년기사. 실성이 내물왕과 혈연관계가 없다면 볼모의 자격이 없다. 이런 인질은 통상 차기 왕위계승자였다. 당시 실성이 차기왕위계승자였다고 봐야 한다.
103 눌지가 내물왕의 아들임에도 인질로 외국에 보내지지 않고 그 아우 卜好와 未斯欣이 인질이 되어 고구려와 왜에 잡혀간 사실을 보면 눌지는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104 炤知王의 母가 미사흔각간의 딸이라고 했으므로 후자가 옳다고 본다
105 앞서 대원신통의 祖 보美가 미사흔과 혼인했다는 점을 주목할 것. 소지왕母도 대원신통이 되어야 한다.
106 소지왕의 母가 박씨라는 기록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사흔이 내물왕의 아들이고 내물왕은 김씨이므로 박씨라는 기록은 오류라고 판단해 김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을 말한다.
107 뒤에 성씨문제분석에서 재론하겠지만 大元神統=喙部=朴, 眞骨正統=沙喙部=金 이러한 구도는 실제 사서 기 록과 거의 부합함을 알 수 있다.
108 추정에 의한 분류지만 실제 기록상, 王母의 姓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모계의 姓이 사용되었다는 근거로 본다.
109 이사금 시기 5대 파사왕이 아들인 지마왕에게 바로 왕위를 계승한 사례로 보면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계승 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던건 아닐 것이다.
110 8세 문노공조 참조. 22세 양도공조에 나오는 世己는 12살이 많은 道里라는 寡婦를 맞아 혼인했는데 처보다 신분이 낮았기에 매일 구타를 당했다는 기사가 있다.
111 황남대총과 서봉총 모두 두 고분을 잇대어 붙인 쌍분이다. 죽어서도 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妻보다 한단계 낮은 신분으로 왕이 된 자의 무덤이라 본다.
112 「13세 용춘공」145-147쪽
113 「13세 용춘공」279쪽, " 善德以爲公能扶己..."
114 천명과 선덕은 지소-송화-마야로 이어지는 진골정통계보이다. 천명과 선덕에게 양보하라는 것은 왕위라기보다 진골정통의 중심인 宗(宮主)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용춘이 대를 이으면 마야부인 소생중 제3녀가 왕비가 되었을 것이다.
115 이 시기 여성의 姓, 朴氏를 대원신통으로 추정한다.
116 Rivers의 『Social Organization』인용함.
117 金哲埈, 1968, 「新羅時代의 親族集團」
118 皮瑛姬「Double Descent이론을 통해서 본 신라왕의 身分觀念.1979」『新羅史論文選集』7권.
119 半族社會란 모계사회 단계의 한 種族내에서 2개의 친족집단으로 갈라져 종족내의 族外婚으로 혈통을 계승하는 사회로 모계반족사회만이 아니고 부계반족사회도 있다. .
120 北濟書 新羅傳에 신라왕 金眞興이란 구절이 최초로 보이나 梁書 新羅傳에는 법흥왕에 해당하는 인물을 기록하며 姓을 慕,이름을 秦이라 하였으나 봉평비에 나오는 법흥왕의 이름 牟卽智와 통하므로 이 모진은 이름의 첫글자를 姓으로 오인한 것으로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
121 진흥왕이 사용한 姓은 외교문서로서의 요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122 진흥왕의 母 지소부인이 진골정통이므로 진흥왕도 진골정통이다.
123 진흥왕이 沙喙部라는 근거는 없으나 앞서 지증왕이 진골정통이며 沙喙部였기에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다.
124 堤上, 異斯夫, 異次頓, 圓光, 只召 등 기록에 따라 姓이 다른 中古期 여러 인물들의 姓을 참조.
125 沙梁里는 沙梁部 즉 진골정통이며 김씨집단을 가리킨다고 본다.
126 『삼국유사』 제5권. 感通 제7.「仙桃聖母와 隨喜佛事편」
127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38년 기사 중, 호공이 말했다는 二聖도 대등한 세력을 가진 2개 집단의 등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128 허루갈문왕은 앞서 유리왕대기사에서 或云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박씨라 했다.
129 왜 왕비나 王母등 여인들만 母系姓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白南雲은 여성은 母系姓, 남성은 父系姓을 계승했다는 說(1932. 조선사회경제사)을 제기했지만, 화랑세기는 남성도 母系 血統을 따르고 있다. 왕의 父系가 명확하므로 모계체제를 이해하지 못한 후세 史家들이 부계에 따라 姓을 修正하였을 것으로 본다.
130 법흥왕비 保道夫人은 『화랑세기』(49쪽) 에 비처왕(소지왕)의 딸이라 했다. 비처왕의 모계가 박씨로 추정되므로 혼동이 있었다고 본다.
131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넓은 범위의 박씨 집단, 김씨 집단 중에서 당시 지배층 내부에서 세력을 다투던 좁은 범위의 직계 혈통집단을 가리킨다고 본다.
132 姓을 소급하여 부여하였다고 믿는 中古期 의 인물만 예로 든다. 설총이나 설계두 등 薛씨는 예외인데 뒤에 본문에서 거론하겠다.
133 末松保和등 모계론자들이 내세우는 유력한 논거 중 하나이다. 김철준은 반대로 아진종,습보가 부계이고 길승,공한은 모계라고 했다.
134 乞解대왕은 석씨의 마지막왕 訖解의 誤記일 것이다.
135 습보갈문왕은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지증왕의 아버지라 했다. .
136 「6세 문노」(81쪽) 苔宗의 아버지는 아진종, 어머니는 보옥공주라 했다.
137 아진종의 妻가 박씨이면 이사부와 이차돈의 母도 박씨이다.
138 신라초기기록을 부정하는 日人學者들은 昔氏姓의 不在를 주장했다.
139 내해왕비의 모계가 분명치 않아 석씨라고 적었을 것으로 본다.
140 예: 拓拔部-拓拔氏, 于文部-于文氏, 慕容部-慕容氏 段部-段氏
141 영일냉수리비, 창녕척경비, 북한산순수비등에는 "部"字가 생략되었다. 部는 혈통이외 다른 의미를 포함했는지 모르나 部가 생략되었다는건 바로 姓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42 本彼部와 斯彼部도 喙部나 沙喙部와 마찬가지로 半族體制를 형성했는지도 모른다. 斯彼는 本彼에서 갈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父系 半族社會도 있다.
143 「7세 설화랑조」(89쪽) 원효대사와 薛聰도 설원랑의 후손이라 했다.
144 17官等중 제 9위 級伐 의 다른 이름
145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 奈乙神宮 설치기사등.
146 李鍾泰 「新羅의 始祖와 太祖」 2000.『백산학보 52호』
147 「20세 예원공」181-182쪽, 예원공이 唐에 사신으로 갔을 때 唐人의 질문 『신라인은 金天을 神으로 여기는가? 日光을 神으로 여기는가?』 에 대해 금천은 신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금천은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小昊金天, 日光은 박혁거세를 말하는게 아닌가 한다.
148 前間恭作, 木下禮仁, 姜鍾薰 등의 주장인데 통설이 되었다.
149 64세에 등극한 탈해왕때 태어난 알지가 勢漢-阿道-首留-郁甫를 거쳐 5世代가 지났는데 탈해의 손자 벌휴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구도가 관직에 오르는 상황은 불합리하므로 김알지를 구도로 비정했다.
150 박제상계보와 내물왕계보에 모두 나오는 阿道는 세대가 어긋나기는 하지만 기록의 오류를 감안하면 同一人 인지도 모른다.
151 末松保和는 星漢의 星을 별이란 뜻에 주목하여 pur-khan 즉 혁거세의 다른 이름 弗矩內와 연결했다. 1954. 「新羅上古世界考」
152 『삼국사기』「신라본기」소지마립간 9년기사. "九年 春二月 置神宮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 소지왕은 필자의 분석으로 박혁거세와 같은 모계이다. 소지왕이 같은 계통의 시조를 받든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53 小田省吾, 邊太燮, 前間恭作, 木下禮仁, 姜鍾薰 등
154 朴元道는 신라계로 보인다.
155 『화랑세기』에서 김유신을 진골, 대원, 가야 3파의 자손이라고 했다. 김유신의 조부인 무력은 진흥왕의 딸 아양공주와 혼인했다하므로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대원신통이 되고 김유신은 진골정통인 만명을 어머니로 두었으므로 진골정통이다. 김유신을 가야계로 보는 것은 후세 사가들의 시각일 뿐이다.
156 무력의 어머니 즉 구형왕의 왕비는 국적이 어디인지 화랑세기를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신라의 압박이 어느 때보다 가중되던 시기이므로 신라여인 아닌 사람을 왕비로 맞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랑세기에 진흥왕이 자신의 딸을 무력에게 시집보냈다고 한 사실만 보아도 무력의 어머니는 골품이 높은 신라여인임을 추정할 수 있다.
157 창녕척경비에 나오는 沙喙部 都設智沙尺干도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158 『삼국사기』「잡지.지리1」 高寧郡조 참조
159 「5세 사다함」68쪽,「8세 문노」9쪽
160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二部體制의 종말 즉, 聖骨時代의 종말은 부계혈통관념의 증가로 해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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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韓國古代金石文 2권』1992. 한국고대사회연구소